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건 네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잖아.’
‘아버지도 그러셨다. 강해진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았지.’
‘…….’
‘내가 잘한 짓을 한 게 아니니 그녀가 화를 낼 건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두렵다.’
그렇게 말하는 이를 억지로 끌고 갈 정도로 정헌은 모질지 못했다. 한숨을 푹 내쉰 정헌이 허리를 폈다.
‘알았어. 천천히 해 보자고.’
‘고맙다.’
‘됐어. 인재 영입 개힘드네, 진짜.’
투덜거린 정헌이 영과 소녀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여느 때처럼 영과 D.S를 만나게 하는 데에 실패하고 공방을 나오던 정헌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의 손에 수건이 한 장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또 뭐야?’
하얀 수건은 떨어트리기라도 했는지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 대신 영이 대답했다.
‘집 창문이 열려 있길래, 닫아 주려고 했는데 그 아래에서 찾았다. 아마도 바람에 날려 밖으로 떨어진 것 같더군.’
‘아니, 그걸 왜 들고 오는데? 창문 닫는 김에 넣어 주고 와야지.’
‘흙바닥에 뒹굴어 더러워졌으니, 빨아다가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도둑질 아냐?’
‘금방 빨아서 돌려줄 거다.’
그렇게 말한 영은 정말로 다음 날 바로 깨끗해진 수건을 가져왔다. 그전의 수건도 흙이 묻은 걸 제외하면 그리 더럽지는 않았지만, 영이 가져온 것은 새 수건으로 착각할 정도로 뽀송했다. 정헌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런 데에 재능이 있네.’
‘재이가 했어.’
영의 말에 소녀가 새초롬하게 시선을 피했다. 말이 하도 없어서 아직까지 대화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제법 손끝이 야무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정헌이 D.S의 공방에 들어가 있는 사이 수건을 돌려주고 오겠다고 했다. 이제 같이 들어갈 생각은 아예 없는 거지? 정헌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협조했다.
그런데 공방을 나와서 보니 두 사람의 손에는 더 많은 빨랫감이 들려 있었다.
‘……뭐냐?’
‘재이가 더 깨끗하게 만들 수 있대서.’
‘…….’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정헌은 두 사람의 우렁 각시 짓에 동참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빨랫감 정도로 만족하던 둘은 어느 순간부터 D.S의 집 자체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제집이 변화하는 것을 눈치챈 D.S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날에는 시무룩한 얼굴로 옆집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 진짜 가지가지 하네. 알았어, 알았다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바닥만 바라보는 영과 소녀를 보다 못한 정헌이 짜증을 내며 협조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마침 집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딱 10개. 정헌의 손가락 개수와 일치했다.
천만다행인 점은, 제집에 누군가가 드나든다는 상황을 눈치챘음에도 D.S에게 범인을 잡을 의지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정체 모를 청소 요정들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선에서 그쳤다. 만일 D.S가 경찰에 신고하거나, 사제 전투 로봇을 배치하기만 했어도 세 사람의 행위는 금세 저지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얼결에 여기까지 하게 된 거야.”
“놀고 있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이 다 강하게 처신하지 않은 제 탓이라고?”
D.S가 심드렁한 얼굴로 비난했다. 정헌이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건 아니죠. 그냥…… 죄송합니다.”
정헌이 먼저 사과하자, 영과 소녀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이연이 투덜거렸다.
“뭐야, 진짜 요정인 줄 알았는데.”
“퍽이나 진짜 요정이겠다. 그런 게 어딨어?”
“와, D.S 씨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내가 언제.”
D.S가 한심하다는 듯 이연을 흘겨보고는 영과 재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에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가만 보니까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아주 어른을 갖고 놀려고 드네.”
“아니, 그럴 의도까지는.”
정헌이 당황하며 입을 여는 것을 가볍게 무시한 D.S가 말을 이었다.
“그만 질질 끌고, 이만큼 판을 깔아 줬으면 그냥 해.”
영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주 긴 침묵이 흘렀다. 바닥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아래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를 이연이 슬그머니 토닥였다. 타인의 손길을 느낀 영이 이연을 돌아보았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를 잠깐 동안 본 영은 드디어 조그만 목소리를 냈다.
“봉변이었다는 거 알아. 용서를 바랄 생각은 없다.”
머뭇대며 흘러나온 말은 이어질수록 점점 더 분명한 형태를 갖춰 갔다. 영이 조금 긴장한 얼굴을 들고 D.S를 마주했다.
“사과는 하고 싶은데, 용기는 없어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 ……미안해.”
D.S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해애?”
“……미안합니다.”
“그래.”
산뜻한 대답에 이연과 영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의 얼굴도 불쑥 들렸다. D.S는 아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뭘 봐? 알겠다고.”
“아니……. 이게 끝인가?”
“범인 알았고, 사과받았고, 배상은 정이연이 다 했고. 그럼 뭘 더 해?”
“그……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
D.S가 피식 웃었다.
“늦은 주제에 어디서 토를 달아? 그 화는 애저녁에 다 냈어. 넌 한참 늦었다고.”
“…….”
“그것보다는, 내 집에 지속적으로 무단 침입 한 게 더 큰 죄 아닌가?”
영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D.S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사과만으로는 안 되겠는데.”
“물론, 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보상을…….”
다급하게 대답하는 영의 말을 D.S가 가차 없이 끊었다.
“너 지금 어디서 사냐?”
“그냥, 여기저기 모텔에서.”
그 대답에 오히려 정헌과 이연이 놀란 얼굴로 연달아 물었다.
“뭐? 너 집에서 다니는 게 아니었어?”
“엥? 영 씨 아버지랑 같이 산다면서요.”
영이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재이도 함께 있어야 하고, ……아버지 얼굴을 보기도 어려워서. 그냥 안 들어갔어.”
“마땅한 거처가 없다는 말이군.”
D.S가 흠,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는 이내 정리를 마쳤는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
뒤이어 경쾌한 제안이 건네졌다.
“숙식 가사 도우미라고 들어 봤냐?”
나머지 네 사람의 얼굴이 물음표로 뒤덮였다. 가만 보니 D.S의 눈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뭐, 특별히 더 할 건 없고 하던 일 그냥 공개적으로 하라는 얘기야.”
이 사람…… 똑똑한데? 아예 합법적으로 고용을 하시겠다? 이연이 그녀의 계략에 감탄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
반발한 것은 정헌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려 가던 그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쪽은 이미 취업 방향이 다 정해져 있다고, 요. 갑자기 웬 가사 도우미입니까?”
“댁이 무슨 상관입니까?”
D.S는 고객이랍시고 정헌에게 존댓말을 쓰긴 했지만, 말투는 이연에게 하는 것과 비슷했다. 정헌이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이제까지 이야기했잖아요. 얘네 둘은 사회봉사 끝나면 우리 회사에 취직하기로 했다니까요.”
D.S는 별 고민을 하지도 않고 툭 내뱉었다. 놀란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는 영과 소녀를 향한 말이었다.
“그럼 겸업해.”
“예?”
“가사 도우미 일은 사과의 일환이잖아. 뭐, 난 준법 시민이니까 계약서도 성실하게 쓰고 보수도 주긴 할 거야. 일단 6개월 계약하고, 갱신하는 식으로 하자. 방도 한 사람당 하나씩 내어 주지. 욕실은 같이 써야겠지만, 그 정도는 그냥 감수해. 이래 봬도 애 있는 집이니까 밥은 영양식으로 잘 내줄 거야. 만약 외식하면 너네도 같이 갈 거고.”
거침없이 줄줄 나오는 이야기는 뭐라 반박할 틈도 없었다. 네 사람이 홀린 듯 경청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D.S는 끊임없이 말을 쏟아 냈다.
“그리고 가끔 애도…….”
“어?”
한참 이어지는 고용 환경 설명을 끊은 것은 명랑한 아이의 목소리였다. 공방 출입구에 선 미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이 앉은 소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D.S가 마주 흔들어 주며 중얼거렸다.
“그래, 쟤 말이야.”
미래는 곧장 달려왔다. 반가운 얼굴로 방실방실 웃은 방향은 D.S도, 이연도 아닌 영과 재이 쪽이었다.
“언니들 안녕! 오늘은 왜 여기 있어? 여기 못 들어온다며!”
“……아는 사이 냐?”
D.S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영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변명했다.
“그냥…… 어린애 혼자 다니기엔 위험할 것 같아서 몇 번 데려다줬다.”
“오늘 오는 길엔 썰매 태워 주기로 했잖아! 미래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추워하면 오래 안 태워 주니까 따뜻한 옷도 입었는데!”
“……그런 거였군.”
얼음 능력자인 영과 함께 있으려면 지금 계절에 맞춘 옷은 추웠을 것이다. 조잘대는 미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준 D.S가 영과 재이를 바라보았다.
“어쩔래?”
영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난 당신의 공방을 부쉈던 사람이다.”
“지금 내 기억력 테스트 하는 거야? 국가 엔지니어 교육원 성적 커트라인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걸.”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릴 어떻게 믿고…….”
“너 엔지니어에 대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D.S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음산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너희가 우리 집에서 사고 치고 도망가면 추적하는 거 일도 아니야. 궁금하면 한번 해 보든지.”
“…….”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