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62)화 (162/250)

#162

“헉!”

이연이 눈을 번쩍 떴다. 물에 한참 잠겼다가 막 벗어난 사람처럼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눈을 몇 번쯤 깜빡이며 점점 안정을 찾았다. 새까맣게 보이던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뒤늦게 등 뒤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옷깃을 틀어쥐고 있는 단단한 팔, 저보다 훌쩍 큰 키.

“……제산오?”

아니, 어떻, 나 안 그래도 너를 찾아야겠다고, TV에 나와서……. 횡설수설하는 목소리는 이내 뒤죽박죽된 기억이 하나둘 정렬되며 점점 작아졌다. 어둡고 낡은 복도. 창문에 비치는 하얀 달. 담력 체험. 검은 문.

그리고 제산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TV 속에 있던 영웅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하얀 얼굴에 팔을 뻗었다.

“울었나?”

그 말을 듣고서야 이연은 제 눈가와 뺨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턱이 움칫 떨리며 산오의 손을 밀어내듯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지난 팔 년 동안 울어 본 기억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는데, 유독 산오 앞에 있을 때만 이런 일이 생겼다. 어쩐지 민망했다.

“와, 나 완전히 동화됐었네…….”

눈물을 다 닦을 때쯤, 이연은 완전히 상황 파악을 마쳤다. 허탈한 중얼거림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이미 겪은 일이었고, 멍청한 흐름이라고 여기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정연에게 이입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별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TV에 산오가 나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환상은 소름 돋을 만큼 과거와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간에 이연이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악다구니를 쓴 정도. 과거에는 빠져나오는 게 이것보다 훨씬 느렸다. 능력을 해제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이연이 고개를 작게 흔들고는 물었다.

“넌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상황은 어떻게 알았고?”

이연은 그때까지도 제 옷을 꽉 쥐고 있던 산오의 손도 조심스레 떼어 냈다.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목이 슬슬 졸렸다. 산오는 그대로 찢어 버릴 것처럼 잡고 있던 것치고는 의외로 쉽게 풀어 주었다.

“나올 생각을 않길래.”

“그냥 들어올 수는 있었어?”

“아니.”

가볍게 고개를 저은 산오가 슬쩍 턱짓했다. 이연은 멀뚱히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기겁했다.

“아니, 재경 씨! 괜찮아요? 뭐야? 울었어요? 재경 씨도 환상 본 건가? 괜찮아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얼굴이 온통 꼬질꼬질해진 재경이 코를 훌쩍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고 있던 겉옷은 어디 갔는지 얇은 티셔츠 차림으로 바뀐 그는 머리통만 한 무언가를 품에 꼭 쥐고 있었는데, 누가 뺏어 갈세라 잔뜩 경계하며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연 씨, 킁……. 괜찮아?”

아니,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사람이 단시간에 저렇게 된 거야? ……단시간은 맞겠지? 이연이 순간 든 의문에 대답 타이밍을 놓친 틈을 타, 산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이 틈을 열었다.”

“틈을? 재경 씨가?”

이연이 놀란 눈으로 재경을 다시 바라보았다. 확실히 지저분한 행색이긴 했지만…… 무궁화 1단이 3급 변이종을 상대로 달려들었다고? 그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재경의 초능력은 투명화가 아닌가. 변이종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할 수 있긴 한 거야?

“다, 다발신은 자신의 몸 안에 우리를 가둬 뒀어. 그럼, 킁, 보주도 여기 어딘가에 있었다는 이야기야.”

그제야 이연은 재경이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는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니……. 그래도 전시해 두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다발신이 바보도 아니고, 침입자를 몸속에 넣어 놓고 먹이를 갖다 바치는 것처럼 보주를 함께 넣어 놨을 리가 없었다. 그 말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이연 씨, 내가 다발신 능력에 검은 물을 뿌리는 건 없다고 했던 거 기억나?”

“아, 네.”

“그게 힌트였어.”

재경은 이연의 근처에 계속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연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크게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고, 재경이 아무리 대답해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여기서 재경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쓰고 있는 게 아닌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갑자기 복도 여기저기를 뛰어다닐 때는 부딪치지 않게 피하느라 멀찍이 떨어져 서야 했다. 슬쩍 붙잡아도 봤으나 재경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던 이연은 마지막으로 문 앞에 섰다.

‘이연 씨, 잠깐…….’

‘재경 씨? 안에 있어요?’

아까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반드시 죽을 거라고……. 재경은 그를 말리던 것도 잊고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단단하게 빛나는 옅은 눈은 망설이는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벌써 죽어 있으면 안 돼요.’

뭐라 말릴 틈도 없이 훌쩍 걸어간 이연의 뒷모습은 문이 열리는 순간 안개처럼 사라졌다. 재경은 저 멀리서 팔을 어정쩡하게 뻗다 만 채로 어쩔 줄 모르고 멈춰 있었다. 어떡하지? 나도 들어가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며 문 쪽으로 한 걸음 다리를 뻗는데, 저 멀리서 꾸륵,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익숙한 소리는 복도 너머, 계단 쪽에서 들렸다.

멈칫한 재경이 몸을 돌려 그쪽으로 다가갔다. 검은 파도가 흐르는 계단은 여전히 짙은 액체를 뚝뚝 흘려보내고 있었다.

난간 사이, 까만 형체가 얼핏 보였다.

“악몽코끼리야.”

“……예?”

재경이 계단 위에서 본 것은 틀림없는 악몽코끼리였다. 이전에 근거리에서 몇 번이나 본 변이종이다. 헷갈릴 수가 없었다. 악몽코끼리와 비슷하게 생긴 변이종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었고.

“추측으로는 악몽코끼리가 어쩌다가 다발신 내부로 들어온 것 같아. 그런데 여긴 다발신 그 자체잖아.”

다발신은 순식간에 악몽코끼리가 뿜어내는 연기에 중독되었다.

“그럼 이게…….”

“원래 다발신이 가지고 있던 물 능력에, 악몽코끼리의 연기가 합쳐져서 검은 액체가 된 거야. 그래서 그 물에 닿으면 환각을 보는 거고.”

“하지만…… 전 닿지 않았는데도 재경 씨가 갑자기 안 보였잖아요.”

“악몽코끼리의 연기 대부분은 물과 섞였지만, 공기 중에도 미량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우리 둘 다 미약한 중독 상태가 되긴 했을 거야. 아마 우리가 본 창문 밖 풍경도 환각이겠지. 이연 씨한테 내가 안 보였던 것도 그런 이유일 거고.”

“그럼 재경 씨는요?”

“난…… 여기서부터는 가정인데. 아마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는 것 같아. 예전에 내가 악몽코끼리 놓아주려고 실험했던 척했잖아. 방독면을 쓰긴 했어도 완전히 막히지 않았을 수 있어. 변이종의 능력 체계는 지구의 환경과 동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재경의 설명은 거침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분석한 후 결론을 내린 얼굴이었다.

악몽코끼리가 있다면 검은 문에 뭐가 있을지도 대충 추론이 가능했다. 높은 확률로 악몽코끼리의 연기가 가득 들어 있겠지. 마치 구름에 파묻히듯 사라진 이연의 뒤통수를 생각해 보면 거의 맞을 것이다.

“악몽코끼리의 환각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술이야. 그러니까 거기에 중독된 다발신은 본능적으로 악몽코끼리를 가장 안전한 자리로 안내했을 거야.”

그제야 이연은 재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제 말을 이해한 듯한 얼굴을 보며,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주를 보관하는 장소.”

계단 쪽에 보주가 있다면 다발신이 그들을 복도로 유인한 것도 납득이 됐다. 제 심장에서 가장 먼 곳으로 사냥감을 데려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으니까.

재경이 알기로 다발신은 인간에 대한 적의나 공격성은 거의 없었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물론 환각에 중독이 된 상태니 장담은 할 수 없었지만……. 제발 굶어 죽기 전까지는 나갈 수 있길 기도하는 평화로운 방법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

재경은 이연이 사라진 검은 문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계단을 향해 걸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겉옷이 생활 방수가 된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겉옷을 찢어 검은 물에 닿지 않도록 양발과 다리를 단단히 감쌌다. 그래 봤자 생활 방수 수준이었으니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비 입고 올걸. 실없는 후회를 한 재경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호리호리한 전신은 점점 투명해지다가 이내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재경은 그 상태로 계단 위에 있는 악몽코끼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의 반 층 위에 있는 악몽코끼리와 그 위에 요요히 빛나는 검은 구체를 발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전처럼 공간이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침입자는 경계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몽코끼리의 네 발이 모두 물 안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재경이 흡, 하고 숨을 한껏 들이쉰 다음 멈췄다. 호흡이 다하기 전에 행동을 마쳐야 했다.

거친 물결 사이를 살그머니 헤치는 발걸음은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악몽코끼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두어 번 바라보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재경은 팔을 한껏 뻗었다. 동그란 에너지 원천이 두 손 가득 잡혔다.

만약 다발신의 보주가 깨진다면, 다발신의 힘도 약해진다.

그렇다면 공간에 대한 지배력 역시 약해질 것이다.

행동은 빨랐다. 보주를 들어 올린 재경은 곧바로 옆에 있는 난간에 강하게 갖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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