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63)화 (163/250)

#163

카앙!

거친 소리에 화들짝 놀란 악몽코끼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가, 보주가 혼자 움직이는 기현상을 발견하고 놀라 도주했다. 제 보주를 빼앗긴 것을 안 다발신이 벽을 꿀렁이며 다리를 뻗었다. 두꺼운 빨판이 달린 촉수가 보주를 향해 쇄도했다.

‘으악!’

빠르게 짓쳐들어오는 공격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재경이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갔다. 첨벙거리는 발소리가 벽을 울렸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모습을 드러낸 도둑을 두꺼운 문어 다리가 맹렬하게 추격했다.

정신없이 내달리며 재경은 계속 난간에 보주를 부딪쳤으나, 보주는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왜 안 부서져? 재경이 신경질적으로 난간을 치는데, 조금 전과 다르게 푹신한 느낌이 났다. 다발신이 공간 구현을 풀어 제 보주를 보호하는 거였다.

설상가상으로 수분을 한계까지 흡수한 겉옷이 점점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고민을 오래 할 시간도 없었다. 재경은 이를 악물고 다시 복도로 뛰어 들어갔다. 첨벙! 마지막 발걸음에 검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일단 검은 강에서 벗어났으니 한숨 돌리긴 했지만,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재경의 위치를 인식한 다발신이 복도를 점점 조여 왔다. 꿈틀대는 문어 다리가 벽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어떡하지. 재경이 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다발신의 의지에 따라 말랑해질 수 있었다. 이걸 깨려면 단단한 게 필요한데, 대체 어떻게 해야…….

‘…….’

재경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주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주를 쥐고 있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다발신의 권역에서 지배를 받지 않는, 그리고 아마 꽤 단단할 유기체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설마…… 아니죠?”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이연이 경악하며 끼어들었다. 설마, 재경이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그러나 재경은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가만 보니 이마에 혹 같은 게 나 있었다.

“……그땐 그 방법뿐이라고 생각했어.”

어차피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곧 다발신에게 잡혀 찌부러질 운명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재경이 보주를 제 머리통에 갖다 박았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자해쇼에 다발신도 당황한 모양인지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재경이 찡하게 울리는 두개골 통증을 간신히 참으며 보주를 살폈다.

당연히 턱도 없었다. 인간의 두개골이 변이종보다 단단했다면 적공이 등장했을 때 초능력자가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금 하나 가지 않은 보주를 꾹 쥔 재경이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안 돼. 뇌를 통째로 두드리는 두통보다도 강한 무력감이 해일처럼 쏟아졌다.

재경의 위로 길쭉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침입자가 기상천외한 짓을 다시 벌이기 전에 보주를 빼앗으려는 움직임이었다. 어둠이 다가오자 재경은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무언가를 툭 건드렸다. 뭐, 뭐야? 재경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뭔가 했더니 악몽코끼리였다. 조금 전 어디로 도망갔나 했더니, 복도의 끝으로 달려 온 모양이었다. 네 발에서 항상 풍겨 나오던 검은 연기는 물에 담겨 있던 탓인지 축축하게 젖어 잠잠했다. 본능적으로 그것부터 확인한 재경이 안도의 숨을 짧게 내쉬었다.

악몽코끼리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채로도 재경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는 재경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다발신의 지배를 받지 않는 아주 단단한 생물.

결심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경은 온 힘을 다해 보주로 악몽코끼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키이이!

악몽코끼리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재경이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퍼억! 아까보다 훨씬 강한 소리를 낸 보주에서 파삭, 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됐다!’

머리통에 작렬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악몽코끼리를 뒤로한 채 재경이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악몽코끼리는 키이익, 하는 비명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었다.

상급 변이종의 보주는 에너지 원천이다. 그걸로 정면으로 얻어맞다 못해 깨져서 새어 나오는 에너지까지 받았는데 중급 변이종인 악몽코끼리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악몽코끼리의 몸이 천천히 부스러졌다. 젖은 발도, 동그란 몸통도, 기다란 코도.

곧 조그만 변이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재경에게로 다가오던 문어 다리가 멈칫하더니 꿈틀댔다. 다발신의 힘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 하나를 못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주춤한 다리가 재경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제 보주를 부숴 버린 자에 대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그 공격은 재경에게도 똑똑히 보였지만, 이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재경이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보주가 깨졌으니까, 적어도…….

그런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문어 다리가 저를 꿰뚫거나, 후려치거나, 조여서 구겨 버려야 했는데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뭐, 뭐지? 재경이 잔뜩 힘을 줘 감은 눈을 슬그머니 떴다.

눈앞에 커다란 등이 서 있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 뒤로 검고 날카로운 가시가 문어 다리를 꼬챙이처럼 찔러 벽에 박아 넣은 것이 보였다. 잔뜩 꿀렁이는 벽과 바닥을 분리시키듯 넓은 철판으로 공간을 넓힌 산오는 짧은 혼잣말 후 고개를 돌려 재경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눈동자에 재경이 흠칫 몸을 떨며 쥐고 있던 보주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강렬한 시선은 곧 다발신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보주를 잃은 변이종은 눈앞의 존재를 제가 절대로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연신 움직이던 벽과 바닥이 급격히 잠잠해졌다. 마치 납작 엎드려 항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정이연은.’

‘……아! 그, 그게. 저 문으로…….’

재경이 검은 문을 가리켰다. 산오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활짝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별 망설임도 없이 다가가는 모습에 재경이 허둥지둥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저기 들어가면 안 돼. 다발신이랑 악몽코끼리가 합쳐져서 아마 환각 상태가…….’

‘그런 곳을 정이연은 멍청하게 들어갔단 말이지.’

‘……아니, 이연 씨는 거기까지는 모르고…….’

우물쭈물 변호해 주는 사이 산오가 손을 뻗었다. 길쭉한 손가락부터 두꺼운 팔뚝까지 얇은 철로 덮이는 모습은 너무나 초현실적인 장면이라, 재경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산오의 어깨와 팔에서 가느다란 줄이 튀어나왔다. 쇠로 덮인 피부와 같은 색의 밧줄은 순식간에 여러 가닥으로 늘어나더니 문 너머로 사라졌다. 산오는 반걸음 더 다가가 문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가볍게 휘젓던 손은 무언가를 곧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벼운 몸이 어둠 속에서 끌려 나왔다.

“재경 씨가…… 다발신의 보주를 부순 것도 모자라 악몽코끼리까지 죽이다니. 역시 재경 씨도 자기 목숨이 중하긴 하군요.”

이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면서도 퍽 아까웠겠다 싶었다. 다발신도 희귀하고, 악몽코끼리도 희귀한데, 심지어 그 둘이 결합까지 했다지 않은가. 문외한인 이연이 보기에도 흔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 녀석은 자신이 죽을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재경의 투덜거림 대신 돌아온 것은 의외의 목소리였다. 덤덤하게 내뱉은 산오가 재경을 흘끗 바라보았다.

다발신의 공간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산오는 재경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 재경에게 억울해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깃들어 있던 것은 일말의 안도였다.

“보주를 깨트리면 변이종은 약해져.”

중독 상태인 다발신이 약해지면 이연을 가두고 있는 공간 지배력 역시 약해진다. 재경은 아마 그 정도면,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환각이 약해지면 너는 얼마 걸리지 않아 뚫고 나올 테고, 그럼 넌 살겠지.”

이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산오는 지금, 재경이 오직 이연을 살리기 위해 변이종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왜…….”

재경 씨는 변이종 좋아하잖아요……. 바보 같은 물음이 멍하니 흘러나왔다. 그 말에 재경이 인상을 와락 썼다.

“그, 그냥 궁금할 수도 있다고 했잖아.”

“네?”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야.”

솔직히 재경 자신도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굴었는지 잘 몰랐다. 재경은 여전히 변이종을 좋아하고, 인간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다른 사람과 왔다면, 아니, 그냥 혼자 오기만 했어도 그냥 가만히 있었을지도 몰랐다. 재경에게는 그게 더 생존 확률이 높았다. 괜히 다발신을 건드려서 전투라도 하게 된다면 재경이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각 속으로 사라진 이연을 그대로 버려둘 마음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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