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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91)화 (191/250)

#191

작은 빛들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이연의 시야가 닿는 곳을 가늠하는 것처럼 끝없이, 끝없이. 마치 수천 개의 꼬마전구를 호수 곳곳에 깔아 둔 것 같았다. 별처럼 빛나는 구들은 물살에 떠밀려 흔들거리며 주변을 밝혔다.

그제야 호수 아래의 풍경이 보였다. 울퉁불퉁한 바위들, 수중 식물들, 이리저리 움직이는 물고기 떼 같은 것들. 갑자기 생겨난 빛에 화들짝 놀라 도망치는 물고기도, 신기한 듯 오히려 다가가는 물고기도 있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다시 못 만드는 장면 또한 아니었으므로. 이연은 곧 관심을 끄고 주변을 살폈다.

산오가 두무기와 전투를 벌였다면 어딘가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얌전하게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지 않은가.

다행히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아서, 헤엄치며 근방을 돌아보니 곧 부자연스럽게 깎이고 튀어나온 바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암석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가 주변을 떠다니고 있는 것을 보니 아주 최근에 부서진 것 같았다.

이 자국을 따라가면 두무기나 제산오 중 하나, 혹은 둘 다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연은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한참을 헤매고 다녀도 소득이 없었다. 두무기의 도주를 막기 위해 산오가 세워 둔 거대한 벽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멀리 왔는데도 산오의 머리털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이연은 잠깐 멈춰 섰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끙, 하고 인상을 찌푸린 이연이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넓고 깊은 호수는 한쪽 시야에 얼핏 걸리는 벽이 아니었다면 어디가 어딘지도 정확히 분간이 불가능할 만큼 비슷비슷한 풍경이었다.

산오가 이곳을 지나간 건 확실했다. 확연한 전투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당장 이연의 앞에 박혀 있는 커다란 바위부터 그랬다. 손을 뻗어 누가 한 입 베어 먹은 듯한 암초에 손을 대자, 까끌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옆의 바위는 성게라도 된 것처럼 온통 가시가 튀어나와 삐죽삐죽했다. 산오의 능력 흔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해초가…….

‘응?’

이연이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유연하게 흔들리는 미역 같은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물살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그것은 제법 두꺼워서 이연의 팔뚝 정도 굵기쯤 되는 것 같았는데, 바위에서 튀어나온 가시에 걸려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게 더 널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전투에 휘말려 든 불쌍한 수생 식물인가, 싶었지만 곧 이연은 그 물체가 물결에 단순히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흐느적거리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파리나 말미잘 같은 자포동물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던 이연은 이내 이상한 점 하나를 더 발견했다.

물체의 끝부분이 부자연스럽게 잘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잡아 뜯은 것처럼.

쐐액!

그때였다. 무언가 날카로운 창 같은 것이 이연을 향해 쇄도했다. 삐빅! 고글에서 짧은 경고음이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공격 궤도를 알아챈 이연이 방패를 생성해 몸통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 냈다. 보글대는 기포가 비산했다. 둔중한 소리 대신 파동이 일고, 몸이 뒤로 조금 밀려 났다.

‘뭐지?’

하얀 모래를 불러 모아 방어 태세를 취한 이연이 저를 공격한 것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창이 아니라 줄 같은 형태였다. 느리게 흐느적거리는 까맣고 두꺼운 물체.

조금 전 가시에 찔려 있던 물체와 같은 것이 멀쩡한 형태로 이연의 앞에 있었다.

이연은 잠수부의 산소줄처럼 길게 이어진 줄의 끝을 찾기 위해 홀린 듯 시선을 내렸다. 그 아래를 보니 너무 커서 바닥처럼 느껴지는 바위가 있었다. 암석은 새까만 몸체 덕에 세세한 형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연이 빛을 몇 개 더 만들어 아래쪽을 비췄다. 그제야 바위의 표면을 잔뜩 뒤덮고 있는 무언가가 느리게 꿈지럭거리는 것이 보였다.

“…….”

아주 짧은 박자 안에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다음 순간, 거대한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조금 전과 똑같은 촉수가 무수히 튀어나왔다.

투창 같은 형태로 보일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촉수들은 언제 휘적댔냐는 듯 물살을 가르며 이연을 덮쳤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촉수 줄기가 아니라 그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연이 기겁하며 모래를 불러들였다. 쿵! 쿵! 쿵! 이연을 향해 쇄도하던 촉수가 하나씩 막힐 때마다 진동이 울렸다.

근거리에서 충돌한 탓에 충격파가 물을 타고 전해졌다. 지잉 울리며 온몸을 두드리는 파동에 하마터면 균형을 잃을 뻔한 이연이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사이에도 쉼 없이 달려드는 촉수들을 향해 거대한 파도를 쏴 보내자, 날카로운 물살에 크게 밀리며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러나 곧 새로운 촉수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이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운도 지지리 없지. 나오라는 제산오는 안 나오고 두무기가 먼저 나왔다.

이쪽도 최종적으로 만나긴 만나야 했지만, 두무기가 이쪽을 공격하는데도 산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영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연은 벌떼처럼 달려드는 촉수들을 상대하며 근방을 흘끗흘끗 살폈지만, 사람 인영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쉭! 잠깐 한눈파는 틈을 타 촉수 하나가 팔뚝을 스쳤다. 닿은 부분이 바로 화끈거리는 게 상처가 난 것 같았다. 이연은 다친 곳을 확인하기도 전에 연이어서 달려드는 촉수를 막아 내느라 바빴다.

애초에 이연의 능력은 무언가를 찢고 부수는 데에는 특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식의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물체가 강한 속력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런 것을 만들어 내는 것과 조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이연에게는 차라리 무언가를 가두거나 묶는 것이 훨씬 쉬웠다.

게다가 여긴 물속이었다. 느린 유속은 기껏 만들어 낸 공격 수단들도 위력을 절반 이하로 줄였다. 덕분에 촉수들은 성인 몸통만 한 나무도 단번에 자를 수 있는 공격을 받고도 제대로 잘리기는커녕 상처만 조금 입는 것이 다였다. 뭐, 이건 두무기 자체가 단단한 탓도 있겠지만……. 바위 가시에 박혀 있던 촉수가 왜 그렇게 우악스럽게 뜯겼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개중 다행으로, 방어에는 전혀 문제없었다. 달려드는 힘을 막아 내는 건 일정한 경도와 단단히 고정할 만한 지지대만 있다면 쉬웠다.

투웅. 막 이연의 다리를 꿰뚫으려던 촉수가 두터운 철제 벽에 막혔다. 제힘의 반작용에 그대로 맞은 촉수가 움츠러들었다. 원체 튼튼해서 그런가, 타격을 입었다는 것 자체에 위협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자리를 다른 촉수들이 채웠다. 걸신들린 것처럼 끊임없이 달려드는 촉수들은 걷어 내도 걷어 내도 끝이 없었다.

영원히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이연이 모래를 불러들였다.

물에 하얀 물감 한 방울을 떨어트린 것처럼 확 퍼진 새하얀 모래가 살아 있는 그물처럼 변했다. 가늘게 갈라진 모래의 끝이 두무기의 촉수들을 휘감았다.

하얀 그물은 실시간으로 늘어나며 이연에게 향하던 촉수를 촘촘히 엮었다. 촉수들은 분연히 꿈틀대며 그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으나, 그럴수록 그물은 조여들었다.

그렇게 촉수들을 묶어 버리자 그 안에 있던 두무기의 윤곽이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본체로 추정되는 두무기의 몸체는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얼핏 보기엔 생물체가 아니라 조그마한 언덕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처음에 쉽게 눈치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같은 2급인 뭉치의 본체를 상대할 때도 크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됐다. 적어도 뭉치는 한눈에 보이긴 했지 않은가.

‘어디 보자……. 저쪽이 머리겠네.’

이연이 덜커덕대는 촉수들을 조금 더 강하게 휘어잡으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아직 묶이지 않은 촉수들을 막아 내느라 자잘한 파동이 계속 일었다.

둥글고 길쭉한 몸의 끝에는 두 갈래로 갈라진 부분이 있었다. 몸통 전역에 돋아 있는 촉수도 머리 부분에는 없었다. 맨질해 보이는 머리 쪽에 빛을 비춰서 자세히 보니 양쪽 다 희미한 상흔이 있었다. 아마 산오의 짓일 터였다.

‘문제는 이 자식이 지금 어디 있느냐는 건데.’

제산오 성격에 촉수 찢고 머리 좀 치다가 갑자기 도망갔을 리는 없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영 이상했다.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연은 조금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촉수 하나에 우연히 시선이 닿았다.

두무기 몸통의 맨 아래 부분에 깔려 있는 촉수였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포박 중인 그물에 닿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이연이 손댄 적 없는 쪽이기도 했다.

애초에 공격 용도의 촉수가 아닌 것 같았다. 생긴 건 별다를 것 없는 그 촉수는 이연을 공격하는 데에 동참하는 대신 근처의 다른 촉수들과 함께 얌전히 땅 근처에서 너울대고 있었다.

그런데 해초처럼 유연하게 흔들리는 두터운 촉수의 겉면에 강하게 졸린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 자국을 본 순간 이연의 머릿속에 어떤 가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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