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77)화 (177/250)

#177

15. 타조가 아니라 인간

초호시 외곽에 위치한 너른 임야는 사유지다.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가 진입 통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책으로 차단되어 외부인의 접근이 힘든 이 땅은 약 20,000평가량으로, 높은 울타리 너머에서 얼핏 보기로도 전혀 개발이 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한눈에 봐도 수상하니 부동산 투기의 실패물이 틀림없다며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릴 만도 하나, 그런 말이 실제로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는 이유는 차로 한참을 달려야 인가가 보일 정도로 외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인 셈이다.

당연히 지금 간헐적으로 들리고 있는 위협적인 소리 역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땅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나는 소리가 맞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지축 역시 미세하게 흔들렸다. 쿠르르, 쿠르르릉…….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는 마치 지하에서 사는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대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 순간, 지형이 완전히 뒤집혔다.

관리되지 않은 산의 낙엽들이 엉망으로 휘날리고, 두툼한 나무의 뿌리가 순식간에 드러나 비틀거렸다. 그 사이를 지하에서 튀어나온 암석들이 꿰뚫었다. 높은 지대는 무너지고 낮은 지대는 솟아올라 울퉁불퉁한 단면을 드러냈다. 모래와 바위가 쓸리고 구르는 소리가 뒤늦게 났다. 거대한 자연재해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각 변동은 금방 멈췄다. 광활한 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 속에 잠겨 들었지만, 모래시계를 뒤집은 것처럼 위와 아래가 바뀐 지층은 엉망으로 섞여 난장판이었다.

그 땅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분 산들바람에 검은 코트 자락이 슬쩍 휘날렸다.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남자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림자 사이로 서늘한 초록빛 눈동자가 빛을 발하는 것이 얼핏얼핏 보였다.

한동안 굳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던 남자를 깨운 것은 휴대폰 소리였다. 주머니 속에 파묻혀 울리는 작은 진동을 용케 알아챈 산오가 느릿한 손길로 조그마한 기계를 꺼내 들었다.

“왜.”

[거길 쓰시는 건 오랜만인 것 같은데요.]

“개소리할 거면 꺼져.”

[감사하다니, 별말씀을요.]

이곳을 사들여 산오에게 선물한 것은 제산의 사장, 서현의 아이디어였다.

초능력자들은 간혹 제 감정이 격해질 때 초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곤 했다. 분에 못 이겨 주먹을 내리치는 것과 비슷한 행동 원리였다.

일반적인 초능력자라면 그런 식으로 초능력을 써 봤자 어떻게 수습이 되는 수준이었지만, 재난급의 능력을 가진 고위 초능력자의 경우 손 한 번만 잘못 까딱여도 대형 사고였다. 그래서 4단 이상의 초능력자들은 마음껏 감정을 표출하는 김에 초능력이 새어 나와도 지장이 없을 만한 스트레스 해소 공간을 따로 구비해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령 산오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토지라든가.

원래도 그는 능력 제어가 탁월한 편이라, 스트레스 해소라고 해도 자주 쓰이는 건 아니었다. 더러운 성질머리만큼 흔하게 부리는 짜증과 신경질은 언제나 말이나 의도된 위협 수준이었지, 어쩔 줄 모르고 분출한 적은 없었다. 산오는 언제나 쓰고 싶을 때에만 능력을 사용했다. 손가락을 구부려 펜을 쥐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단 한 가지 사안을 제외하고.

머리털 한 올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찾아 헤매다 보면 제아무리 제산오여도 분노가 심장을 가득 채워 넘쳐흐를 때가 있었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과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불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오를 제어가 안 될 만큼 자극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뭐, 그래도 근래 산오는 서현에게 받은 이 선물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쓸 일이 없었다는 말이 맞았다. 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는가. 단순히 옆에 있기만 하는 걸로 그 정도의 안정감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산오는 이연과 함께 지내며 그가 근본적으로 여전히 무른 상태라는 점을 진작에 눈치챘다. 이연은 과거인 자신과 늘 한 발자국 물러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연했다. 이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너무 짧게 마무리되어 버린 추억은 이연에게 깊은 갈망만 남겼다. 무서워하면서도 끝내는 손을 뻗어 볼 만큼 이상향 같은 욕심. 어쩌면 절박하기까지 한.

그게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간에, 산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산오는 그 빈틈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실 놔줄 여유도 없었다. 절박한 것은 이쪽이다. 산오는 자신에게 손을 뻗어 제멋대로 살려 놓고 사라져 버린 소년을 다시 만나겠다는 생각 하나로 지옥 같은 상실을 견뎠다. 같잖은 말 한마디에 생각이 바뀔 리가 없었다.

10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이 정도는 기다리는 축에도 못 들었다. 심지어 실체가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느리디느린 정이연을 기다려 줄 자신은 충분히 있었으나…… 세상에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특히나 이연처럼 안 그런 척하면서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멍청이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되면 힘으로 제압할 심산이었다.

이연의 초능력은 분명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어쩌면 어느 면에서는 산오를 뛰어넘을 것이다. 그래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강경책을 쓰게 되면 무언가는 포기해야겠지만. 웃으면서 건네는 인사라든가, 장난스러운 목소리, 뭐 그런 것들.

그러나 감수할 의향은 충분했다. 산오에게는 이연이 필요했다. 멍청하게 앞만 보고 달리다 놓치는 건 한 번이면 차고 넘쳤다. 여차하면, 언제든……. 음험한 생각은 늘 산오의 뇌리 한구석에 마지막 보루처럼 심겨 있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실제로 이연이 그를 대놓고 밀어 내자 그런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담담한 얼굴에 확연하게 그인 선.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뭔지 모를 초조함이 일었다.

돌아가라니, 대체 어디로?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그 목소리에는 묘하게 날카로운 기색이 숨어 있었다.

‘너한테 선택지는 없다고.’

그러나 이연은 물론이고 산오 역시 직감했다. 그 나약한 협박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산오야.’

맥없이 웃은 이연은 조금 서늘해진 눈동자를 들었다.

‘우리 부모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알아?’

‘…….’

‘나 때문이야.’

오랜 상처는 살짝 헤집는 것만으로도 쉽게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도 아물 생각을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낫지 않을 것이다.

‘왜 네 실험이 중단되고 폐기 처분이 내려졌는지 알아?’

그 고통이 산오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나 때문이야.’

과거의 조각들이 이연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자책하는 얼굴은 담담했지만, 산오에게는 박제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비처럼 보였다.

‘나 때문에 네가 죽을 뻔한 거야.’

그래 놓고 널 살렸다고 생각하다니, 우습지. 이연이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네가 갚을 은혜는 없어.’

이연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산오의 말은 진심이었다. 산오에게는 이연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연구소에서 죽으려던 제산오를 끌어낸 것은 정이연이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은 정이연이었다. 그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평생 져야 했다.

억지로라도 끌고 가서 옆에 앉혀 놓으려고 했는데.

‘난 안 죽었어.’

산오의 입술 새로 나온 것은 멍청한 대꾸뿐이었다.

이연의 눈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죄책감으로 범벅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산오는 난폭한 생각을 전부 잊어버리고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한계에 몰려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우울한 얼굴을 어떻게든 해 주고 싶어 애가 탔다. 제 코가 석 자인지 넉 자인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네 앞에 살아 있잖아.’

‘하지만 네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지.’

냉정하게 자르는 이연의 목소리는 오히려 부드러웠다. 재차 밀어 내는 말에 산오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초조한 와중에도 짜증이 났다.

‘도시의 영웅으로 돌아가.’

그딴 식으로 저를 분리할 수는 없었다. 네멋대로, 네가 감히……. 정제되지 않은 분노가 울컥이며 목구멍으로 넘어오는데도, 정작 입 밖으로는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전부 허세였다. 산오는 이연의 의사를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따위로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이정연과 다시 만났을 때의 정이연의 모습이 교차해서 마구 떠올랐다. 웃는 눈동자와 떠드는 입술,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손. 호의가 담긴 행동들. 깨닫기도 전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다. 산오는 자신을 싫어하는 이연을 견딜 수 없었다.

심지어 이연이 곁에 없던 때마저도 제산오는 정이연이, 그를…….

그것을 자각한 시점에서 산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뇌 속을 유영하던 폭력적인 계획들은 모조리 폐기되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무력감이 좆같았다. 산오는 대답 대신 한참 이연을 노려보고 또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휙 몸을 돌렸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는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