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71)화 (171/250)

#171

이건 실수도 홧김도 아닌, 정말 입맞춤이었다. 이연이 밥 먹으며 열띠게 고민했던 ‘커플 같은 행동’의 범위에 뽀뽀 이상의 진한 스킨십은 전혀 없었다. 상식적으로 손을 잡는 것과 뽀뽀가 어떻게 같은 선상이냐고……. 연애 경험이 없는 이연도 그게 다르다는 건 당연히 알았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슬쩍 내뱉은 뒷걸음질에 이연의 팔을 잡아끈 산오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온기가 한 번 더 붙었다 떨어졌다. 접촉이 끝나고도 아주 조금만 떨어져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멈춘 산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나를 무지렁이처럼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눈이 정확히 맞부딪쳤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어?”

잠깐, 잠깐만. 뭐라고?

돌처럼 굳은 이연이 산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백지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제산오가…….

“못 알아듣겠나?”

그 목소리는 확실하게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나, 나 초관청 좀 갔다 올게! 보고서 내야 되거든.”

과부하였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이연이 산오에게서 후다닥 떨어지다 못해 벌떡 일어섰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혜강이 구박해도 보고서 작성을 늦장 부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핑계가 되어 주었으니까.

같이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떼어 내지? 이연은 치열한 고민과 함께 부산스레 외출 준비를 하는 척 산오를 외면했다.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던 산오가 문득 휴대폰을 확인했다. 또 어디선가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루에 몇 번은 연락을 받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액정을 보던 산오의 눈빛이 일순 사나워졌다. 뭐지? 심상치 않은 기세에 이연이 시선을 피하던 것도 잊고 의아하게 그를 보는데, 별안간 산오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급한 일이 생겼다. 퇴근은 혼자 해라.”

이제 오전인데 벌써 퇴근을 논할 정도라면 보통 큰일이 아닌 것 같았다. 대형 변이종 긴급 호출이라도 받았나? 이연이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난 상관없는데…… 괜찮아?”

산오는 돌아보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서며 대꾸했다.

“저녁 먹고 퇴근해.”

그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요란한 방울 소리만 사무실에 메아리쳤다.

무슨 일인지 걱정은 좀 됐지만, ……사실 좀 안심하기도 했다. 마치 하늘이 도와준 것 같은 타이밍이다. 이연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겉옷을 걸쳤다.

그렇게 돼서, 무사히 이연 혼자 초능력관리청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연은 의자들이 예쁘게 줄지어 있는 대기 공간에서 대기표를 뽑고 멀뚱히 앉았다. 보고서 제출은 이미 몇 번이나 해 봐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한 초능력관리청은 오늘도 붐볐다. 아마 차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오래 걸리는 일일 것이다.

멍하니 있으면 생각나는 건 역시 산오의 폭탄발언이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이연은 초능력관리청에 오는 내내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은유적인 표현인가? 내가 뭔가 놓친 맥락이 있나? 고작 여덟 글자짜리 문장을 가지고 수십 수백 번 생각하다 보니 나중에는 글자 모양이 낯설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대화의 흐름을 생각하면 다르게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이연의 착각이나 희망 사항 같은 게 아니라, 아무래도 정말로, 제, 제산오가 나를 좋…….

“저기요.”

“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부수고 끼어든 목소리에 이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키에 화려하게 물들인 노란색 머리의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정이연 헌터 맞죠?”

“……누구세요?”

이연이 떨떠름하게 묻자, 남자는 친한 척 억지로 손을 붙잡아 악수하며 웃었다.

“와,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전 배성 컴퍼니 소속의…….”

“정이연 씨라고요? 제산오 헌터랑 같이 다발신 잡은? 와,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남자가 문장을 끝마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뭐, 뭐야? 이연이 당황한 눈으로 앞에 몰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 이연에게 다가왔다.

사실 유명해졌다고 혜성이 말했을 때도, 급상승한 랭킹을 확인했을 때도 조금 놀랐을 뿐 별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이연이 아니라 이연과 함께 다닌 산오였다. 말이 유명해진 거지, 랭킹 1위의 유명세에 업힌 것과 다름없었다. 이연의 등급은 고작 2단이었으니, 같이 일을 했다손 쳐도 5단 헌터인 산오가 모든 것을 다 해냈으리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말 그대로 그냥 옆에 있던 들러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실례합니다. 옆에 있다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누구? 정이연?”

“제산오랑 같이 왔어요?”

순식간에 이연의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 차고, 로비는 북새통으로 변했다. 멀리서 이 소란을 보고 의아하게 다가오는 사람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관전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제산오라는 이름값을 너무 우습게 봤다. 산오와 같이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둘이 같이 있었다면 순식간에 산오의 얼굴이 동네방네 까발려져서 종찬과 종희에게 즉시 호출당했을 것이다.

‘나라고 이렇게까지 유난일 줄 알았겠냐고…….’

이연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사방이 사람으로 바글바글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사람이 몰려 있으면 경비가 와서 정리해 주고 그러지 않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무작정 다른 사람 도움을 기다리다가는 인파에 깔려 죽을 판이었다. 이연은 사회성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죄송한데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대기표 뽑고 앉아 계시던데요. 차례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그전까지 저희랑 이야기 좀 해요.”

“제산오 실물 본 적 있어요?”

“그럼 같이 일했다는데 봤겠지. 무슨 저런 질문을 해, 수준 낮게.”

“뭐야? 방금 누가 말했어?”

“저는 정이연 헌터의 능력이 궁금해서…….”

“개뿔이, 뭐가 제산오 구미에 당겼나 묻는 거겠지.”

“방금 누구야!”

다행히 사람들은 질문 경쟁을 하다 못해 지들끼리 싸움판을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연은 모두의 언성이 높아진 틈을 타 재빨리 사람들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과거 클럽 스테이지를 빠져나갈 때 쓰던 현란한 무빙이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이연은 무사히 빠져나와 로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벽 사이로 몸을 숨기기 직전, 몇 명이 이연을 다시 알아보았다.

“정이연 씨! 어디 가세요!”

“언제 저기까지 갔지?”

“혹시 저게 능력인가? 순간 이동?”

“정보로는 그림 실체화랬는데…….”

“아, 아니. 저 급한 일이 있다니까요.”

이연이 웅성거림에 대꾸하며 급하게 경보했다. 다행히 바로 앞에 문이 열리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잽싸게 들어가 닫힘 버튼을 연타하자, 사람들이 미처 도달하기 전에 문이 닫혔다.

“휴…….”

한숨을 내쉰 이연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설마 저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계속 저 상태면 보고서 제출은 어떻게 하지? 이연이 울적하게 이제 종이 쓰레기가 되어 버린 대기표를 손안에서 구겼다.

“저……. 혹시 정이연 헌터?”

“예?”

이연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타기 전에 미리 타고 있었는지, 안경을 쓴 젊은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정이연 헌터시구나. 요즘 엄청 핫하시잖아요.”

“제가 초관청에 잘 안 와서…… 몰랐어요…….”

이연이 우울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졌다고 해도 그렇지, 초능력관리청에서 이연을 기억할 만한 사람이라고 해 봤자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어떻게 인사 한번 못 해 본 사람들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제게 무슨 이름표라도 달려 있는 것마냥…….

“하하, 하긴 모자도 쓰고 오지 않으신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긴 해요.”

“네?”

“머리 색도 그렇고, 차림새도 그렇고. 너무 튀잖아요.”

“…….”

머리카락 때문이구나!

아무리 개성 표출의 시대라지만, 탈색을 두어 번은 한 것 같은 이연의 머리 색은 아직도 눈에 많이 띄었다. 게다가 커다란 고글까지 쓰고 있으니 특징적인 것을 넘어 마스코트 수준이었을 터였다.

이연에게는 워낙 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튄다는 생각도 못 했다. 하여튼 이태진. 도움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연이 투덜거리며 일단 고글부터 가방에 쑤셔 넣었다. 다행히 후드 티를 입고 와서 모자를 완전히 뒤집어쓰면 조금 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섬주섬 차림새를 정돈한 이연이 여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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