#193
쿠릉, 쿠릉 하고 연속적으로 울리던 소리는 점점 이연과 가까워졌다. 이연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통로 너머를 주시했다. 저 멀리서 걸어올 산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기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산오가 화가 많이 났다는 종희의 말이 뒤늦게 머리를 스쳤다. 가라고 했다가, 없으니까 헐레벌떡 찾으러 오는 꼴이 산오 입장에서는 황당하겠지만. ……보면 무시하려나?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로 그러면 좀 그럴 것 같은데……. 그런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둔탁하게 공간을 울리는 소리는 계속 났다.
그런데 화났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요란하게 와야 하나?
그런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 소리가 뚝 멈췄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콰아앙!
담쟁이덩굴로 가득 찼던 벽에서 촉수들이 한가득 튀어나왔다.
두무기의 외관에 붙어 있던 그것들이 굵기만 조금 얇아진 모습이었다. 촉수들은 이연이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침입자를 향해 정확히 쇄도했다. 이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숙여 옆으로 굴렀다. 조금 전까지 이연이 있던 바닥에 촉수들이 푹 박히고, 두어 개는 몸에 스쳤다.
천만다행으로 몸은 무사했으나, 돌진하는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글에 금이 갔다. 아, 안 돼. 내 돈! 이연이 뒤늦게 내려다보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깨진 고글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적외선 표시도 안 되는 걸 보니 단순히 액정만 고장 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너넨 죽었어…….”
이연이 고글을 쓰다듬으며 울분을 삼켰다. 그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허탕을 쳤음을 깨달은 촉수들이 다시 꿈틀대며 자리를 잡았다. 곧장 이연의 몸통을 지르려는 촉수를 간신히 막아 내자, 그 전투음을 들은 다른 촉수들 역시 이연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한 광경이었다.
쾅, 쾅, 쾅! 요란한 충돌음이 연속해서 났다. 수중 전투였던 조금 전과 달리 공기가 있는 통로는 소리를 전혀 먹지 못했다.
처음 몇 번은 방패를 만들어 일일이 막아 냈지만, 애초에 수량이 상대가 안 됐다. 점점 촉수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이연은 바닥에 박힌 날카로운 창을 만들어 냈다. 예기가 도는 쇳덩이들이 나선을 그리며 솟아올라 이연에게로 접근하는 촉수를 찔렀다. 워낙 단단한 외피를 가지고 있어 정통으로 찔러도 긁히는 선에 그쳤으나, 물속에서 싸우던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만일 찌르지 못하고 빗나가도 창 사이의 좁은 틈에 끼인 촉수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매서운 공격에 촉수들이 주춤하는 사이 이연은 다시 손을 휘둘렀다. 아까와 같은 그물이 다시 나타났다. 새하얀 그물은 다시 뜨개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촉수들을 엮어 속박했다. 꿈틀거리는 촉수들이 발버둥 쳤으나 그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촉수들의 길이가 끝없이 늘어난다는 사실이었다.
길이가 정해져 있던 두무기의 외피 촉수와는 달리, 두무기의 내피에서 자라난 촉수들은 편의에 따라 길이가 자유자재로 변했다. 한계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연에게 닿기에는 손색없는 길이였다. 촉수들은 묶이고도 제 몸의 길이를 늘여 이연에게 달려들었다.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여러 개로 엮인 줄기가 다발로 뭉쳐 몰려드는 모습은 제법 위협적이었다. 이연이 다시 팔을 휘저었다. 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주먹이 촉수 다발을 향해 펀치를 날렸다. 콰앙! 촉수가 강한 충격에 주춤한 틈을 타 거대한 주먹이 사라지고 천장에서 크고 두꺼운 쇠 방패가 촉수 다발을 찍었다.
그리고 촘촘한 간격을 두고 같은 방패가 연속적으로 내리꽂혔다.
쿵! 쿵! 쿵!
방패들은 그대로 촉수 다발을 땅에 박아 버릴 것처럼 연속적으로 내리눌렀지만, 바닥 역시 어마어마하게 단단해 일정 깊이 이상은 들어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이연이 더 많은 모래를 불러들였다. 쾅! 쾅! 쾅! 쾅! 방패 몇 개가 더 떨어지자 힘에 밀린 촉수 다발이 점점 바닥 아래로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이연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막 새로운 방패를 추가로 소환하려는 그때.
벽에서 다시 촉수들이 솟아났다. 새로운 촉수들은 곧장 촉수 다발을 짓누르고 있는 방패로 달려들어 몸을 칭칭 감았다. 굳건히 버티는 듯하던 방패들은 결국 득달같이 잡아당기는 촉수들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날렸다.
가만히 놔뒀다가는 잡아 뒀던 촉수들까지 모두 풀려 날 판이었다. 혀를 찬 이연이 막기 위해 다시 모래를 불러 모으려는데.
별안간 그를 향해 커다란 손 하나가 뻗어 왔다.
강한 압박감에 놀란 이연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려던 찰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능력 해제해.”
그 말과 함께 이연의 몸이 무언가에게 끌어당겨졌다.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순식간에 포박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으나, 이연은 바로 벗어나지 않았다. 조금 전 귓가에 들린 음성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가 팔자에도 없던 호수 바닥까지 들어와 찾던 사람이었으니까.
‘제산오…….’
왜 능력을 해제하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허튼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이연은 순순히 능력을 없앴다. 시야가 가로막혀 보이지는 않았지만, 통로 안에 풀어놓았던 기력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연이 능력을 모두 모래로 돌린 걸 알았을 텐데도 산오는 이연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묘하게 매끄럽고 서늘한 감촉에 이연이 머쓱하게 그를 불렀다.
“야, 이제 놔 줘도…….”
“닥치고 가만히 있어.”
낮은 음성이 좁은 공간에서 울리는 것처럼 이연의 전신에 메아리쳤다. 생경한 감각이었지만 어조만큼은 퍽 익숙했다.
하여튼 말본새 하고는. 떨어져 있다가 만나도 이거 하나만큼은 그대로다. 뭐, 안 본 지 고작 하루 정도니까 그사이에 변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이연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산오의 말에 따라 입을 다물었다. 두터운 인간 벽 너머로 촉수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희미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산오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이연을 놔 주었다. 몸을 단단히 감아쥔 팔에 힘이 스륵 풀리더니 시야가 걷혔다. 능력을 해제할 때 손전등까지 함께 없애 산오의 품을 벗어나고도 어두웠다. 이연이 물었다.
“불 켜도 돼?”
산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안 된다는 말이 없는 걸 보니 그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이연은 다시 손전등을 하나 만들어 냈다. 곧 환한 빛 한 줄기가 공간을 비췄다.
“이 안에서 초능력을 이용해 두무기를 건드리면 생명 반응이 없어질 때까지 공격한다.”
몸을 일으킨 산오가 건조하게 내뱉었다. 얼굴은 멀쩡해 보였으나, 옷은 좀 꼬질해진 것 같았다. 이연은 그런 것을 살피느라 다소 맹한 대꾸를 했다.
“생명 반응이 없어질 때까지?”
“네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까지. 생명 반응만 없애면 되는 거라 벽을 쳐 막았다.”
그제야 이연은 산오가 제 몸을 광물로 변형해 이연이 있던 공간을 틈 없이 틀어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소리는 물론이고 맥박 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그가 방금 말한 정보들은 이론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아챈 것 같은 느낌이 진하게 났다. 즉, 제산오는 이연이 들어오기 전 내부에서 두무기의 촉수들과 이미 한바탕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친 데 있는 건 아니지?”
육안으로 확인하기엔 문제없어 보였지만, 산오는 온몸에 검은색 옷을 두르고 있으니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산오가 말했던 대로, 검은색은 혈흔이 잘 안 보였으므로.
이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산오가 별안간 고개를 휙 돌렸다. 이제 보니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놈이 왜 여기 있지?”
질문이라기보다는 신경질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연이 조금 움츠러들어 대답했다.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대단한 정성이군. 다음엔 용암 속에 잠수해 보지 그래.”
씹어 먹듯이 쏘아붙인 산오는 사납게 노려보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찔끔한 이연이 변명했다.
“어차피 변이종은 음식 섭취를 안 하니까, 소화 기관이 없을 거 아냐. 그러니까 내부도 비어 있겠지. 예상이 맞았잖아. 너도 그래서 들어왔을 거고.”
“내 능력이 뭔지 몰라? 동기화하면 난 그냥 거대한 광물 덩어리다. 두무기에게 방어 기관이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고?”
여전히 짜증스러운 어투에 이연 역시 울컥했다.
“너야말로 내 능력 몰라? 너 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약 두무기가 소화 기관이 있었더라도 나한테 해를 끼칠 수는 없어. 방어 기관 역시 마찬가지고. 두무기는 보주 변이종이니까 내부에서 해치우는 게 제일 빨라. 너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수없이 쏟아지는 두무기의 촉수들을 이기지는 못한다 해도,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촉수가 무한정으로 늘어난다면 이연 역시 무한정으로 모래를 불러내면 됐다. 어디 가서 무시당할 능력은 절대 아니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됐다.”
산오는 부글부글 끓는다는 얼굴로도 팩 돌아서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답지 않게 얌전한 모습에 오히려 놀란 것은 이연이었다. 이연은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야,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