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뭐, 뭐야? 왜 이렇게 당당하게 남의 휴대폰을 보는 거야?”
“보면 안 되는 대화라도 했나?”
“아니, 그건 아닌데.”
기본적인 예의라는 게……. 이연은 그렇게 말하려다 산오에게 그런 개념 따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뭐.”
산오는 당연히 대답을 들어 마땅하다는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았다.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반발심이 좀 수그러들었다. 이연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니, 혜성 씨가 밥 사 주기로 해서…….”
일전에 술 먹으면서 하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혜성은 얼마 전 진짜로 연락해 왔다. 평이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한번 가 보자는 것이었다.
맛있는 밥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냉큼 수락한 이연은 바로 정확한 일자를 잡았고, 그간 이런저런 사건으로 바쁘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벌써 약속 전날이었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제부터 뭉치 일로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혜성이 미리 연락해 줘서 다행이었다.
“밥 정도는 직접 사 먹어.”
“아니, 야. 내가 봤는데 거기 되게 비싸더라고.”
혜성의 이야기를 듣고 식당 검색을 해 봤다가 코스 가격을 보고 눈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그렇게나 비싸단 말이야? 잠깐 잊고 있었던 기대감이 슬그머니 차올랐다. 이연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얻어먹을 수 있을 때 얻어먹어야지.”
산오가 돼지 새끼를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카드도 있지 않나.”
“아, 맞아.”
말 안 했으면 계속 잊고 있을 뻔했다. 이연이 제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유독 반질해 보이는 까만 카드는 모난 정처럼 눈에 띄었다.
“자.”
“……뭐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신용 카드에 산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할 수 있는 큰 지출은 거의 다 했잖아.”
안 그래도 슬슬 반납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가구나 생필품, 심지어 초능력자 장비도 산오의 카드로 여러 번 결제한 참이다. 종찬이 카드 이야기만 나오면 바르르 떠는 모습을 봤을 때 내역도 어마어마하게 나온 모양이었고…….
이 정도면 산오와 함께 사는 값은 충분히 받았다. 사실 계산해 보면 정량보다도 훨씬 더 비싸게 받았을 것이다.
“이제 괜찮아.”
산오의 시선이 느릿하게 카드와 이연을 훑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산오에게 이연이 받으라며 한 번 더 재촉하려고 할 때였다.
“필요 없어.”
“어?”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히 받아 들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냉담한 목소리에 이연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착각인가? 산오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싸늘해진 것 같았다.
“내가 준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지랄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카드니까…….”
“알 바 아니다. 쓰든 안 쓰든 네 마음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산오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 버렸다.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얼결에 뒤에 남겨진 이연이 황당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카드를 뺏으려고 한 줄 알겠다.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주겠다는데 안 받을 건 또 뭐야……. 산오의 생각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제산오!”
불러도 대답조차 없었다. 어찌나 빠르게 걷는지, 보폭을 넓히다 못해 달리는 수준이 되어서야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왜 그러는데?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겨우 산오의 옆에 선 이연이 따지듯 물었지만, 산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여튼 당최 속을 알 수가 없다. 한 번만이라도 제산오 속을 뒤집어 까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연은 속으로 한껏 투덜댔다. 안 그래도 뭉치 때문에 심란한데……. 생각 같아서는 두 녀석 다 콱 쥐어박고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호령을 내리고 싶었다.
두 사람은 집에 같이 돌아오긴 했으나, 산오는 자정을 넘긴 다음 날까지도 내내 뚱한 태도를 유지했다. 분위기를 좀 풀어 보려고 입이라도 열라치면 싸늘한 눈길로 노려보는 탓에 무서워서 말도 못 거는 지경이었다.
영문 모를 냉대가 지속되자 나중에는 이연 역시 짜증이 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많이 썼다고 눈치 주는 건가? 그래서 지금이라도 돌려주는 거잖아. 그렇게 아까우면 갚으면 될 거 아냐. 온갖 불만이 부글거리며 마음속에 쌓였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크게 싸우고 싶지도 않았고, 산오의 매서운 눈빛이 저를 향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하루 종일 대화 없이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간간이 혜강이 말을 건 것을 제외하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이연은 인사도 없이 사무실을 뛰쳐나와 혜성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적어도 혜성과 밥을 먹는 동안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내내 얹힌 것처럼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혜성과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에 와 보니 산오가 같은 테이블에 대뜸 앉아 있었다.
뭐…… 뭐야? 당황한 이연이 혜성을 바라보았지만, 혜성은 오히려 의아한 기색이었다.
“이연 씨가 부른 거 아니에요?”
“아닌데요…….”
맹한 대답에 혜성 역시 조금 놀란 듯 산오를 보다가, 일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냐며 태평하게 수긍했다. 이연은 그 말에 산오도 해당되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이 있었지만, 내내 무시해 놓고 이제 와서 말 걸기 어색해서 짚지 않고 대충 넘어갔다.
세 사람의 사이로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반짝이는 조명이 테이블에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냈다.
혜성이 호언장담한 대로 추천한 가게는 인테리어부터 메뉴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제 고작 에피타이저 두어 가지만 나왔는데 이미 이연의 마음속에서 생애 최고였던 음식 랭킹을 갱신하고 상위권을 나란히 차지했다.
게다가 남의 돈이다. 꿀맛도 이런 꿀맛이 없었다.
“이연 씨 요즘 상급 헌터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거 알아요?”
“예?”
이연이 수프를 떠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 나? 말없이 진위를 확인하듯 기울어지는 고개에 앞에 앉은 혜성이 긍정하듯 끄덕였다.
“제산오 씨는 원래 유명했으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옆에 앉은 산오에게로 슬쩍 향했다. 산오는 심드렁한 얼굴로 수프를 뒤적이다 뭘 꼬나보냐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혜성과 이연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란히 눈을 돌렸다.
“제가 왜요?”
그새 수프를 한 번 더 떠먹은 이연이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이연은 고급 레스토랑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한 몸처럼 들고 다니던 고글과 가방을 과감히 포기했다. 품이 큰 니트에 검은 슬랙스를 입은 모습은 평소의 캐주얼한 복장보다는 훨씬 제 나이로 보였다.
그래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청년을 나긋하게 바라보던 혜성이 찬찬히 설명하듯 읊었다.
“글쎄, 안 유명해지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요? 간도 크게 대형 불법 연구소 두 개를 해먹은 김철재 잡았지, 동업자인 이태진도 잡았지. 최근에는 다발신도 잡았잖아요. 그것도 보주를 부쉈다면서요?”
듣고 보니 뭐가 많긴 많았다.
“무궁화 4단이 했다고 해도 놀랄 판에 이연 씨는 무궁화 2단인 데다가, 소속 회사가 큰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걸 전부 제산오 씨랑 같이 했잖아요. 당연히 그 2단 헌터 누구냐고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제산오 씨 혼자 다니는 거야 유명하다 못해 상식 수준인데.”
4년 전 초능력관리청에서 대대적으로 불법 연구소를 소탕했을 때, 불법 실험에 관한 특별법이 함께 개정되었다. 인간, 특히 초능력자를 상대로 실험했을 경우 주동자들의 처벌 수위는 어마어마했다.
특히 증거를 대부분 살려서 잡은 김 박사와 이태진의 경우, 재판은 형식이고 실형이 거의 확정이었다. 재판이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사회에 다시 나올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이런 사례가 흔한 건 아니기 때문에, 한 놈 잡힐 때마다 업계가 떠들썩해지긴 했다. 이연 역시 이전에 다른 범죄자들이 잡혔을 때 초능력관리청에서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불법 연구자를 열 손가락도 넘게 잡아들인 산오가 헌터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거였고.
그렇다고 해도…… 내 이름은 왜 퍼졌지? 이연이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다가 산오를 바라보았다.
“네 이름으로만 올린 거 아니야?”
별생각 없이 물었다가 아차 했다. 어차피 무시당할 건데 왜 말을 걸었지. 후회하기도 전에, 놀랍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