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76)화 (176/250)

#176

이연은 이미 이 변이종을 본 적이 있었다. 어릴 때, 보육원을 벗어나 양부모님과 살던 시절의 어느 더운 여름날. 숨어서 하드를 사 먹으며 걸었던 한적한 길.

사슬에 묶여 길 밖에 나와 있던 그 변이종이다.

“이태진이한테 네 이야기를 듣긴 했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경쾌했지만, 내용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사형 선고 같은 음성이 천둥처럼 크게 귓가에 내리꽂혔다.

“네가 이정연이지?”

이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바짝 굳어 그녀를 바라보는 이연을 빤히 마주 보던 은주가 문득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놀라? 나도 어렴풋이 짐작만 한 정도야. 그때 내 연구소를 신고한 신고자 사진은 본 적 있어. 나도 누가 내 연구소를 망하게 했는지는 알 권리 있잖아? 뭐, 어렸을 적 사진 한 장을 잠깐 본 걸로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눈썰미가 좋은 건 아니라서 계속 긴가민가했지만. 그런데 그 애가 자라면 네 나이대 정도였을 건데, 넌 내 연구소에 있던 변이종까지 알고 있고. 그럼 뭐, 뻔하지.”

그렇게 말한 은주가 장난스레 눈을 찡긋였다.

“이태진이 착취해서 네 모발 색소가 엄청나게 옅어졌다는 소린 들었는데, 초관청에서 봤을 때에는 후드로 가려져 있어서 말이야.”

“……이태진 씨가 훔쳤다는 변이종은 연기여우예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연은 그냥 대놓고 물었다. 은주의 정체를 알고 나니 옛 친구인 태진이 그녀의 연구소에서 무엇을 훔쳐 갔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머, 그것도 아네?”

은주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간만에 들어온 중급 변이종이었는데 그놈이 홀랑 들고 가 버려서 얼마나 난감했는지. 무마하느라 진땀 뺐다니까. 역시 너한테 보냈구나?”

김 박사와 이태진이 모두 잡혔지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었던 연기여우에 관해서는 끝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맥락이었다니. 미궁에 빠져 있던 변이종의 출처가 밝혀져도 씁쓸하기만 했다. 이연이 굳은 얼굴을 풀지 않자, 은주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어머, 이태진이 남겼던 쪽지 때문에 그래? 난 너 원수라고 생각 안 해. 그리고 결국 네가 밉상으로 굴던 이태진을 잡았잖니! 난 그 소식 듣고 아껴 두던 와인까지 깠다니까. 뭐, 그걸 생각하면 과거 일도 그렇게 된 게 좀 재미있다 싶기도 하고…….”

무언가를 아는 듯한 말투. 장난스러운 표정. 이연은 본능적으로 이게 제가 찾던 퍼즐 조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맥박이 불길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움직이지 않는 혀를 간신히 꿈틀거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정도가 전부였다.

“어라, 네 삼촌이 이야기 안 해 주던?”

힘겹게 내뱉은 물음에 은주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그때 내 연구소를 신고해서 이태진 연구소까지 줄줄이 폐쇄 명령이 떨어진 거잖아.”

표면적으로야 이태진네는 실적 부진이었지만 다 핑계지, 뭐.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뒷말은 더없이 흐릿하게 들렸다. 이연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게 나 때문이었다고?

반사적으로 반발하며 부정하는 마음 안에서 과거의 조각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어두운 어느 밤, 새하얀 연구소의 안쪽에서 발견했던 폐쇄 지침서. 연구소의 문을 닫고, 건물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실험체는 폐기해 버리는.

‘아, 하긴…… 그래서 네가 내 연구소도 그 지경으로 만들었지.’

태진이 중얼거리던 의미 모를 말.

*

귀가한 집은 오늘도 조용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뭉치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거실 불을 켠 이연이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자 뭉치는 자세를 낮추고 이연을 노려보았다. 손을 내밀었지만 여전히 다가오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

하얀 모래가 모여들었다.

크게 뭉쳐진 모래 덩어리는 조그마한 아이의 형상으로 변해 이연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을 확인한 뭉치가 고개를 벌떡 치켜올렸다. 요 근래 계속 적대적이었던 것과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모래로 만든 어린 정연이 쑥스러운 얼굴로 뭉치에게 가만히 손을 흔들자, 뭉치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이연을 경계하면서도 뭉치는 한 발 한 발 내딛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손에 코를 비볐다.

이연이 보이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이 정도면 완전히 확인 사살이었다. 설마 그때의 검은 고양이가 뭉치였다니. 그는 그게 변이종인 줄도 몰랐다.

‘너 그 청호 데리고 있지? 잘 키워 줘.’

오늘 들었던 은주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알았지? 이연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은주가 속 모를 웃음으로 가볍게 대꾸했다.

‘보주 찾아서 돌려줬다며. 걔가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데.’

초능력관리청에 청호가 잡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으니, 네 곁을 맴돌고 있거나 네가 아예 데리고 있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어? 곤란해서 처치하고 싶었다면 청호의 약점에 대해서 물어봤겠지. 그런데 그런 얘기는 전혀 꺼내지도 않았잖아. 그녀가 노래하듯 줄줄 덧붙였다. 이연은 대답 대신 고개만 숙였지만, 은주는 이미 확신한 건지 다시 물어보지도 않았다.

대신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헌터라고 했지? 심사 위원회 영감들 속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하급 판정을 받았네.’

‘……어떻게.’

‘얘, 이태진이 그 능력 뽑아 먹고 얼마나 신나서 나한테 떠벌렸는지 알아? 그래 봤자 자기 것도 아니면서 유세도 그런 유세가 없었는데…… 아무튼, 네가 무궁화 5단을 받지 않으면 대체 누가 받겠어? 등급 나온 날부터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 조용한 걸 보면 숨긴 거겠지.’

그건…… 그랬다. 이연의 위장 능력은 정연을 아는 이들이 보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연이 머쓱하게 입을 다물자, 은주가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청호 앞에서도 잘 숨겼을 테고.’

‘……!’

‘어쩌다 들킨 거야? 설마 걜 위협한 건 아니지?’

이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머릿속에서 당시의 사건이 찬찬히 재구성되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이연이 뭉치 앞에서 대놓고 능력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위협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경계할 수가 있어요?’

‘뭐, 아무리 고지능 변이종이라고 해도 본능은 있으니까.’

계속 쌓이기만 하는 암담한 진실에 절로 이연의 어깨가 처졌다. 이대로 뭉치가 계속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만 해도 우울했다.

처음에 뭉치를 받아들인 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감시 차원이었다. 뭉치는 최상급 변이종이고, 전투 능력 역시 특출났으니까. 산오와 이연의 능력을 합치면 청호를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런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어느샌가부터, 이연은 이 애교 많고 눈치 빠른 생물체를 제법 좋아하게 되었다.

감시 따위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뭉치야, 걔랑 나 닮지 않았어?”

이연의 말을 들었는지 정연에게 놀아 달라며 머리를 들이밀던 뭉치가 흘끗 시선을 던졌다. 시큰둥하게 그를 바라보던 뭉치는 정연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가, 머리를 휙 돌려 이연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움직임에 이연이 한숨처럼 웃었다.

“보주도 없이 쬐끄만 게 그렇게 커다란 변이종이랑 어떻게 싸우려고 했어.”

뭉치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조금 둥글던 동공이 세로로 가느다랗게 찢어졌다.

“그리고 기껏 구해 줬더니 사람 버리고 홀랑 가 버리는 게 어딨냐…….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 그때 엉엉 울었다고.”

정연의 몸이 서서히 부스러져 사라졌다. 조그만 아이가 도로 하얀 모래가 되어 버리자 거실에는 이연과 뭉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연은 뭉치와 눈높이가 맞도록 쪼그려 앉았다.

“그래도 다시 만나서 반가워.”

조용히 중얼거린 그가 느리게 팔을 뻗었다. 바닥을 쓸며 뭉치에게 다가간 손가락 끝이 푹신한 앞발과 슬쩍 닿았다.

조심조심 매만지는 손길을 뭉치는 피하지 않았다. 얼마간 가만히 있던 짐승이 느릿하게 몸을 숙였다.

보드라운 털가죽이 이연의 팔에 닿았다.

뭉치가 몸을 비비며 품에 파고들었다. 느리고 유연한 움직임에는 더 이상 경계가 없었다. 숨을 잠깐 멈췄던 이연이 나머지 한 손도 뻗어 뭉치를 쓰다듬었다. 뭉치는 몸을 움츠리지도, 비틀지도 않았다. 기다란 꼬리가 살랑였다.

아주 오랜만에 안아 보는 감촉이었다.

산오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 정도 후였다. 며칠 전 연락을 받고 급하게 가 버린 이후로 산오는 매일 아침 일찍 어딘가로 향했고, 귀가 시간 역시 한참 늦어졌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닫혔다.

거실로 들어서는 산오에게는 조금 쌀쌀한 바람 냄새가 났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연과 그 품에 안겨 있는 뭉치를 차례로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그놈하고는 화해한 모양이군.”

조금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연은 잠깐 갈등했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고, 알고 한 것도 아니었고……. 그건 그냥 우연이 겹쳤을 뿐이었다. 제산오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 조심하기만 하면, 어쩌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연과 함께 걷던 산오의 모습이었다. 같이 임무를 다니고, 여행을 가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뚱한 얼굴과 삐뚜름한 웃음, 일상적이고 익숙한 태도.

이연이 더없이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들.

“있잖아.”

그러나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그립고 그리운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너 은혜 다 갚은 걸로 칠 테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

“……뭐?”

이연은 산오를 살린 게 아니었다.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

그는 산오를 죽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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