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저도 이게 모순적인 행동인 걸 알았다. 나가라고 한 지 하루도 안 되어서 헐레벌떡 임무지에 찾아가면 산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했다. 무슨 짓을 해도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
하지만 빈정거림이라도 듣는 게 나았다. 앞으로 영원히 아무런 말도 못 듣는 것보다는.
“저는 그냥 제산오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이연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이연이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거면 돼요. 상황이 괜찮으면 굳이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잘 있는지만 확인할게요.”
종희는 그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하얀 얼굴은 꿍꿍이를 감추기엔 다소 절박해 보였다. 이윽고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로서는 그분의 의중을 잘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감정적으로 변해도 산오 님은 할 수 없는 것을 하시겠다고 나서는 분이 아닙니다.”
제산오의 거만함은 제 실력에 대한 정확한 인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잡을 자신이 있으니 하러 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서들에게 산오가 죽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저도 그건 알아요.”
이연이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산오는 사납고 험악하긴 했지만 절대 멍청하지는 않았다. 두무기가 무슨 공격을 하든 쉽사리 당할 정도로 약하지도 않았고.
분명히 무사하지 않을 확률보다 무사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을 거다.
“아는데, 죽는 게 꼭 한순간에 찾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죽음은 아주 작은 계기에서부터 서서히 좀먹듯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건 경미한 부상일 수도, 미세한 실수일 수도 있었다. 사람의 일은 모르는 거였다.
산오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가만히 서서 결과가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건 끔찍했다.
종희가 그런 이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잠시의 침묵 후, 끊겼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 붙였다.
“산오 님은 바로 출발하셨고, 두무기 출현 장소에 도착하신 것은 다섯 시 정도입니다. 그 후로 바로 전투에 착수하셨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군요.”
종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이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통계적으로 2급 변이종을 처치하는 데 소요되는 시일은 평균 2주에서 3주 정도입니다. 두무기를 상대하신 지 고작 세 시간이 지났으니 걱정하기엔 이른 시간이긴 합니다. 산오 님도 2주까진 아니더라도 며칠은 걸릴 거라고 예상하셨을 테고요.”
거기까지 말한 종희가 쥐고 있던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다만 현재 상황이 조금 특수하다는 것이 걸립니다.”
“어떤 부분이요?”
“빠른 상황 파악을 위해서, 임무 중에는 산오 님께 붙어 있는 위치 추적기가 작동합니다.”
이연이 멈칫했다.
“제산오가 그런 것도 일일이 받아 줘요?”
“아뇨, 산오 님의 모든 바지 주머니에 미리 부착해 둡니다. 물론 평소에는 끄고요.”
“…….”
그건…… 불법 아닌가? 종희는 전방만 주시하며 운전하면서도 이연의 표정에 경멸이 깃든 것을 알았는지, 침착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산오 님도 아십니다. 묵인받은 상황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아, 예…….”
“그런데 김종찬에게 이 추적기의 동선이 이상한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뭐가요?”
“작동은 문제없이 되는데, 두어 시간 전부터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더군요.”
이연이 눈을 크게 떴다. 위치 추적기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러 가능성을 시사했다.
종찬은 일반인이니 이전에 산오의 활약상을 촬영할 때처럼 함께 있다고 해도 안전거리를 충분히 지킨 후 보고 있을 터였다. 산오가 까만 점으로라도 보이면 다행일 정도로 멀리.
산오가 혼자 싸우는 이유는 본인의 사회성 탓도 있지만, 규모가 큰 공격을 주로 쓰기 때문이었다. 옆에 괜히 누가 있으면 말려들기 딱 좋았기 때문에, 산오의 전투 범위에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만큼 강한 사람은 몇 없었다.
만약 그가 다쳐도, 다른 사람은 아주 나중에나 알 수 있다는 말이었다.
“많이 어둡긴 한데…… 혹시 소강상태일 수도 있을까요? 두무기가 밤에는 안 움직여요?”
“두무기가 빛의 영향을 받는다는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불안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비서들은 자세히 상황을 확인할 수 없으니 여러 가지 보험을 미리 마련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지원 가능한 헌터, 혹은 헌터 팀에게 연락하려던 것도 그 일환일 터였고.
이연이 창문 너머를 흘깃 살폈다. 차는 도시 외곽으로 빠지는 중이었기 때문에 보이는 건물은 거의 없이 사위가 칠흑처럼 어두웠다. 도로를 비추는 가로등만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차라리 산오가 어둠을 의식해 잠깐 물러선 거면 다행이었다. 전투 시 시야가 제한되는 상황은 아무래도 변이종보다는 인간에게 더 위험했으니까. 아무리 산오가 밤눈이 밝다고 해도, 보이는 걸 잡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걸 잡는 것의 난도는 천양지차였다. 심지어 오늘은 달과 별도 자취를 감춰 버렸을 정도로 날이 흐렸다.
“게다가 환경도 별로고요.”
“환경이요?”
차가 도로를 벗어나 샛길로 들어섰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지 않은 길은 관리되지 않아 울퉁불퉁한 데다가 주변에 높은 갈대가 솟아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연이 창문을 내리고 목을 빼 주변을 둘러보다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묘하게 차가운 공기와 높은 습도.
“종희 씨, 여기…….”
그리고 코에 닿는 물비린내.
“위험합니다. 거의 다 왔으니 창문을 올려 주십시오.”
종희가 시속을 서서히 늦췄다. 갈대밭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흐린 밤에 옅은 물안개까지 끼어 있어 이연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멀지 않은 곳에 손전등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종찬이었다.
“두무기의 별명은 물귀신입니다.”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푼 종희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이연이 그녀를 따라 차에서 내리자마자, 단순한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종희와 이연의 눈앞에는 새까만 물이 가득했다.
“호수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촉수에 닿는 모든 것을 입에 갖다 넣으니 조심하십시오.”
“수중…… 수중이라고요?”
이연이 멍하니 물었다. 두무기가 수중에서 활동하는 변이종이면, 전투 역시 수중에서 해야 했다.
위치 추적기로 파악한 산오의 위치가 내내 물 안이었다는 소리였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은 종희가 이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조수석 안쪽에 있는 글로브 박스를 눈짓했다.
“열어 보십시오.”
그 안에는 임무 개요서가 들어 있었다. 산오가 맡은 임무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적혀 있는 서류는 꽤 두꺼웠다. 훑어보니 종희가 말한 내용도 보였다. 자동차 실내등에 비추어 종이를 휙휙 넘기던 이연이 동작을 멈추었다. 두무기 발견 경위를 자세하게 기록한 부분이었다.
변이종 발견 경위를 기록할 때에는 신고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단서까지 보존하기 위해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최대한 적는 것이 규칙이었다. 긴급 임무도 예외는 아닌지 간결하고 명료한 표현을 주로 사용한 개요서 중에서도 경위 부분만은 수기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사건의 시작점은 변이종 추적 임무를 진행하던 무궁화 3단 헌터가 식사를 위해 동네에 잠깐 들렀다가, 늦은 밤에는 호수 근처로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거였다. 헌터는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 오랜 기간 동안 동네에 파다하게 퍼져 있던 ‘호수 괴물’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게 변이종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원래라면 날이 밝고 난 후에 자세히 살펴볼 계획이었지만, 우연히 그날 저녁 한 부부가 동네 여기저기를 수소문하며 제 아이를 찾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함께 도와주다 아이가 담력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호수를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헌터는 부모와 함께 바로 호수로 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호숫가에 있던 건 아이의 옷가지뿐이었다.
실신 직전의 부모를 간신히 달랜 헌터는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는 물에 떠밀려 꽤 먼 곳으로 가긴 했지만, 손전등을 쥔 손을 허우적대고 있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손전등이 너울대는 빛으로 위치를 찾은 헌터는 아이를 데리고 빠져나오다가 무심코 뒤를 바라보았고, 물속에서 기묘하게 울렁거리는 끈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한 정체는 몰랐지만 묘하게 불길한 움직임이었다. 다행히 거리가 꽤 멀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오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조금만 더 멀리 갔다면 저것에게 닿았을 것이다. 순간 소름이 돋은 헌터는 어서 아이를 데리고 뭍으로 나갔다. 아이는 엉엉 울며 부모의 품에 안겼다.
사정을 들어 보니 아이는 또래애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던 듯했다. 호수에 혼자 간 것도 동네 아이들의 대장격인 녀석이 이 담력 체험을 무사히 마치고 오면 함께 놀아 준다고 해서였다. 맞벌이인 부모는 아이가 오후에 혼자 있는 것이 걱정되어서 친구들이랑 좀 놀라고 잔소리를 했던 게 이렇게 돌아온 것 같다며 한참 자책했다. 헌터는 서로 자신의 탓이라며 우는 세 식구를 귀가시키고 일단 후퇴했다.
다음 날, 헌터는 호수에 들어가 어제 봤던 것을 먼 발치에서 다시 확인했다. 스치듯 얼핏 봤던 긴 끈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너울대고 있었다.
헌터의 초능력은 공기 압축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했다. 한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끈의 끝을 슬쩍 건드리자 공격당한 벌집의 벌처럼 다른 끈들이 저 아래의 깊은 곳에서 득달같이 모여들었다.
그 위압적인 광경을 보고서야 헌터는 이 호수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은 변이종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그길로 일시 귀환 해 초능력관리청에 해당 사건을 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