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아무렇지 않은 척 김 박사의 실험과 명령을 따르면서도, 사실은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석의 힘을 쓸 때마다 전신에 찾아오는 격통. 점점 까맣게 물드는 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무서웠다. 기록조차 제대로 남겨지지 않는 낯선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부스러지는 끝. 그건 허무에 대한 공포였다.
하지만 실험을 그만두고 돌아가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해서 제 발로 찾아온 곳이었다. 이제 와서 고작 무섭다고 발을 빼면, 무수한 시간 속에서 키웠던 영의 바람은? 고통은? 분노는?
대체 누가 그걸 알아주지?
……누가 나를 신경 쓰기나 할까?
“나는 겁이 많아.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실제로는 망설이느라 엄청나게 시간을 낭비해. 행동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던 적이 거의 없었거든.”
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네가 뒤에서 밀면 정말로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그녀가 망설일 때에 서슴없이 괜찮다고 해 주는 멍청한 인간. 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태평하고 긍정적인 소리만 늘어놓는 말간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믿어 보고 싶어졌다. 공장을 벗어나려고 했을 때에도, 오늘도.
“네가 용기를 내도 괜찮다고 외치는 것 같았어.”
영은 이연을 흘끔 바라보았다. 태평한 얼굴은 놀랐는지 평소보다 조금 더 맹해 보였다.
“네 덕분이야.”
“…….”
“네 말을 들으니까 네가 사는 것처럼 살아 보고 싶어졌다.”
입꼬리를 올려 웃은 영이 이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연은 멍하니 영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연은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자신 덕분에 용기를 냈다는 영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어둠이 드리워지는 거리에서 후련하게 웃는 영의 얼굴만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이 정말…….
“정이연 씨, 지금 바람피우시는 겁니까?”
“허억!”
갑자기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어깨를 콱 잡았다. 놀란 이연이 퍼드득 몸부림쳤다.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니 시커먼 양복이 보였다.
“아는 사람이야?”
“아, 네. 그렇긴 한데 여긴 어떻게…….”
영은 알고 있었던 건지, 원래 겁이 없는 건지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무덤덤한 영의 물음에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연이 아직도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거리에 신기루처럼 종희가 서 있는 모습은 기겁하기 충분했다.
그런 이연과 영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종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언제나 그랬듯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예에…….”
“휴대폰을 잃어버리신 줄 알았는데, 진동이 멀쩡히 울리는군요.”
“헉.”
이연이 그제야 주머니 속에서 새로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망했다. 피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이연은 머쓱하게 종희를 바라보았지만, 종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새초롬한 것이 아주 태연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야기 좀 하시죠.”
영과 어영부영 헤어진 이연이 종희를 쭐레쭐레 따라간 곳은 커다란 카페였다. 음료를 시키고 진동벨을 받아 드는 내내 근엄한 얼굴을 유지하던 종희는 이연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부당 해고는 어느 정도의 처벌이 내려지는지 아십니까?”
“…….”
어디서 들은 말이다. 이렇게 걸고넘어질 줄 알았으면 제산오가 필요 없다고 하든 말든 억지로 사인을 시킬 걸 그랬다. 이연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종희가 실내에서도 꿋꿋하게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접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서늘한 인상의 긴 눈매가 이연을 탐색하듯 훑었다.
“정말로 바람 때문입니까?”
“아니, 무슨, 바람이에요?”
“아까 그 여성분께 마음이 가신 겁니까? 그래서 저희 산오 님을 버리신 거고요?”
“아, 아니. 버리다니. 표현을 왜 그렇게 해요?”
이연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종희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평범한 사랑싸움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나신 거라니, 충격적입니다. 저희 산오 님이 대체 어디가 부족한 겁니까? 양심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산오 님이 압승인데요.”
왜 이런 공개 연애 청문회 같은 분위기가 된 거지?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도 없었다.
“그거 물어보려고 오신 거예요?”
몇 분 만에 부쩍 지친 이연이 등받이에 상체를 파묻었다. 음울한 목소리에 종희가 한결 차분해진 안색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정이연 씨. 그래도 저는 정이연 씨와 저희가 꽤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럼 산오 님을 왜 해고했는지 여쭤봐도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런 화제일 줄은 예상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난감하긴 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싫어서 종찬과 종희의 전화를 죽어라 무시하던 거였으니까. 제산오 녀석, 입도 싸다. 그걸 그새 종희 씨한테 홀랑 말해 버리다니. 이연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방어하듯 대꾸했다.
“해고한 게 아니라 그냥 놔준 건데요. 걔 바쁘잖아요.”
“산오 님이 화가 많이 나셨던데요.”
“걘 원래 화가 많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산뜻한 긍정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이연이 입을 다문 사이, 종희는 평연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람을 피우든, 양다리를 걸치든, 부당 해고를 하든, 집에서 쫓아내든 정이연 씨의 자유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산오 님의 의사를 못 본 척하지는 마십시오.”
“…….”
“산오 님은 인형이나 로봇이 아닙니다. 혹시나 싶어서 상기시켜 드리는 겁니다.”
이연은 잠깐의 텀을 둔 후에야 슬그머니 물었다.
“……걔 많이 화났어요?”
“제가 본 것 중에는 손에 꼽힙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연이 시무룩하게 제 컵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까지 화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던 증인 건에 대해서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희의 말에 이연이 반색했다. 안 그래도 언제 한번 물어보려고 했다. 태진의 재판에 증언을 해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은 흔쾌히 수락했지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종희는 뜻밖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네? 하지만 전에는…….”
이연은 태진의 범죄 행위에 가장 깊게 연루된 피해자이자 목격자 중 하나다. 그의 증언은 비유하자면 조커였다. 쓸 수 있는데도 쓰지 않는 건 쉬운 길을 돌아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산오 님께서 강경하게 거부하셔서요.”
“아.”
탄식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종희는 강경한 거부라는 고상한 표현을 썼지만, 대충 어떤 느낌으로 거절했을지는 예상이 갔다. ……그래도 증언하면 자기한테 좋은 거 아닌가. 그냥 엮이기도 싫은 건가. 일방적으로 쫓아냈으니 꼴 보기도 싫어졌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우울해졌다. 그런 이연을 위로하듯 종희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준비된 자료로도 이태진을 잡아 처넣는 데에는 문제없습니다.”
“네…….”
그때였다. 종희의 안주머니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단조로운 멜로디에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종희가 이연을 향해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통화 상대가 말하는 내용은 이연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긴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는 전달되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종희의 안색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언제 들어가셨지?”
……들어가? 어딜?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한 이연이 종희를 흘끔댔다.
“확실히 이상하긴 해. 평소답지 않으시군. 환경이 별로니 만전을 기하는 게 낫겠어. ……아니, 웬만한 지원은 방해야. 고위급으로 선별해서 따로 연락 돌려.”
종희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급기야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이연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이럴 게 아니라 나도 갈게. 여기서 한…… 한 시간 정도 걸려. 그전까지 주시하고 있어.”
탁. 종희는 전화를 끊고서도 휴대폰을 놓지 않고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 막 다시 어딘가로 통화하려는 순간, 이연이 물었다.
“제산오예요?”
그제야 종희는 이연을 돌아보았다. 늘 침착하던 얼굴에 어린 약간의 초조함을 알아챈 이연이 재차 물었다.
“제산오 일이냐고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정이연 씨,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종희는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이연은 확신했다. 종희가 이렇게까지 주의를 살피며 신경 쓰는 인물, 행동까지 높여 말할 인물이라고 하면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게다가 통화의 내용. 절대로 긍정적인 상황을 말하는 대화는 아니었다.
“지원 필요하면 절 데려가요.”
“정이연 씨.”
“제산오한테 저에 대해 어디까지 들었어요?”
이연이 조용히 종희의 눈을 직시했다. 종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산오 님은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진 않으시죠?”
“…….”
“저를 데려가요. 아마 지금 연락을 돌리려는 누구보다 도움이 될 거예요.”
이연이 일어섰다. 두근, 두근. 점점 빨라지는 맥박을 무시하려 애쓰며, 이연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걔 지금 어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