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개소리하지 마.”
비장한 선언은 1초 만에 무시당했다. 넌 또 왜? 이연이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산오는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집에 사람을 들이려고 하다니, 제정신인가?”
“……너도 있잖아.”
“그놈은 의사도 아니고, 상급 변이종 전문도 아니야. 별 도움도 안 돼.”
그 후로도 산오는 이 늦은 시간에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게 제정신이냐는 요지의 말을 투덜대면서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정이연이 아니다. 이연은 화장실에 가는 척 재경에게 연락을 몰래 시도했으나, 재경은 자고 있는 건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그걸 산오에게 들켜서 휴대폰을 압수당했다. 비극의 연속이었다.
견디다 못한 이연이 폭발했다.
“우리 뭉치가 눈이 먼 거면 어떡해!”
그 말에 산오는 손을 까딱였다. 뭉치 근처의 바닥이 꿀렁이더니 철 가시가 튀어나왔다. 뭉치는 단번에 몸을 일으키고는 번개를 내리꽂아 모든 가시를 박살 냈다.
“멀쩡한 것 같은데.”
“……밤사이 집 밖으로 탈출해 버리면 어떡해?”
“네가 잊었나 본데, 저건 청호야.”
산오가 서늘한 눈을 돌려 뭉치를 흘끗 바라보았다.
“나간다고 하면 집 안에 잡아 둘 수단이 있을 것 같나?”
“…….”
이연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산오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은 저도 그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어떤 거든 좋으니 뭉치가 저렇게 된 원인을 찾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연을 꺼리게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싫어진 건가?”
이연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대답 없는 질문은 금세 공중에 흩어졌다.
뭉치는 아까보다는 진정했는지 식탁 아래에 배를 깔고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더 이상 공격 태세를 갖추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저만 보면 안겨 들던 뭉치가 이제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대놓고 당하는 무시는 제법 심적 타격이 컸다.
그날 밤, 뭉치는 안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밤 내내 적대했던 태도를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뭉치가 매일 침대에서 잔 것도 아니었는데도 괜히 마음이 허전했다. 모르는 사이에 뭉치의 온기와 함께 잠이 드는 게 꽤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이연은 잠이 잘 오지 않아 자세를 계속 바꾸며 몸을 여러 번 뒤척였다.
“야. 자라고.”
인내심이 다한 산오가 짜증스레 으르렁댔다. 이연이 억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니, 옆구리가 허해서.”
“누가 보면 십 년은 같이 산 줄 알겠군.”
“……그러게 말이다.”
계속 혼자 잤으니까 곧 익숙해지겠지. 이연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 꼴을 마뜩잖은 눈빛으로 노려보던 산오가 팔을 뻗었다. 뭔 놈의 힘이 이렇게 센 건지 가볍게 끌어당기는 동작에도 이연은 종잇장처럼 딸려갔다.
“빨리 자.”
제 옆구리에 이연을 딱 붙인 산오는 반듯하게 누운 자세에서 이연이 불편하지 않도록 한쪽 팔만 올려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잠든 듯 그 후로 말이 없었다.
“…….”
야……. 네가 어떻게 뭉치랑 똑같냐……. 이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심 없는 행동인 걸 아는데도 기분 좋게 속도를 올리는 심장이 민망했다. 들리진 않겠지? 괜히 뒤척댔다가 산오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가만히 숨만 고르고 있는데, 옆에 누운 산오의 몸이 호흡에 따라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자식, 이 상황에 잘도 잠이 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이렇게 딱 붙어서 자는 건 조난당했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산오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지만, 마음이 술렁이는 건 비슷했다. 아니, 좀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잠이 안 왔다. 아무래도 오늘 잠자는 건 글렀다. 이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은근슬쩍 몸을 산오 쪽으로 돌려 이마를 비볐다. 뜨겁다 싶을 정도의 온기는 더웠지만, 그렇다고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
“형, 오늘 얼굴에서 빛이 나네?”
혜강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다 말고 웃으며 인사했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이연이 머쓱하게 대꾸했다.
“어어……. 좋은 점심.”
잠이 안 오긴 개뿔, 누구보다 푹 잤다. 아침밥 당번이었는데 일어날 생각도 안 해서 산오가 멱살 잡고 깨울 정도였다. 이연이 덩그러니 침대에 앉아 미적대며 잠을 깰 동안 산오는 이미 샤워까지 마친 말끔한 얼굴이었다.
아침 준비를 하면서 슬쩍 살펴보니 뭉치는 밤사이 부엌에서 거실 구석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그림자처럼 앉아 이연을 노려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살벌했다. 자고 일어나면 좀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이연의 기대가 무참히 부서진 셈이다.
그 후로 산오와 이연이 출근을 하기 위해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뭉치는 웅크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경 씨가 왜 연락을 안 받지.”
이연이 투덜댔다. 출근하며 재경에게 뭉치의 상태에 대해 장문의 읍소 메시지를 남겼는데, 바쁜지 아직까지 대답이 없는 것이다.
“재경이 형은 왜?”
혜강의 물음에 이연이 기다렸다는 듯 어제 뭉치의 행동 변화에 대해 하소연했다. 혜강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좀 이상하긴 하네. 뭉치를 위협하기라도 했어?”
“아니!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연이 억울한 얼굴로 펄쩍 뛰었다. 이어서 뭉치와 형성한 끈끈하고 다정한 유대를 줄줄 설파하는 연설이 이어졌다. 옆에서 듣던 산오가 코웃음 쳤다.
“감동적이라 눈물이 다 나는군.”
그럴 줄 알았지만, 산오는 뭉치가 본인을 무시하든 소파에서 춤을 추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 둘이 별로 안 친하긴 했다.
“야, 그래도 걔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원래라면 이연의 옆구리에 비비적대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데, 한나절 내내 앵돌아져 조용한 것을 보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뭉치는 음식물을 먹지 않으니 맛있는 걸 사 가지고 들어가도 소용이 없고……. D.S 씨한테 부탁해서 새로운 장난감을 개발해 달라고 할까? 아니면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연의 뺨에 곱지 않은 시선이 날아들었다.
“아주 정성이야.”
“뭐가, 또.”
“누가 보면 진짜 반려동물인 줄 알겠어.”
산오가 심술궂게 빈정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더니, 또 뭐가 저렇게 화가 난 거야? 당최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다. 투덜대던 이연이 잠깐 멈칫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황급히 꺼내 보니 기다리던 재경의 연락이었다.
당재경뭉치가 갑자기 사나워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