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산오는 바로 움직이는 대신 문 앞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손짓 한 번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철문인데, 이상하게 절대로 열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그 막막함은 공포를 닮아 있었다.
당장 다시 들어가서 이연을 잡아끌어 나오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또 머저리처럼 멍하니 이연만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도 함께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제 자신이 짜증 날 지경이었다.
산오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켰으나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새어 나온 초능력이 복도 바닥으로 흘러들어 덜걱거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낯익은 기분이었다.
이 판국에 일부러 신경 써서 제어해야 하는 것조차 짜증 났다. 산오는 제 피부를 투과해 퍼지는 기력을 그대로 방치하려 했으나, 그 와중에도 생각난 것은 열이 받을 정도로 가라앉은 순한 얼굴이었다. 황당할 정도의 연계성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작은 제동 장치가 되어 주었다.
아니, 사실 놀랍지는 않았다. 정이연은 늘 그런 식으로 산오의 안에서 작동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각이 전신을 지배하기 직전, 산오는 본능에 가장 가까운 이성을 붙잡고 간신히 이곳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놀랍네요. 전 하도 안 쓰시길래 까먹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냥 도시를 뒤집어엎는 게 나았나?”
[그럴 리가요. 알차게 써 주셔서 기쁩니다.]
서현은 평소처럼 유들거리며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에 묻은 경계를 전부 감출 수는 없었다. 산오가 이번에 분출한 기력은 이전의 경험들과 비교해 훨씬 강도가 셌다. 몇 번인가 산오의 능력을 본 토지 관리인조차 허둥지둥 늦은 새벽에 서현에게 전화할 정도였으니 혼비백산할만 했다.
[진 국장 때문입니까? 저도 대충은 들었습니다. 내부 부서까지 죄다 곤혹을 치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쓸데없는 소리.”
산오가 사납게 일축했다. 안 그래도 희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전을 기하느라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다. 그따위 문제 때문에 이연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갈비뼈 사이가 아플 정도로 짜증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본 이연의 얼굴을 떠올려 낸 산오의 눈동자가 초록빛으로 확 불타올랐다. 그에 맞추어 쿵, 하는 소리가 산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할 말 없으면 잠이나 자라.”
[혹시 김 비서들 선에서 처리 안 되면 말씀해 주세요. 아시겠죠? 제산은 괜찮은 전력이지 않습니까.]
“이름 도둑놈 주제에 말이 많군.”
[그 말을 들으니 평소의 산오 님 같아서 안심이 됩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갈 가치를 못 느낀 산오가 전화를 끊었다. 희미하게 빛을 내뿜던 액정이 금세 죽으며 어둠으로 뒤덮였다. 산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할 일은 여전히 산재해 있었다. 돌아가라는 말 한마디에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갈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딴 마음가짐이었으면 10년 동안 지랄하지도 않았다.
정이연은 제가 누굴 살렸는지 똑똑히 깨달아야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 외 기타…… 진희수 쪽도 해결해야 했고, 이태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냥 전부 부숴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은 산오가 다시 휴대폰 화면을 켰다.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이 귀에 닿자마자 꺼지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산오 님.]
“어떻게 되고 있지.”
난데없는 물음에도 종희는 금세 알아듣고 대답했다.
[아직까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태진과 접촉할 가능성이 여전히 있습니다만, 그쪽에서 무조건 감형 거래를 요구할 테니 성격상 쉽게 용인할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이태진이 이걸 노리고 입원 소동을 피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아직 있습니다.]
“정이연에게 접촉할 가능성은?”
[정이연 씨의 등급 심사 보고서를 생각하면 미미합니다. 그쪽에서 원하는 만큼의 역량은 아니라고 판단할 겁니다.]
“기계는.”
[재료는 전부 준비되었으나, 대량 생산을 위한 설비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간에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준비는 순조로웠다. 산오가 시선을 들어 흐린 새벽하늘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만약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연이 알게 되면 취할 행동은 뻔했다. 보지도 않았는데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산오는 그걸 두 눈 뜨고 지켜볼 마음이 없었다.
“하나 더.”
초록색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우울한 얼굴이 떠나지도 않고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정이연에게 요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부 알아내.”
*
초호시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연은 종종 이유 없이 새벽에 깼다.
무의식 너머로 가라앉았던 정신은 번뜩 명료해지면 그 후로 다시 잠들 때까지 아주 오래 걸렸다. 그럴 때면 이연은 수없이 자리를 뒤척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오곤 했다. 부엌에서 물도 한잔 마시고,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창문 너머의 푸르스름한 달빛을 감상하다가, 도시의 야경도 흘끔흘끔 보고.
마지막으로 안방 문 앞에 섰다.
닫혀 있는 문을 앞에 두고 한참 서성이다가 가만히 귀를 대어 보면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질 때쯤, 이연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문고리를 돌렸다.
안방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놓인 침대에는 부모님이 누워 있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가슴께까지 올린 이불을 얌전하게 덮은 두 분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연은 살금살금 침대가로 다가가, 부모님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불이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 숨을 쉬면서 당연히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몸은 미동도 없었다. 희미한 달빛은 눈을 감은 얼굴을 더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이연은 성급하게 팔을 뻗다가,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정연 씨의 부모님은 얼마 전 돌아가셨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폐가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한껏 쪼그라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연을 구하기 위해 무너지는 연구소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던 부모님. 정신을 잃은 이연을 위해 간호에 매진했던 부모님. 이연이 눈을 뜨기 직전,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시체 두 구.
“……헉!”
이연이 소스라치며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격한 호흡으로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끼잉. 몸부림에 잠을 깼는지 뭉치가 이연의 옆구리로 파고들다가, 몸이 축축한 것을 깨닫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연은 한참 동안 부족한 숨을 들이켜듯 거칠게 공기를 들이마시고 나서야, 드러난 목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듯이 머리를 비비는 뭉치를 쓰다듬어 줄 수 있었다.
“뭐야…….”
허탈한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가짜로 부모님을 만들어 같이 살았을 때, 종종 새벽에 깨 안방을 들여다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부모님은 확실히 살아 계셨고—실제로 살아 있다고 말하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겠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이연은 안심하고 문을 닫은 후 제 방으로 돌아가 다시 잠을 자곤 했다.
이런 악몽은 처음이다.
그것도 하필 제산오가 떠난 날……. 이연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덩치는 별다른 잠버릇이 없어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선명했다. 침대의 절반 이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축축 처졌다.
염치도 없는 생각이다. 산오를 쫓아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였다. 이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산오가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터였다. 이연은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것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간문제였지, 시간문제였어.”
어차피 산오가 도와주던 것은 임시 알바였고, 같이 살던 것도 임시 동거였다. 선조차도 되지 않는 잠깐의 교차점.
은혜라고 믿던 것은 허상이었다. 산오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도시의 영웅으로서 살아갈 테고, 이연 역시 시민 중 하나로 살 것이다. 최상급 헌터와 하위 헌터.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이게 옳은 거리다.
[제산오]
[ㅈㅅㅇ]
[제산오 헌터]
[제산오 목격]
사무실 소파에 드러누워 끊임없이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던 이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다짐한 게 고작 몇 시간 전인데 마음이 참 마음대로 안 된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언챗의 검색 기록은 한 사람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심지어 눈에 들어오는 결과가 영 성에 차지 않았다.
머리로는 산오가 집을 나간 게 바로 어젯밤이니 바로 소식이 뜰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얼굴을 밝히지 않고 활동하는 헌터 아닌가. 어지간한 큰 사건이 아니면 목격담 같은 것도 없을 터였다. 새벽 사이에 무슨 짓을 했는데 그게 인터넷에 바로 떴으면 더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