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86)화 (186/250)

#186

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싫다기보다는 정말로 해도 되는 건지 헷갈려하는 기색이었다. 온갖 폐를 끼친 그녀에게 주어지기엔 너무나 자비로운 조건이었다. 현실이라는 실감도 안 날 정도로.

“할래.”

그녀 대신 대답한 것은 재이였다. 소녀는 조금 민망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D.S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합니다.”

“너는? 설마 따로 움직일 거야?”

D.S가 영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잘 부탁, 합니다.”

끝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에 D.S가 피식 웃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뭐야? 뭘 부탁하는 건데?”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을 이리저리 번갈아 살펴보던 미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자, D.S가 장난스럽게 새로운 식구를 소개해 주었다.

“오늘부터 같이 살 언니들이야. 우리 집은 넓으니까, 괜찮지?”

“와! 언니들 미래랑 같이 살아? 집에서도 썰매 태워 줄 거야?”

“썰매는 밖에서 타. 언니들 말 잘 듣고.”

“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들을 바라보던 이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잘됐다.

D.S는 결정되었으면 빨리 모텔에서 짐 가지고 오라고 사람들을 쫓아냈다. 주섬주섬 공방을 나서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연이 중얼거렸다.

“D.S 씨, 되게…… 어른 같네요.”

“그걸 이제 알았냐?”

피식 웃은 D.S가 거만한 눈으로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너랑 나랑 열 살 차이야. 경험치가 달라, 인마.”

“저도 10년 후에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장난해? 10년이면 강산이 바뀌는데, 이것보다 나아야지.”

“야.”

툭 끼어든 다른 목소리에 농담하듯 투닥거리던 D.S와 이연의 대화가 끊겼다. 이연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정헌이 서 있었다.

“아직 안 갔어요?”

“할 얘기 생각나서.”

“잘됐네. 너도 빨리 꺼져. 나 일 좀 하게.”

D.S가 이때다 싶었는지 파리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만하면 오래 버티긴 했다. 이연은 망설임없이 쫓아내는 손짓에 입을 삐죽이면서도 순순히 정헌을 따라 일어섰다. 미래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헌은 공방을 나온 후에야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너한테 사과할 거 있어.”

“예? 뭐가요?”

“네 인상착의, 아마 나한테서 새어 나갔을 거야. 능력에 대해서는 말 안 했으니까 그 부분은 신경 안 써도 돼. 헌터 모임에서 아는 이름이 나와서 얼결에 반응해 가지고……. 초관청에서 곤욕 치렀단 이야긴 들었어. 미안.”

“아아…….”

이쪽이었군. 정헌은 헌터들 사이에서 발이 아주 넓고 인망 역시 제법 두터운 것 같으니 그가 말한 정보는 금세 온 도시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한철 소문인걸요.”

“희망에 찬물 끼얹어서 미안한데, 제산오가 붙어 있는 이상 그렇게는 힘들걸. 이미 너흰 세트 메뉴야. 너랑 나랑도 초전력에서 잠깐 만난 게 다라고 몇 번을 말해도 걔네들 머릿속에서 우린 절친이 됐다고. 말 나온 김에 일러 두는데, 앞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면 나한테 말 안 걸어도 돼. 나도 모른 척해 줄게.”

“또 절친 될까 봐요?”

“뭐? 난 상관없어. 너 불편하지 말라고 하는 거잖아.”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나오는 대답을 들으니 이 사람이 왜 그렇게 친구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이연이 빙긋 웃었다.

“진짜 괜찮아요.”

“그래?”

“이제 제산오랑은 일 같이 안 하거든요.”

“……내가 지금 눈치 없이 말한 건가?”

떨떠름한 정헌의 물음은 솔직한 만큼 어딘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이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좀 없긴 했지만 어쩔 수 없죠. 신경 쓰지 마세요.”

“야, 그냥 사과하라고 해. 미안하다.”

“농담이에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하자 정헌은 몰랐다며 가볍게 툴툴댔다.

“유정헌 씨는 이제 회사로 가요?”

“어. 누구 때문에 요즘 휴가를 밥 먹듯이 써서 동료들이 퇴사각 잡고 있는 거 아니냐고 자꾸 의심해.”

“회사원이란 힘들구나.”

“넌 회사원 아닌 것처럼 말한다?”

“전 사장이잖아요.”

“……부럽다.”

진심이 담겨 있는 대답에 이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정이연.”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영이었다. 아까 공방을 나서는 기세로 보면 누구보다 빨리 가 버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영과 재이 모두 남아 있었다. 재이의 순간 이동 능력을 사용하면 금세 갈 수 있었을 테니 그를 일부러 기다린 것일 터였다.

“어, 왜요?”

“그게…….”

영이 쉽게 말을 꺼내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재이가 정헌의 옷깃을 덥석 붙들었다.

“아저씨는 나 좀 도와줘.”

“아저씨이? 나 쟤랑 동갑이거든?”

정헌이 억울한 얼굴로 영을 가리켰으나 재이는 무시했다.

“짐 많아서 나 혼자선 못 들어. 도와줘.”

로봇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모습은 영과 이연에게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요즘 어째 계속 뒤치다꺼리 생활이다. 정헌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래, 가자.”

정헌이 손을 내밀자 재이가 덥석 붙들었다. 곧 두 사람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거리가 한적해졌다. 이연이 영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럼 우린 좀 걸을까요?”

슬슬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은 희미하게 붉은빛이 돌았다. 이연은 푸르스름한 풍경을 한참 보다가 불쑥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영의 몸 안에 들어간 보석은 빼지 않은 상태였다. 함부로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가 억지로 융합시킨 몸에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 느낌 없어. 그 이후로 쓴 적도 없고.”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쓰지 말아요. 정말로 위험하다고요.”

이연이 엄한 부모님처럼 잔소리했다. 자신의 것보다 강한 초능력을 억지로 땡겨 쓰고도 영이 기력 기진으로 쓰러지지 않은 것은 아마 태진처럼 기력 파장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심지어 태진처럼 기계로 보조한 것도 아닌데 그 정도 부작용이면 말 그대로 천운이었다.

“지금 영 씨 실력으로도 승단 심사 받기엔 충분할걸요. 저번에 초전력 했을 때도 제안받지 않았어요?”

“모르겠어. 초전력 끝나고 바로 공장 쪽에서 연락이 와서.”

영은 그렇게 대답하고 잠깐 조용해졌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본론인 모양이었다.

“네가 나보고, 약하지 않다고 했잖아.”

“그랬죠.”

“진심이었어?”

이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봉 하나로 헌터들 후두려 패고 다닌 걸 제가 옆에서 다 봤거든요. 보통 사람은 그렇게 못 해요.”

“그럼 잘할 수 있다는 말도 진심이야?”

영이 고개를 돌려 이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어딘지 절박한 빛을 띠고 있어서, 이연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멈칫했다.

“그때 날 멈추고 싶어서 그냥 한 말이 아니고, 진심이야?”

영의 인생은 수많은 평가투성이였다. 아버지의 칭찬, 기대, 초능력 심사, 김 박사의 실험. 영이 자신에 대해 세운 기준은 번번이 부정당했다. 그녀는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당연하죠.”

그래서 낯설었다. 자기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가치를 망설임 없이 긍정하는 말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두려웠다. 또 그 말이 틀릴까 봐.

“있잖아요, 영 씨. 헌터가 되는 건 끝이 아니라 출발선이에요.”

영은 조용히 흘러나오는 이연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조금 쌀쌀해진 공기가 귓가를 쏴아, 하고 쓸고 지나갔다.

“영 씨가 어떤 헌터가 될지는 저도 몰라요. 그건 영 씨가 어떤 임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겠죠. 그래도 하다 보면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고, 경험도 쌓일 거예요. 그걸 차곡차곡 모아서 나중에 모아 보았을 때.”

“…….”

“그때 잘했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면 돼요.”

이연이 빙긋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죠? 혹시 잠깐 잘못해도, 되돌릴 시간은 충분해요. 그냥 나아가세요.”

“……그게 다야?”

“네에, 이게 인생입니다. 그냥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믿고 살아야죠, 별수 있나요.”

가볍게 대꾸한 이연이 영의 팔을 장난치는 것처럼 툭툭 쳤다. 영은 허탈하다는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그리고 죽을 짓 하지 말고?”

“잘 아시네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허튼짓하면 또 찾아갈 테니까 하지 마세요. 영 씨한테 박혀 있는 보석도 제가 계속 볼 거거든요?”

“고마워.”

“네?”

불쑥 튀어나온 인사에 줄줄 잔소리를 내뱉던 이연이 멈칫했다. 영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말대로, 계속 거기에 있었다면 아마 정말로 그러다 죽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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