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64)화 (164/250)

#164

악몽코끼리의 환각은 대량으로 노출될 경우 정신을 모조리 파괴한다. 이연은 헌터니 진행이 느리긴 했겠지만, 결말은 같을 터였다. 반드시 죽는다.

재경은 망설임 없이 제 이름을 부르며 검은 문 안으로 들어서던 얼굴을 등질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이연은 두서없는 말에 설명을 요구하는 대신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재경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귀가 조금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그즈음, 재경의 품에 안겨 있던 보주가 완전히 빛을 잃었다. 파괴된 에너지 원천은 연약하게 바스라졌다. 파사삭……. 잔해가 복도 바닥에 허망하게 날렸다.

“이제 나갈 수 있는 건가? 넌 어떻게 들어왔어?”

뒤늦게 산오를 돌아보며 묻자, 산오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바닥이 즉시 뻥 뚫리며 아래층이 나타났다. 평소처럼 광물을 조종한 게 아니라 그냥 다발신 몸통에 억지로 구멍을 낸 것 같았지만, 밖으로 나갈 수만 있으면 뭐든 상관없었다. 오오, 하고 감탄한 이연이 자연스럽게 산오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회의 제산오 엘리베이터 이용 경험으로 인한 본능이었다.

재경까지 끌어당겨 가까이 서자, 산오는 이연의 팔을 반대편으로 잡아당겨 재경과 떨어트렸다. 산오를 사이에 두고 재경과 나란히 세우는 것을 보니 본인 중심의 원형으로 능력 쓰는 게 편한 것 같았다. 태평하게 생각한 이연이 건너편의 재경에게 농담을 건넸다.

“얼결이지만 이걸로 의뢰를 완수했네요.”

“어? 어어, 그러네. 직접 겪었으니 보고서 쓸 말은 많겠다. 저기, 금액은 계산해서 보내 주면 내가 내일…….”

“특별히 돈은 받지 않을게요.”

“어?”

재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연이 씨익 웃었다.

“그, 그래도 이연 씨 고생했는데…….”

재경이 머쓱하게 웅얼거렸다. 방금 사건을 겪으며, 재경은 이연이 단순한 2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원래 설명했던 능력과 운용 방식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걸 코앞에서 봤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게다가 산오의 정체까지도 얼추 눈치챈 상태였다. 한 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지 몰라도, 벌써 두 번째였다. 이 도시에서 그런 식으로 능력을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무료로 쓰기엔 민망할 정도로 고급 인력들인 데다가, ……이제는 이용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우물쭈물 대는 재경을 빤히 바라보던 이연이 툭 던졌다.

“재경 씨, 의뢰하러 온 거 아니었잖아요.”

양손 가득 무겁게 들고 온 먹을거리, 기쁜 눈으로 보고한 근황, 새로운 직장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주던 얼굴. 정작 본론이어야 했던 의뢰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말. 이연이 해 보지 못한 경험을 하러 가자고 기꺼이 나선 행동까지.

이연은 그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을 알고 있었다.

“그냥 취직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순한 얼굴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끼리는 그런 거 주고받잖아요.”

건물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자리를 계속 맴돌던 혜강이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걱정을 많이 했는지 미간에 인상을 썼던 자국이 나 있었다.

“다들 괜찮아?”

“어어. 걱정했어?”

“말도 마. 거기서 살림 차린 줄 알았어.”

10분이 지나도 두 사람이 나오지 않자, 혜강과 산오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2층으로 올라가 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길이 막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산오의 능력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무궁화 5단의 힘으로도 쉽게 뚫리지 않는 공간 지배 변이종. 상급 변이종만 상대해 왔던 산오는 단번에 정체를 알아차렸다.

겉은 건물처럼 보였지만 그건 변이종의 몸체였다. 산오가 조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외벽을 부수고 강제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다발신이 원체 방어에 특화된 변이종인데다가 보주까지 가지고 있어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차선책—도심에서 쓰기엔 너무 요란해 미뤄 두었던—으로 아예 건물 자체를 무너트려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산오는 변이종의 힘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순식간에 달려가 틈새를 비집었고,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한껏 지저분해진 재경이 공격당하기 직전인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

이연과 재경의 설명을 번갈아 듣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혜강은 그래도 제때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다행이라며 두 사람을 토닥였다. 재경이 그제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며 엄살을 부리고, 혜강이 폭탄 맞은 것 같은 머리를 보니 그런 것 같다며 놀렸다. 분위기는 천천히 평소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발신은 저렇게 놔둬도 괜찮은 거야?”

“뭐, 보주도 사라졌고, 악몽코끼리도 처치했고……. 초관청에 긴급 신고 넣었으니까 금방 올 거예요.”

이연이 휴대폰을 흔들었다. 다발신의 내부에서 나오자마자 휴대폰은 쌩쌩 잘 터졌다.

“와, 그러고 보니 낮은 등급인 악몽코끼리가 보주까지 있는 다발신을 농락했네. 이거 뭉치 때랑 비슷하지 않아?”

혜강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러게. 이연이 고개를 주억였다. 무리불새가 청호의 보주를 가지고 도망간 적도 있고, 조금 전 같은 상황도 있고. 변이종 등급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편의대로 나누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다.

“왜? 뭉치 때는 뭐였는데?”

“아, 전에 무리불새가 뭉치 보주를 가지고 도망가서 뭉치가 쫓아왔었거든요. 도시 한복판에 2급 변이종이 튀어나와서 기절할 뻔했다니까요.”

이연이 가볍게 설명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 재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보주를 가지고 도망가? 어떻게?”

“뭐 어떻게 했는지는 저도 모르는데, 어쩌다 빼앗긴 모양이에요. 무리불새가 좀 까마귀 같은 성질이 있어서…….”

“아니, 그러니까. 빼앗길 수가 없는데?”

“네?”

이연이 의아하게 되묻자, 재경은 조금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연구자 특유의 설명 톤이었다.

“보주는 변이종의 핵이잖아. 당연히 변이종 안에 있어야지. 방금 다발신에게서 보주를 빼앗을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있던 곳이 변이종 내부여서고. 그게 무슨 휴대폰도 아니고, 보주를 외부로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변이종이 어디 있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당혹을 느낀 이연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재경이 흠,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보주를 가진 변이종은 이제까지 표본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주 특징은 대부분 비슷한데……. 특히 청호는 전형적인 물리전투종이고. 이건 좀 신기하네. 나도 찾아볼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새벽이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재경과는 각자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바로 헤어졌다. 혜강까지 집에 보내고, 산오와 이연은 천천히 밤길을 걸었다. 산오는 웬일로 얌전히 걸을 뿐 엘리베이터를 쓰지 않았다.

이연은 훔쳐보듯 잘생긴 옆얼굴을 흘끗했다.

‘그래도 살다 보면 우선순위가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이연의 우선순위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연의 우선순위는 이연의 우선순위였기 때문에 죽었다.

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어떤 변명과 핑계를 가져다 대도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원인이 저라는 사실은 언제 떠올려도 끔찍했다.

산오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건 그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산오는 부모님과 달랐다. 제가 살린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단단하게 버텨서 살아갈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게 잘될 것 같다는 희망이 불쑥불쑥 들었다. 그래서 좋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사귀고 싶어 하는 건 달랐다. 만약에, 산오가 부모님만큼 좋아졌는데 헤어진다면? 꼴도 보기 싫다며 차인다면? ……죽는다면?

이연은 또다시 그만한 상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뭐, 사귀고 싶다고 사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백하는 상상은 해 본 적 없지만, 틀림없이 어색하고 서먹할 것이다. 그렇겠지. 십 년 동안 저를 찾을 생각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고 하는데……. 산오라면 듣고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잠을 덜 잤냐며 비웃을지도 몰랐다.

어쩐지 그런 장면은 직접 겪기라도 한 것처럼 그려 내기가 쉬워서, 이연은 머쓱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로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산오를 볼 때마다 술렁거리는 마음은 이연이 혼자 속으로 안고 가도 됐다.

오히려 그냥, 이대로 쭉 사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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