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집 안 풍경은 아까 그대로였다. ……착각인가? 이연은 고개를 잠깐 갸웃했으나, 어서 오라는 D.S의 독촉에 후다닥 몸을 돌려 현관을 나왔다.
D.S가 보여 준 영상은 그녀의 설명대로였다. 평범하게 화면이 출력되다가, 어느 순간 불이 꺼지는 것처럼 새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아까와 똑같은 화면이 출력되었다.
“진짜네요…….”
“진짜라니까.”
이연은 모니터를 뚫어 버릴 것처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까매진 화면 너머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 후 미래가 집 안에 들어오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것을 보니 녹화 영상을 대신 틀어 두었다거나 하는 해킹도 아닌 것 같았다.
“카메라가 한두 개도 아닌데, 이렇게 동시에 가려진다는 게 말이 되나?”
이연이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여러모로 기이한 현상이었으나, 역시 조직적인 해킹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문제는 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D.S의 집을 노렸냐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한번 화면을 훑었을 때였다. 까맣던 화면이 막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장면의 찰나, 무언가가 시야에 걸렸다.
“어, 잠깐만요. 거기 조금만 앞으로 돌려 줘요.”
이연이 다급하게 외치자, D.S가 영상을 되감기했다. 느리게 역재생되는 화면 사이에서 다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기, 거기예요!”
화면이 정지했다. 막 까만 화면에서 벗어나 원래의 집 안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멈춘 채로 커다란 액정에 가득 들어찼다. 이연이 모니터로 바짝 다가가 왼쪽 아래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요. 여기 뭔가 이상하잖아요.”
D.S의 시선이 이연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6번 카메라는 창문 바로 옆에 설치해 누가 창문을 열면 즉시 알 수 있는 구도였다. 그러나 이연이 가리킨 것은 창문이 아닌 그 옆의 벽이었다. 정확히는 카메라가 비출 수 있는 가장 구석진 부분이었다.
“좀 일그러져 보이지 않아요?”
“화각 문제처럼 보이는데. 그런 걸 신경 쓴 카메라는 아니라서.”
D.S는 그렇게 말하며 화면을 다시 보았다. 본의 아니게 감시 카메라 영상을 몇 번 분석해 본 경험으로도 긴가민가했다. 햇빛이 강하게 비치는 각도인지라 렌즈와 빛의 굴절로 보이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연은 확신했다. 이건 초능력이었다. 이것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D.S 씨, 혹시 공간 일체 능력이라고 알아요?”
그는 이런 초능력을 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공간 일체 능력?”
“네. 공간과 공간을 통로로 만들어서 잇는 건데요…….”
막 설명하려는데, 공방 벽 너머의 길에서 저벅저벅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초등학교 수업이 끝날 시간이니 미래일 리는 없고, D.S의 손님인 모양이었다.
“이따 이야기해요.”
“그러든가.”
이연이 몸을 일으켰다. D.S의 공방에 있다 보면 가끔 이런 식으로 그녀의 다른 손님과 방문 시간이 겹치곤 했기 때문에, 익숙하다면 익숙한 상황이다.
엔지니어의 작업 특성상 의뢰인들 중에는 본인의 의뢰품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관련도 없는 사람이 멀뚱히 자신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으면 불편할 테니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예의였다. 이연은 D.S에게 꾸벅 인사한 후 잠깐 공방에서 나가 있기 위해 몸을 돌렸다.
D.S 씨랑 손님이랑 이야기하는 동안 미래가 올 것 같은데. 아예 마중 나가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공방을 나온 이연은 별생각 없이 시선을 들었다가, 막 이쪽으로 들어오려던 공방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니, 당신…….”
옅은 색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상대방 역시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어리둥절하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들어찼다.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뒤로 발을 끄는 것이 보이자마자, 이연이 냅다 방문객의 팔을 틀어쥐었다. 그 손에는 얇은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게 소름 돋는 우연일 리가 없었다. 소름 돋는 고의일 수는 있어도.
“여기 단골이세요?”
이연이 빙긋 웃었다. 묘하게 음산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유정헌 씨.”
“……그래서, 아까 말한 그 공간 일체 능력이라는 게 이 사람 능력이라고?”
“네.”
이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D.S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연과 정헌을 바라보았다.
“진짜입니까?”
“…….”
1인용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D.S와 달리, 정헌은 2인용 소파에 이연과 함께 꼭 붙어 앉아 있었다. 물론 정헌의 본의는 아니고, 오롯한 이연의 의지였다. 정헌을 단단히 붙잡은 이연의 손은 인간 수갑이라도 되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넌 왜 여기…….”
정헌이 떨떠름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연은 정헌을 몇 번 본 게 다지만, 이런 식으로 켕기는 게 있는 양 반응하는 건 처음 봤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키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그 태도는 이연의 의심에 확신을 불러왔다.
“저 여기 단골이에요.”
“……진짜?”
“네.”
온화하게 웃은 이연이 가벼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럼 이제 같이 경찰서로 갈까요?”
우렁 각시는 개뿔. 여자와 아이 둘이 사는 집에 초능력까지 써서 감시 카메라를 죄다 가리고 뭔지 모를 행동을 하는 남자라니, 수상하다 못해 체포 감이었다. 변태 아냐? 당장 경찰에 넘겨져서 빨간 줄을 그여 봐야 정신을 차리지.
예의상 짓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경멸을 담은 싸늘함만 남은 이연의 얼굴은 단호했다. 막무가내로 일으켜 세우는 손길은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끌고 갈 것처럼 거칠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
정헌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변태 주제에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무슨,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게 아니라…….”
“D.S 씨의 집에 초능력을 안 썼다고요?”
“……그건…….”
정헌이 D.S에게 의뢰를 맡기는 척하며 드나들었다면, D.S가 모니터를 보는 시간과 보지 않는 시간 정도를 구별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을 것이다. 유정헌 본인이 D.S의 주의를 눈앞에서 돌릴 수 있으니까. 그사이 카메라를 막은 거겠지. 그리고 변태 짓을…….
“감시 카메라 가린 것도 유정헌 씨죠? 영상에 다 찍혔거든요.”
카메라와 가까운 위치에서 공기가 일렁이는 듯한 효과는 몇 번이고 봤던 종류였다. 공간 일체 능력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헌의 능력을 직접 상대했던 이연은 몰라볼 수가 없었다.
“훔치거나 사진 찍은 거 있으면 빨리 다 내놔요. 지금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걸요.”
“아니, 야! 날 뭘로 보고.”
“뭘로 볼 것 같아요? 유정헌 씨 지금 개변태 같아 보이긴 해요.”
“아냐! 카메라를 가리긴 했지만, 내가 집 안에 들어간 적은 없다고. 아, 이게 다…….”
발끈하며 소리치던 정헌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웅얼거리는 수준으로 변해 뒷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메라를 가리긴 했지만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이연이 의아하게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렇다는 말은…….
“공범이 있다고요?”
이 사람 정말 안 될 사람이네. 이연이 정색하며 물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D.S의 표정 역시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아니, 아 씨. 그게 아니고. ……야! 나와! 나만 제물로 넘길 셈이야?”
별안간 정헌이 크게 소리쳤다. 널찍한 공방 내에 비명 같은 외침이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동료가 숨어 있는 건가? 이연과 D.S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공방 구석구석을 훑었지만, 수상한 인물은 없었다.
“진짜 이럴 거야? 내가 말해? 내가 말하냐고.”
그러나 정헌이 불량스럽게 빈정거리자 마지못해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소음의 근원지로 두 사람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열린 것은 벽과 같은 색의 존재감 없는 문. 방금 그들이 나왔던 곳이었다.
그렇다. D.S의 집이다.
슬쩍 열린 틈 사이로 사람 얼굴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 사람 역시 이연이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이연에게서 저도 모르게 황당한 신음이 나왔다. 그것을 용케 들었는지 문이 열리다 말고 끼긱 멈추었다. 저도 민망한 줄은 아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은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괜찮아 보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뭐 때문에 상태가 좋아졌는지 알 수 없어 찝찝했다. 이런 식의 재회가 이루어질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영 씨가 왜 거기서 나와요?”
한동안 소식이 없어도 알아서 잘 지내겠거니 했지, 설마 스토커로 전향했을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