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
“…….”
“…….”
서먹한 분위기 속에 일단 대화를 위해 둘러앉은 테이블에는 침묵만 흘렀다. D.S와 이연, 정헌, 영과 마지막으로 봤을 때 영이 챙겼던 작은 소녀까지.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었는데도 숨소리 외에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넋 나간 얼굴로 허공을 한참 응시하던 이연이 고개를 돌려 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묘하게 멋쩍어하는 듯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넌 정말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멍청한 헌터야.’
‘칭찬 고마워요.’
분명히 이때만 해도 훈훈하지 않았는가. 마무리도 좋았잖아. 희망찬 새 미래를 걸어갈 것처럼 말했잖아! 이연이 크게 속은 기분에 머리털을 쥐어뜯자, D.S가 혀를 끌끌 차며 그의 앞에 물 한 잔을 밀어 주었다. 물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믿고 싶지 않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이연이 침통하게 서두를 열었다.
“새 직업을 스토커로 정한 건가요?”
“…….”
“…….”
정헌과 영이 동시에 이연을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 되냐는 눈빛이 역력했다. 아니, 왜 나한테 그래? 자기들이 스토커짓 하다 걸려 놓고! 이연이 눈을 부릅뜨고 힘을 주자, D.S의 태평한 목소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난 너도 수상한데.”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연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D.S를 바라보았다. 사람 얼굴에 충격이 어리든 말든 D.S가 시큰둥하게 사실을 지적했다.
“내 집에 들어오던 침입자들이랑 다 알고 있는 사이면 아무래도 수상해 보이지. 한패일 수도 있잖아.”
“아니……. 절 이런 변태들이랑 엮지 말아요!”
이연이 버럭 소리쳤다. 그 뒤를 개구리똥처럼 두 명의 반박이 뒤따랐다.
“변태 아니라고.”
“변태 아니야.”
“…….”
작은 소녀만 묵묵하게 물 잔을 홀짝거렸다. 이쪽은 이전에도 목소리 한 번 들어 본 적 없으니 익숙했다.
“그럼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요?”
투덜대는 듯한 물음에 영과 정헌은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현란한 눈짓 끝에 진 건 영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이연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네가 사과하라며.”
“저기, 사과랑 스토킹이 같은 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죠?”
“알아.”
억울했는지 영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나도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이렇게 된 거였어.”
“본능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요?”
“야, 딴지 그만 걸고 우리 얘기 좀 들어.”
보다 못한 정헌이 주둥이를 막고서야 이연은 얌전해졌다. 한숨을 크게 쉬고는 이야기를 시작한 정헌의 이야기는 다행스럽게 영보다는 훨씬 조리 있었다.
초능력 공장에서 이연이 김 박사를 찾기 위해 먼저 나선 후, 남겨진 세 사람 사이에는 머쓱한 정적이 흘렀다.
‘남는 시간 동안 뭐 하게?’
침묵을 깬 것은 정헌이었다. 이연은 30분 후에 신고할 것을 부탁했다. 그동안 무엇을 할 거냐는 의미였다.
여상한 물음에 영은 잠시 대답할지 말지 고민했다. 정헌은 외부인이고, 사실 여기 있을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같이 있을 게 아니라, 신고하기 전에 내보내는 게 나았다.
그런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정헌이 다시 물었다.
‘너, 불법 연구소 신고해 본 적 있어?’
정헌은 젊은 편이었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이 그렇듯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해 올해로 6년 차였다. 게다가 능력이 잠입에 굉장히 유용했기 때문에, 불법 연구소 소탕 같은 건에 종종 투입된 경험도 있었고.
‘설마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정확히 그렇게 생각한 영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정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건 일반 경찰 소관이 아니야. 전담 수사대가 있는데, 헌터 회사에만 직통 연락처가 공유되거든. 경찰에 신고하면 수사대가 전달받고 출동하기까지 너무 느려서 도망갈 사람은 다 도망가고 말걸.’
‘그럼 네가 해.’
‘나? 난 여기 없는 걸로 해 줘. 회사가 알면 귀찮아져.’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무뚝뚝한 물음에 정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넌 헌터 일을 하지 않는 애송이니까 경찰에 신고하는 게 의심을 받지 않겠지.’
이 건방진 놈을 한 대 쳐도 되나? 영이 그런 생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도 모르고, 정헌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사람을 모으자.’
‘왜?’
‘왜냐니.’
정헌이 악랄하게 웃었다.
‘모아 놓고 신고하면 아무도 도망 못 가잖아.’
부지 곳곳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건 쉬웠다. 짧은 기간이라고 해도 영은 이 공장의 헤드인 김 박사의 측근이었다.
김 박사는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그건 이연의 몫이었으니까.
‘그 보석을 박은 사람들은 많아?’
‘지금 남아 있는 건 세 명 정도. 부작용이 심한 탓에 못 견뎌서 나가떨어진 사람이 많아. 그나마도 모두 2단 수준이고.’
‘다행이네. 그 정도면 우리끼리도 제압할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인 정헌이 하나둘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넓은 부지에 비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헌이 전에 탐색했을 때에도 안 쓰는 컨테이너가 많았으니 얼추 예상이 가는 규모긴 했다.
‘다 온 거야?’
‘아니, 몇 명은 안 왔어. 아마 계속 안 올 것 같은데.’
영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정헌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누군가 친절하게 이유를 알려 주었다.
‘실험체 주제에 건방지게 사람을 오라 가라 한 이유가 뭐야? 김 박사님이 일을 시킨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영에게 거만하게 물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걸 보니 연구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명백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굳이 실험체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그들 사이에 갑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문제였군. 정헌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전에, 영이 입을 열었다.
‘너흴 신고하려고.’
‘뭐?’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발밑에 빙판이 깔렸다. 마찰력이 극도로 낮아진 바닥에 몇몇 사람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뭐, 뭐야!’
‘서영! 네가 어떻게!’
한편이라고 여겨 방심한 상태로 온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비명을 부르짖었다. 한 발자국만 내딛어도 금세 미끄러지니 옴짝달싹 못 하는 채였다. 그 와중에 포기하지 않고 도망을 시도하는 자들은 소녀가 순간 이동으로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영은 그들의 항의를 모조리 무시하며 정헌에게 눈짓했다.
‘초능력자는 안 봐도 알겠지?’
정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의 연구원들은 죄다 연구원이라는 것을 티 내는 것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으니까.
대인전인 초전력 강자, 정헌을 얼마 전까지 1단이던 초능력자들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장의 내부 인원들은 순식간에 소탕되었다.
‘안 온 사람들은 직접 잡아 오겠다.’
봉을 꺼내 한번 턴 영이 소녀에게 눈짓했다. 그녀들이라면 누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고 있으니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정헌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그러고 나면 딱 시간이 맞겠어.’
그러나 결론적으로, 영은 나머지 사람들을 잡아 오지 못했다.
막 순간 이동으로 움직이려는 찰나에 바깥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린 탓이었다.
쾅! 쿠르르릉……. 땅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부지 전체를 뒤흔들었다. 심상치 않은 폭발음에 세 사람이 동시에 흠칫하며 컨테이너 입구를 바라보았다. 갇힌 사람들 역시 놀란 얼굴로 웅성였다.
‘뭐지?’
정헌과 영은 소녀를 컨테이너 안에 감시조로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다. 저 멀리 부지 출입구와 가까운 컨테이너가 흙구름을 만들며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아니, 걔는 박사 하나 잡으려고 뭐 저렇게 요란하게…… 괜찮은 건가?’
웅장하게까지 보이는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던 정헌이 중얼거렸다. 이연이 본능력을 쓰는 것을 봤으니 걱정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이 고개를 저었다.
‘정이연이 아니야. 저긴 김 박사님이 있는 곳과 정반대편이다.’
‘뭐? 그럼…….’
‘여기에 폭파 시스템은 없으니, 다른 자가 또 침입한 것 같은데. ……상급 헌터인 것 같군. 회사 단위인가.’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무너진 컨테이너 근처에 있던 컨테이너들이 순차적으로 반파되었다. 줄줄이 들려오는 폭발음을 듣다 보니 그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 포획인지 구조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일단은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거 아냐? 신고고 뭐고 그냥 죽을 수도 있겠는데.’
정헌이 폭발 현장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컨테이너를 향한 공격 방향은 명백히 심층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핏 눈대중으로 짐작하기엔, 이 과격한 침입자의 동선에 그들이 있는 컨테이너가 확실히 속해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놔두고 도망갈 수는 없어.’
영이 고지식하게 대꾸했다. 이연과 약속한 30분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
‘아니, 도망가자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다가, 정헌은 문득 연달아 들리던 폭음이 뚝 끊긴 것을 깨달았다. 기이할 정도의 고요가 찾아온 것도 잠시, 전혀 다른 쪽에서 콰르르, 하는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컨테이너를 겹쳐 쌓아 놓은, 부지에서 가장 높게 보이는 구조물.
……이었던 것이, 막 쓰러지고 있었다.
‘저긴…… 그 박사님이라는 게 있을 것같이 생겼는데.’
얼빠진 정헌의 중얼거림에 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으로 말해 주는 완벽한 긍정이었다.
그 이후로는 한동안 정적이었다. 그들이 있던 쪽으로 다가오던 폭발음도, 반대편에서 무너지던 커다란 구조물에서도 멈춰 버린 채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황당하다는 중얼거림을 배경음 삼으며, 영이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30분이었다. 그녀가 막 휴대폰을 꺼내 드는데, 정헌이 팔을 툭툭 쳤다. 고개를 드니 저쪽에서 까만 인영들이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