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69)화 (169/250)

#169

대부분의 경우 산오가 마무리를 자처했으니 당연히 자기 이름으로 신고한 줄 알았는데, 이연의 이름도 같이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초능력관리청에 근무하는 인원이 한둘도 아니니 신고 절차를 밟으면서 슬금슬금 소문이 퍼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유명세를 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제산오가 대답하다니. 이연이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뚱했지만 오늘 처음 들어 보는 대꾸였다. 대답해 줘야 하나? ……난 아직 화났는데. 고민하는 사이 산오가 가소롭다는 듯 덧붙였다.

“네 공적을 빼앗지 않아도 내 업적은 넘쳐흘러.”

“……잘나서 좋겠네.”

그 말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익숙하다 못해 이제 겸손이라도 떨면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그래도 걱정 말아요.”

혜성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소곤대는 음성은 이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을 충분히 의식한 것 같았다.—주목을 끌지 않기가 더 어려운 얼굴들이긴 하다.—

“걱정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한테 제가 잘 말해 둘게요.”

“……뭘요?”

“뭐냐니, 당연히 두 사람 사귀는—”

“저희 헤어졌습니다.”

“예?”

앞뒤 없이 내뱉은 이연의 말에 혜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이 거짓말도 청산할 때가 됐다. 정색한 이연이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이연의 하관을 틀어막았다.

“조금 싸웠다고 그런 말을 하다니 마음이 다 아프군.”

연기 못하는 배우처럼 건조하게 중얼거린 산오는 상황을 곧장 정리했다.

“정이연이 공개 연애는 싫다고 하니 입 다물고 있어라.”

“아아…….”

아아는 무슨 아아야? 이연은 진실을 설파하기 위해—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진실은 아니지만— 버둥거렸으나, 산오의 힘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사이 혜성은 다 이해했다는 듯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믿어요. 두 사람 사귀는 건 꼭 비밀 지킬 테니까.”

그 확답과 동시에 이연의 주둥이도 해방되었다. 이연이 불만스럽게 산오를 노려보았다.

“야, 왜 이래? 지금쯤이면 헤어졌다고 해도 괜찮잖아.”

어차피 임시방편으로 쓴 핑계였으니 슬슬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마음이 편했다. 혜성은 물론이고 오랜 단골인 수아에게까지 거짓말을 계속하는 것도 영 찝찝했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닥거리자 산오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전 애인 뒤꽁무니나 따라다닐 정도로 한가해 보이나.”

“…….”

헤어졌는데도 이렇게 딱 붙어 다니는 건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렇다고 산오를 일부러 쫓아낼 생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연은 여전히 불퉁한 기색을 하고도 최종적으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납득은 했어도 불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산오야 상관이 없을지 몰라도, 이연 자신은 제산오를 좋아하지 않는가. 실제로 좋아하는데도 가짜로 사귀는 행세를 해야…….

“…….”

아니, 잠깐만. 이거…… 꽤 좋은 상황인가? 이연이 멈칫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산오와 사귀지 않는 상태로 연애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야? 산오 역시 본인이 먼저 사귀는 사이라고 능동적으로 구라를 쳐 놓은 만큼 어느 정도 받아 줄 책임이 있었다. 그럼 연, 연애를…… 연애하는 사람처럼 행동해도……. 눈동자가 흔들려 재빨리 수프로 고개를 처박은 이연의 귀가 조금 달아올랐다.

어차피 연막이잖아. 게다가 제산오가 먼저 한 거고. 넌 분명히 바로잡으려고 했다고.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마음속 어딘가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눈 딱 감고 한번 해 봐?

이연은 산오를 흘끔 바라보았다가, 누가 볼세라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혜성은 이연이 부끄러움이라도 탄다고 여겼는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려 주었다.

“뭐, 아무튼. 이연 씨는 랭킹도 좀 올라갔을걸요. 나중에 확인해 봐요.”

저녁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음식이 맛있는 건 말할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혜성 역시 꽤 좋은 이야기 상대였다. 그는 혜강만 끼어 있지 않다면 더없이 상식적이었으며, 이런저런 외부 출장이 잦았던 덕에 업계 분위기에 밝아 잡다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었다.

“아 참, 이번 초전력이 미뤄질지도 모른대요.”

“네? 왜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내부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나 봐요. 얼마 전에 초관청에 잠깐 들렀는데 담당자가 거의 죽어 가더라고요.”

“그렇구나…….”

“아쉽게 됐죠. 저도 이번에 초전력까지 참여하고 다시 나가려고 했거든요. 잘못하면 타이밍이 안 맞아서 또 불참할지도 모르겠어요. 이연 씨는 나가요?”

“저야 뭐, 회사가 있으니까요. 가릴 처지가 안 돼요.”

“아, 하긴 그렇네. 제산오 씨는 정식 절차로 소속된 게 아니라고 했죠.”

혜성이 금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직종이라 추가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편했다.

“그럼 제산오 씨는 초전력 안 나가요? 저번에는 나갔나?”

무궁화 5단 경기는 비공개로 치러지기 때문에 관계자거나 같은 5단이 아니면 참여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같이 사는 이연이 추측하기로는 불참한 것 같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산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난 초전력에 참여하지 않는다.”

“어, 왜요? 그런 기회 잘 없잖아요.”

혜성이 의아하게 물었다. 이연 역시 동감하는 바였다. 산오의 능력은 변이종 전투는 물론이고 대인전에도 손색없는 파워를 자랑했다. 괴물들만 모여 있는 무궁화 5단끼리 겨루는 경기라니, 말만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산오는 별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정이연이 승단하면 생각해 보고.”

“오, 이번에 이태진 재판까지 마무리되면 이연 씨도 3단 승단 심사 제안받을 수 있을걸요? 잘됐네요.”

“3단 말고.”

“네?”

“다른 놈들은 관심 없어도 정이연 정도는 이겨 보고 싶거든.”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이연과 하는 초전력이라면 참여하겠다는 것. 혜성이 놀란 눈으로 산오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와, 제산오 씨 초전력 엄청 싫어하나 보네요.”

“야, 무슨……. 내가 5단까지 승단을 해…….”

이연이 혜성의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다행히 혜성은 제산오 씨가 이연 씨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 같다며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리는 것으로 보아 수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산오는 가끔 이런 식으로 이연에게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하곤 했다.

혜성은 술도 한잔하고 싶어했으나, 저녁 식사가 끝나 갈 때쯤 급하게 초능력관리청에서 호출이 왔다. 능력 있는 상급 헌터의 일상은 다 그랬다. 다음에 또 놀자며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드는 혜성과 식당 입구에서 헤어지고, 둘만 남은 산오와 이연은 얌전히 집으로 향했다.

혜성이 껴서 얼결에 대화를 튼 덕에 무려 이틀 동안 지속되던 냉전 상태는 풀린 지 오래였다. 터덜터덜 걷던 이연은 휴대폰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다가, 혜성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랭킹 페이지를 열어 봤다.

“……진짜네.”

이연이 휴대폰 화면을 붙들고 맹하게 중얼거렸다. 원래는 10만 위까지 표시되는 순위권 내에 들지 못해 검색조차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랭킹 페이지에 ‘정이연’을 검색하면 떠 있었다. 무려 23,035위다.

이런 걸로 랭킹이 몇만 계단이나 뛰어오르다니. 이제까지 이런 수치에 신경 써 본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신기했다.

“네 덕분에 랭킹이 다 올라 보네.”

이연이 피식 웃었다. 산오의 시선이 이연이 쥐고 있는 휴대폰 액정에 슬쩍 닿았다.

“네가 한 일이니까.”

“무슨 소리야, 같이 한 건데.”

“아니, 네가 한 거야.”

그 어투가 묘하게 단호해서, 이연이 의아하게 산오를 올려다보았다. 산오는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김철재가 널 칼로 찌르고 도망치려고 했을 때, 난 그놈을 죽이려고 했다.”

“…….”

“네가 죽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장담할 수 없었겠지.”

그의 목소리는 평연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서늘하게 들렸다.

하지만.

“너 사람 죽인 적 없잖아.”

이연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같이 다니면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산오는 걸핏하면 가차 없이 방해되는 사람을 모두 죽여 버릴 것처럼 살벌하게 굴었지만, 실제로 인간에게 치명상을 입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김 박사도, 이세은과 이세미도, 그리고 이태진에게도. 그들을 단번에 절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굳이 죽이는 대신 무장 해제 후 제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은 현대 문명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변이종이 판치는 세계가 되었어도 변함없는 윤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오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날것의 짐승 같은 느낌이 났기 때문에, 퍽 의외기도 했다.

“너도.”

“응?”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이연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산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도 안 죽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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