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70)화 (170/250)

#170

“……보통은 그렇지 않나?”

불법 청부업자도 아니고 사람 죽이는 헌터가 얼마나 되겠는가.

“난 보통이 아니라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살인마쯤으로 보고 있었나 보군.”

“…….”

이연이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니까……. 소심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 모습을 보는 산오의 눈초리 역시 덩달아 스산해졌다.

“그, 아까 사귀는 척 계속하자고 했잖아.”

이연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산오가 마뜩잖지만 들어는 주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생각해 봤는데, 우리 그럼 그, 좀 더…… 커, 커플처럼 굴어야 되지 않아?”

의연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긴장해서 발음이 자꾸 꼬였다. 아 씨. 이연이 달아오르는 목덜미를 애써 무시하며 산오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개수작 같나? 괜히 이런 소릴 해서……. 산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서워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커플 같은 게 뭔데.”

나직하게 떨어진 대답은 예상외로 크게 불쾌한 어조는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협조적으로 들리기까지 해서, 먼저 물어본 주제에 되레 놀란 이연이 말을 더듬었다.

“어, 어?”

“그게 뭐냐고.”

이연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연애라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인간이 여기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실 산오가 물어본 것은 이연이 아까부터 고민하고 있던 문제기도 했다. 식사 내내 그럴듯한 커플 행세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영 어색해서 번번이 망설이다 그만뒀다.

하다못해 로맨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챙겨 주기라도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나, 그것도 신통치 않았다. 산오는 식사 예절이 깔끔했기 때문에 빈틈이 전혀 없었다. 뭘 먹다가 흘리거나 묻히지도 않고, 자세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젓가락질이나 칼질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환장하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먹는 모습 구경한 사람만 됐다.

그렇게 혼자만의 싸움을 한 시간도 넘게 했으니 진이란 진은 다 빠졌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던 이연은 그 와중에도 눈치를 보다가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무난한 것을 슬쩍 내뱉었다. 제안했을 때 경멸까진 안 당할 정도의 행위…….

“……손잡는 거?”

말하면서도 기대는 전혀 없었다. 소꿉장난 같은 의미 없는 행위를 제산오가 하려고 들겠는가. 그것도 사소한 거짓말의 퀄리티를 높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런데 놀랍게도 선선한 손길이 내밀어졌다.

“하든가.”

“……진짜?”

그 말에 산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자며.”

“그건 그런데…….”

비록 이런 구체적인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이연이 바라던 상황이긴 했다. 그런데도 무언가 덫에 걸린 느낌이 들어, 이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 앞에 뻗어진 커다란 손을 노려보았다. 뭐지? 이게 맞는 건가?

이연이 꾸물대자 산오는 심드렁한 얼굴로 재촉하듯 손을 더 뻗었다. 제가 하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연은 조금 더 머뭇대다 산오의 손바닥에 조심조심 제 손을 얹었다.

손이 겹쳐지자마자 산오의 손가락이 구부러져 이연의 손을 감쌌다. 두 사람은 덩치가 다른 만큼 손 크기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맞잡으니 적나라하게 비교되었다.

이연은 손등을 완전히 가리고도 넘쳐흐르는 온기를 고작 10초 버텼다.

“이, 이건 안 되겠다.”

“하자고 해 놓고 왜.”

“나 다한증 있거든. 축축하면 좀 그렇잖아.”

헛소리를 지껄이며 손을 슥 빼내자, 산오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면서도 순순히 놓아주었다. 이연은 맞닿았던 피부가 떨어지고 나서도 화끈거릴 정도로 남아 있는 손의 온기가 낯설어 어쩔 줄을 몰랐다. 좋은 만큼 어색하고 민망했다.

그래도 손 한번 잡아 봤으니 됐다……. 이 정도면 여한이 없었다. 이연이 만족하며 산오와 한 발 떨어져 걸음을 다시 옮기려는데, 산오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럼 어쩌라고.”

“응?”

“커플처럼 굴라며.”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다소 당황한 이연은 산오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그는 정말로 이연의 개수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 아니. 이연이 더듬거리며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산오는 말없이 노려보며 빨리 대답하라는 얼굴로 이연을 압박했다.

대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손잡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포옹이라도 하자는 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산오의 행동에 이연이 투덜대듯 말했다.

“몰라, 나도. 좋은 방법 있냐?”

“커플처럼 보이면 되는 건가.”

“……그렇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이연에게 산오가 성큼 다가섰다.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묘하게 낯익은 분위기에 당황한 이연이 미처 피하기도 전에, 산오는 허리를 숙였다.

따뜻한 감각이 맞닿았다.

찰나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돌처럼 굳은 이연이 눈을 부릅뜬 채로 지척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짙은 눈썹이나 깊은 눈매, 매끄러운 뺨 같은 게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초록빛이 선명하게 도는 눈동자 안에 이연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그러고 보니 사귄다는 구라 칠 때도 다짜고짜 뽀뽀했지…….

이연이 흐릿해지는 정신머리를 잡지 못하고 멍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제산오다운 행동 같기도 했다. 아니, 근데 왜 뽀뽀, 뽀뽀를…… 커플처럼 보이기야 하겠지만…….

잡생각으로 현실을 도피하는 사이에도 산오와의 입맞춤은 계속 이어졌다. 질감 좋은 입술이 안쪽으로 슬쩍 파고들자 이연이 본능적으로 바짝 얼어붙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목구멍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그사이 이연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릿하게 비벼졌다. 산오가 고개를 살짝 틀자 입술이 더 단단하게 맞붙었다. 섬세한 각도의 콧날이 이연의 콧등에 닿았다.

따져보면 산오와 입을 맞춘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사고도 횟수로 세면 벌써 세 번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샌가 입술은 다시 떨어져 있었고, 산오는 조금 전 대화할 때와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꿈인가? 이연이 맹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 모습을 흘끗인 산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이제 사귀는 것 같나?”

아직 넋이 반쯤 나가 있는 이연이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지금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럼 다음에 또 하든가.”

“……그 얘기가 아니지!”

묘하게 웃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연이 버럭 소리 지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보폭을 크게 해 산오를 앞지른 이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뜨거운 귀를 벅벅 문지르는 손길이 부산했다.

그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오 역시 뒤늦게 걸음을 옮겨 이연을 좇았다.

*

귀갓길 뽀뽀 사건 이후, 산오는 둘만 있을 때 종종 이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할 때마다 벼락 맞은 병아리처럼 굳어 있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 좀 익숙해지라는 이유였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연이 달아오르는 얼굴과 세차게 뛰는 심장을 감수하면서도 강경하게 거부하지 않은 것은, ……그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싫을 리가 있겠냐고?’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뽀뽀인데! 비록 거짓말을 이어 나가기 위한 이유라고 해도, 어린아이 같은 장난이라고 해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심지어 산오 쪽에서 제안한 거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좀 고민했다. 산오는 그냥 장단에 맞추기 위해 아무런 감정 없이 하는 걸 텐데, 저만 이렇게 제 욕심만 채워도 되는 문젠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 봐도 막상 산오가 이연에게 고개를 숙이면 여지없이 무너졌다. 부드러운 입술이 가볍게 맞닿고 떨어지는 감각은 매번 설레고 간지러웠다. 이미 이연은 자신의 키에 맞춰 고개를 숙이면서 앞머리 그늘이 짙게 지는 산오의 반듯한 이마나 곧은 눈썹뼈, 살짝 내리까는 속눈썹 같은 것을 너무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조그마한 양심은 거대한 사심에 속절없이 밀렸다.

“……넌 이래도 괜찮아?”

구르고 짓눌리다 못해 완전히 깔아뭉개지기 전, 양심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 두루뭉술한 이연의 질문에 산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

“아니, 이런 건 보통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니까…….”

내내 신경 쓰이던 부분이기도 했다. 둘이 사귄다는 거짓말은 혜성에게 아무렇게나 내뱉은 임기응변에 불과했다. 물론 산오가 시작한 거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행동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고작 가짜 애인 행세를 하겠다고 입술까지 맞대다니, 이게 대체 산오에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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