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그러나 이연이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은주는 별다른 의심 없이 제가 아는 정보를 줄줄 늘어놓았다.
“청호는 조금 알지. 상급 변이종은 개체가 많이 없어서 변이종 특성인지 개별 특성인지 정확하지는 않은 점 참고하고.”
“네…….”
“청호는 호불호가 확실하고 독점욕이 있는 변이종이라,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이 명확해. 호전성이 없다가 생긴 거면 적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큰데. 청호는 자기보다 약한 존재한테는 큰 반응 안 하거든. 이연 씨 제법 강한 헌터인가 봐?”
아니, 내가 힘 자랑을 뭐 어떻게…… 설마 제산오 넘어트려서 걔보다 강하다고 인식된 거야? 이연이 황당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집에 가면 당장 풀어 줘야겠다. 이연은 비장하게 물었다.
“자기보다 약하다는 걸 깨닫기만 하면 되죠?”
“생각 바꾸기 쉽지 않을 텐데. 걔 바보 아니야.”
“…….”
은주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보면 최상급 변이종한테 인정받은 거지. 좋게 생각해.”
인정 안 받아도 되니까 쓰다듬고 싶었다. 이연은 우울하게 물었다.
“……시간이 흘러서 다시 얌전해질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뭐……. 혹시 모르지, 걔 목숨이라도 구해 주면 순해질지도.”
마지막 말은 완연한 농담기가 가득했으나, 묘한 위화감이 일었다. 이연은 티 나지 않게 은주를 흘깃 살폈다.
아까부터 말투가 좀 이상했다. 마치 아는 청호라도 있는 것 같은 어조였다.
예전에 날렸다는 이야기가 최상급 변이종을 다뤄 봤다는 거라면 과연 자랑할 만했다. 초호시에 있는 수많은 연구소 중에서도 최상급 변이종 연구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연구소는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
하지만 처음 청호를 만났을 때, 혜강이 찾은 정보에는 청호가 매번 도주에 성공했다고 했는데. 모든 헌터가 이연처럼 호전성이 없다는 이유로 청호를 놓아줄 리도 없을 테니, 포획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했을 것이다.
어딘지 모를 사설 연구소에서 청호를 포획할 수 있다면 정부에서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헌터와 사적으로 고용할 수 있는 헌터의 풀은 규모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생각보다 엄청 세세하게 아시네요.”
슬쩍 흘린 말에 은주가 빙긋 웃었다.
“목숨을 구해 주면 순해진다니까?”
“……청호의 목숨을 박사님이 구해 준 적이 있다고요? 혹시 헌터도 하셨어요?”
“어머, 난 비초능력자야.”
이연이 미간을 조금 좁혔다. 일반인이 청호를 마주치고 살아 있는 걸로도 모자라서, 무려 목숨이 위험했던 청호를 구해 준 적이 있기까지 하다는 건 쉽게 믿기 힘든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은주가 말하는 청호에 대한 이야기들 역시 진짜라는 이야기였다.
“박사님, 혹시 저도 청호를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얘는. 내가 청호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게 해 주니?”
“하지만 방금은…….”
“난 그렇다고 대답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웃음기를 띤 은주의 얼굴은 단단한 가면처럼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연에게 내내 친근하게 굴었지만, 정말로 만만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쉽게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이연은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그러네요. 제가 잘못 알아들었나 봐요.”
그 대답에 은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탐색하는 눈빛이 은근하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이연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꼭 목숨까지 구해 줘야 해요? 그냥 도와주는 정도는 안 되나?”
이번에는 은주도 순순히 대화에 따라왔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발랄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뭐, 그건 정도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보주 찾아다 준 걸로는 안 되는 건가…… 좀 봐주지……. 이연이 시무룩하게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은주는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다발신이랑 찔레늪은 제대로 안 다뤄 봐서 모르겠네. 걔네도 비슷하긴 할걸. 그러고 보니 최근에 다발신이 잡힌 거 알고 있니? 인도 절차 끝나는 대로 연구 허가 요청하려고 벼르고 있는데, 언제쯤 될까 모르겠어.”
은주가 입맛을 다셨다. 다발신 잡힌 이야기에는 솔깃해도 누가 잡았는지는 관심조차 없다니, 과연 이쪽도 재경과 비슷한 변이종 오타쿠인 게 실감이 됐다. 다발신에 관해서는 조금 알게 된 이연이 슬쩍 알은척했다.
“아, 근데 보주가 파괴됐다고 하던데. 그래도 연구가 되나요?”
“으응. 그런 건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자신만만하게 말한 은주는 흠,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확실히 예전이 연구하기 편하긴 했지. 좋은 시설이랑 기술이 많았거든. 망해서 아쉬울 때도 있긴 해.”
갑자기? 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연은 순순히 대꾸했다.
“자금이 문제였던 거예요?”
그렇게 좋은 연구소였으면 재정 문제가 꽤 중요했을 터였다. 특히나 변이종 연구는 돈이 거의 안 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예전이라고 사정이 달랐을 리 없었다.
“아니, 내 연구소는 좀 특수한 상황이었어서 재정엔 문제가 없었는데……. 변이종 관리 소홀로 한 놈이 거의 탈출할 뻔해서 난리가 났었지.”
“그건…… 좀 문제가 됐겠네요.”
이연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급 변이종을 데리고 연구를 하는데 관리 소홀로 탈출해 민간에 풀려났다면, 소장이 책임을 지고 연구소를 폐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연도 어릴 때 길 가다가 변이종과 마주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제때 헌터들이 달려와 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사달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탈출할 뻔한 거지, 정말 탈출한 건 아닌 거 아니에요? 물론 주의할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잖아요.”
“아, 정확히 말하면 그것 때문은 아니고, 신고받아서 망했어.”
“네?”
웬 신고? 알아듣지 못한 이연은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은주는 자세히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지 적당히 말을 돌렸다.
“뭐, 그래도 아예 소득이 없던 건 아니었으니 괜찮아. 새로운 연구 주제를 얻은 계기가 됐거든. 그쪽 정치질도 신물 나던 참이었고…….”
“정치질도 있구나.”
“얘, 너 거기 정치질이 얼마나 심했는 줄 아니? 아주 음침한 족속들만 모여 가지고……. 그때 연좌제 명목으로 내 연구소뿐만이 아니라 다른 협력 연구소들도 줄줄이 폐쇄됐어. 날 미끼 삼아서 꼬리를 잘라 버린 거야. 그래서 내가 한동안 얼마나 원망을 듣고 살았는지 몰라.”
하소연하던 은주는 별안간 씨익 웃었다.
“그래서 그때 우리 거꾸러트리던 인간들이 나중에 제산오한테 줄줄이 잡혀 가는 거 보고 얼마나 웃겼는지!”
……아니, 잠깐만. 이연이 멈칫했다.
제산오가 잡은 연구자들은 전부…… 불법 연구소 주동자들일 텐데.
“……제산오한테 잡힌 사람들이 동료였다고요?”
“어머, 얘. 난 청산 다 했다니까.”
이연이 대번에 경계 어린 목소리로 변해 묻자, 은주는 결백하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분야가 변이종 연구라고 했잖니? 내가 위반한 사항이라고 해 봤자 허가받지 않은 위험 변이종을 연구했다는 것뿐이었거든. 심지어 걔네를 도와주는 방향이었다니까? 다른 놈들처럼 사람 상대로 하는 실험은 근처에도 간 적 없어! 그래서 벌금형 받았고, 전부 냈지. 요즘은 개과천선해서 완전히 허가받은 연구만 하고 있다구.”
연구소 크기가 좀 작아지긴 했지만 큰 불만은 없다며 은주가 야무지게 덧붙였다. 하긴, 불법 연구자 신원으로는 초능력관리청에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것 하나는 철저하니까. 이연은 찝찝해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야. 세금도 얼마나 잘 내는데.”
은주가 너스레를 떨며 일부러 근엄한 얼굴을 해 보였다. 동시에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권은주 씨?”
문 너머에서 나타난 인물은 경찰복과 비슷하게 생긴 정복을 입은 단단한 인상의 남자였다. 기다리던 사람이었는지 은주가 반색하며 눈을 반짝였다.
“오, 드디어 만날 수 있다던가요?”
“네. 따라오십시오.”
“즐거웠어요.”
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연이 인사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은주 역시 재미있는 대화였다며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 참, 이거.”
그녀는 이연을 지나쳐 가기 전에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엉거주춤 받아 든 이연 역시 가방에서 제 명함을 꺼내 주며 은주의 것을 흘끗였다. 하얗고 두꺼운 종이에 단정한 글씨체로 정보가 적혀 있었다.
<공생 지향 연구소 / 소장 권은주>
그 밑으로 조그맣게 나열되어 있는 연락처들을 무심히 훑은 이연이 시선을 들자, 은주가 이연의 명함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이것도 인연이니, 나중에 또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해.”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연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나도 가 볼까. 은주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지금쯤이면 로비에 이연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문밖으로 나선 남자와 은주가 멀어지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아져서 병원으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런.”
“원칙대로라면 면회가 금지되어 있으나, 이태진 씨 본인의 의사가 강경하여 담당자 대동하에 짧은 시간 정도는 가능하도록…….”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이연이 우뚝 멈추었다. 두 사람의 음성은 이제 완연히 멀어져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직전에 벼락같이 귀에 꽂혀 들어온 단어가 선명했다.
……이태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