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산오는 이연과 거의 비등한 능력을 가졌고, 공격 능력은 더 강했으며, 상급 변이종 상대 경험은 훨씬, 훨씬 많았다. 당연히 두무기를 처음 맞닥트렸을 때 이연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터였다. 촉수의 공격을 받고, 대응하고, 끝이 없어 보이니까 묶어도 봤겠지.
하지만 이건 전부 소모전이었다. 단순히 구속해 둔다고 두무기가 알아서 얌전해질 리가 없었다. 그 상태로 영원히 호수 바닥에 처박아 놓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산오가 여기 틀어박혀 내내 두무기를 감시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았다. 결국 어떻게든 처치해야 해결되는 일이었다.
촉수를 상처 입히는 데에도 큰 품이 드는 것을 생각하면 몸통 역시 비슷한 사정일 터였다. 오히려 크고 두터운 만큼 더 단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무식하게 견고한 변이종을 겉에서 조금씩 타격을 입혀 부수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이다 못해,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작업이었다.
두무기는 2급 변이종, 즉 보주 변이종이다. 두무기의 외피가 단단한 것은 보주의 힘 때문이었다. 청호나 다발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보주는 변이종의 내부에 있다.
‘그 촉수를 이용해서 생명체를 잡아먹고요.’
공교롭게도, 산오와 이연은 최근에 보주 변이종을 내부에 들어가 잡아 본 적이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이연이 몸을 움직여 두무기의 머리와 마주 보고 섰다. 검은 대머리 같은 머리통 두 개는 눈도 코도 없어 더 괴물처럼 보였다.
산오가 안으로 들어갔다는 증거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공간과 융합하는 다발신과 달리, 두무기 안에는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건 그냥 도박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끝없이 영역을 확장하던 하얀 그물이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이어서 모래 몇 알이 부스스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그물은 완전히 모래로 변해 흩어졌다. 격렬하게 움틀대던 촉수들은 움직임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지자마자 무방비하게 서 있는 조그만 먹잇감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무수한 줄기들이 이연의 몸을 잡아채기 직전.
팍! 머리를 감싸던 공기 방울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이연은 숨을 참으며 두터운 막을 만들어 제 전신을 감쌌다. 촉수들은 자유를 찾은 흥분에 겨워 견고하게 두른 방어막까지 통째로 집어 들었다. 강한 압박감에 이연이 이를 악문 순간, 순식간에 끌어당겨졌다. 방어막이 막 얼굴을 덮기 직전 거대한 변이종의 왼쪽 머리가 아가리를 쩍 벌리는 것이 보였다.
곧 거센 바람이 그를 안쪽으로 빨아당겼다.
빈틈없이 감싼 막은 이연의 시야마저 모두 차단했다. 고글 덕분에 적외선으로 내부 지형—변이종의 몸통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연과 함께 삼켜진 호수 물이 흐름을 타고 급물살로 변해 몸이 마구 흔들렸다. 어찌나 과격하게 휘청이는지 평생 멀미 같은 건 안 해 봤는데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미리 방어막을 두르지 않았으면 어디 하나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구불구불한 두무기의 목구멍에서 한참을 표류한 이연은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에서 거칠게 휩쓸던 물결이 점점 얌전해지고, 통로의 너비 역시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이연은 성급하게 능력을 풀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멈추었을 때, 그를 덮고 있던 막이 가루로 분해되어 흩어졌다.
내내 물에 들어가 있어 젖은 몸에 낯선 공기가 닿고, 축축한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가만히 숨을 들이켜니 정상적으로 호흡이 가능했다. 안에 산소가 좀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좀 놀라웠다. 비강으로 밀려오는 물비린내가 좀 심하긴 했지만, 이연이 들어온 경로를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문제였고…….
“흠.”
상태를 확인하듯 목을 울려 소리를 내고, 제 몸 여기저기를 구부리며 툭툭 털어 낸 이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광원이 하나도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쓰고 있던 고글을 목으로 내리고 커다란 손전등을 하나 만들어 내 이리저리 비춰 보자 주변 환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연이 서 있는 곳은 아주 거대한 광장 같은 공간이었다. 검붉은 색으로 우둘투둘한 속살은 바위처럼 단단했고, 천장까지 둥근 곡선을 그렸다. 둥그런 공간 한쪽에는 이어지는 길이 있었는데, 가파른 각도로 둥글게 구부러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하얀 돌 같은 게 빠짐없이 깔려 있고, 이연이 있는 곳에서 길의 반대편은 함께 삼켜진 호수물이 고여서 찰랑거렸다. 지대가 이쪽이 조금 낮은 듯했다.
그리고 위쪽은 불을 비춰 봐도 빛이 닿지 않아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연이 들어왔던 목구멍이 있을 터였다.
두무기의 내부는 예상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이었다. 마치 생물의 몸속이 아니라 어디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건 뭐지?”
이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어두운 톤인 벽이나 천장과 달리 바닥은 자연적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새하얀 색깔이었다.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끝없이 널려 있는 것을 보니 정원에 소복하게 깔아 둔 자갈 같기도 했다.
그래도 두무기가 배 속에서 인테리어나 하고 있던 건 아닐 텐데. 의아함을 느낀 이연은 허리를 굽혀 자세히 살펴보다가, 이게 평범한 자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 정체 모를 조각들은 크기와 굵기가 다양했는데, 보통 돌멩이들이 이리저리 깎이고 닦여 동글동글한 것과 달리 대체적으로 길쭉한 모양이었다. 아예 쪼그려 앉아 특히 수북한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본 이연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쥐어 보았다. 새하얗고 끝이 뾰족한 막대 같은 조각은 은근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요리조리 살펴보던 이연이 다른 조각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시야에 걸리는 익숙한 형태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통으로 구운 생선을 먹을 때면 흔하게 보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이연은 이 하얀 것들이 뭔지 깨달았다.
두무기가 집어삼킨 생물들의 뼈 무덤이었다.
“미친…….”
달그락.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친 이연의 발밑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소리조차도 기분 나빴다.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발끝만 이용해 슬쩍 뒤적여 보자, 낡아서 반쯤 삭았거나 오래되어 갈라지고 먼지가 쌓인 뼈들이 안쪽에 깔려 있었다. 대부분은 물고기로 보였지만, 뭔지 모를—혹은 뭔지 추측하고 싶지 않은— 모양도 종종 보였다.
인근 동네에서 돌던 소문이 20년은 됐다고 했었지. 생각보다 더 참담한 광경이었다. 이 정도로 많은 생물이 죽었는데 공기 중에서 물비린내밖에 안 나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아무튼 절대로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제산오만 찾으면 당장 나가야겠다. 이연은 인상을 한 번 구기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 광장 쪽에는 아무도 없는 듯하니, 그다음 목표는 하나밖에 없는 통로 쪽이었다.
두무기가 짧고 두꺼운 원통 같은 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구불구불한 길, 아니, 장기는 알차게 들어차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였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들어오면서 예상했던 것에 가깝게 소화 활동까지는 하지 않아, 내부가 그냥 하얀 뼈들이 줄줄이 깔려 있는 거대한 통로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뒤로 갈수록 뼈 무덤도 점점 적어져 걷기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무렵에는 벽 쪽 구석에 뼈가 조금 쌓여 있는 게 다였다. 대신 뼈의 크기가 확연히 커졌다. 아마 처음 떨어진 지점에서 여기까지 움직여서 올 수 있을 만한 생명체를 생각하면……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이연이 조금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도 꽤 들어온 것 같은데 산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길에는 장애물 같은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못 보고 지나쳤을 리는 없었다. 아예 끝까지 간 건가? 최소 한 시간은 전에 먼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끙, 하고 신음한 이연이 벽에 슬며시 손을 댔다. 손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하얀 모래가 점점이 생겨났다.
순식간에 벽을 타고 퍼진 하얀 모래는 비선형적인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우아한 광경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벽 전체를 뒤덮은 담쟁이덩굴이었다.
끝까지 가기야 가겠지만, 그 전에 보내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이걸 공간 끝까지 퍼트리면 산오가 어디에 있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라곤 모두 스러진 곳에 뜬금없이 자라나는 무성한 식물은 아무리 봐도 수상하니까.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은 만약 제산오가 이걸 보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으면 어떡하냐는 건데…… 좀 더 눈에 띄는 방법을 써 볼까? 네온사인이라든가……. 이연이 벽에 댄 손가락 끝에 조금 더 힘을 주는데 별안간 쿠웅, 하는 둔한 진동이 울렸다.
“……제산오?”
이연은 조금 고민하다 아무도 없는 벽 안쪽을 향해 자신 없이 물었다. 대지가 진동하는 것 같은 묵직한 울림은 산오가 능력을 쓸 때 나오는 특징이긴 했으니, 부르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기대가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