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
정연은 다시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병실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던 1인실에는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풀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한 침묵이 병실에 가득했다.
“……엄마, 아빠.”
가만히 불러 봐도 그리운 목소리가 대답해 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변호사는 정연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어려운 용어들을 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편하게 풀어준 친절함 덕에 정연은 부모님의 재산 대부분이 자신에게 상속되었으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악용되지 않도록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은행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변호사는 정연이 원한다면 생활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역시 수배해 주겠다고 했다. 정연이 고개를 젓자, 꼭 지금이 아니라도 괜찮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다.
당시에는 그게 참 부질없어 보였는데. 이연의 시선으로 다시 보니 부모님이 사전에 안배를 많이 해 두셨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이연은 받을 사람이 없는 인사를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변호사는 아주 친절하게도 정연이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연구소가 무너지기 직전에, 부모님은 정연을 데리고 포탈을 타는 데에 성공했다. 아슬아슬하게 3인 이동량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마 제 형을 위한 태진의 마지막 배려였겠지. 아니면 무관심이었거나.
두 사람은 바로 정연을 병원에 데려갔다. 정연은 기력 기진 판정을 받고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 년이 흘렀다.
십 년이나 흐른 지금에야 기력 기진에 대한 사례가 많이 연구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정보가 거의 없었다. 당시 상식으로 기력 기진은 의학의 힘을 기대할 수 없는 병에 가까웠고, 특히 정연처럼 오래 깨어나지 않는 사람은 국내에서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온갖 저명한 의사와 치유계 초능력자를 모셨다. 별 도움은 안 되었지만……. 시체처럼 누워 있는 아들을 보고 있다 보면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반년이 더 흘렀다.
먼저 쓰러진 것은 아버지였다.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오던 길에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진 아버지는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진단명은 스트레스성 심근병증. 다음 날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완치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버지 역시 안정을 위해 입원했다.
아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남편마저 생사를 오가게 되자 어머니의 정신 역시 서서히 한계에 다다랐다. 어머니는 두 사람을 성실히 간호했지만, 오히려 너무 성실한 것이 독이 되었다. 극도로 몰려 빠르게 쇠약해진 몸은 고단한 일정을 버티지 못했다. 세 가족이 모두 병상에 눕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본능적으로 직감한 모양이다. 그들이 입원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간호인보다 변호사를 더 먼저 고용했다. 빠르게 공증까지 마친 유언장은 금고에 모셔졌다.
변호사가 제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간 날, 부부는 이제는 쓰다듬어 주기 힘들 정도로 멀게 누운 아들을 보며 숨죽여 울었다. 정연아, 내 아들. 울먹이는 목소리 사이로 단편적인 단어만 줄줄 흘렀다.
세 사람이 입원한 역순으로 사망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머니의 사망 진단이 내려지는 것을 아버지는 바로 옆에서 들었다. 고통에 가득 찬 눈으로 눈을 감은 아버지는 다음 날, 영원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들이 깨어났다.
깨어나서 모든 사실을 듣고서는 솔직히, 나 때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연이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연구소가 무너지는 위험한 현장에 있을 일도, 속을 썩일 일도, 스트레스로 쓰러질 일도, 쇠약해질 일도 없었다. 사망의 원인은 분명했다. 정연을 간호하다가, 정연이 쓰러져서.
그 때문에 두 분이 돌아가신 거였다.
선량한 분들이었고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는 분들이셨다. 평생 즐겁게 사셨을 텐데.
나만 없었으면.
‘이왕 과거로 올 거면 좀 더 일찍 보내 줄 것이지.’
숨이 막힐 것 같은 죄책감 사이에서, 이연이 조용히 투덜거렸다. 기절해 있는 상태니 눈은 못 뜨겠지만, 귀는 열려 있을 것 아닌가. ……환각이어도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이 염치없는 건 알아도, 잔인할 정도로 충실한 현실이 진절머리 났다.
그 후로도 이연이 아는 과거는 계속 흘러갔다.
재활 훈련을 하고 퇴원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2년을 잠들어 있던 사람답지 않게 정연은 꽤 튼튼했다. 아무래도 초능력자, 그것도 5단급이라는 사실이 주효하게 작용한 것 같았다. 깨어난 지 고작 두 달 만에 정연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온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가족 구성원이 죄다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누가 있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 게 어쩐지 어색해, 정연은 괜히 큼큼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몇 달 동안 방치된 집은 곳곳에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이것도 이연이 봐서 그런 거고, 정연은 먼지 같은 건 신경도 안 쓴 채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 아빠. 정연은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정연아, 라고 돌아와야 할 대답은 없었다. 언제나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불러 줬는데. 정연아, 이정연. 사랑해. 이런 말을 해 줬었는데.
아니,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았다. 정연이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정연에겐 재활하며 내내 생각해 두었던 계획이 있었다. 퇴원을 했으니 실행할 차례였다. 그는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반가워하는 것이 역력한 남자에게 다짜고짜 본론을 내밀었다.
“혹시 이름을 바꿀 수도 있나요?”
어차피 저에게 이름을 줬던, 그것을 가장 불러 줬으면 했던 사람은 모두 사라졌다. 부모를 죽인 살인자. 정연은 부모님의 오점이었다. 아무리 후회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이름을 쓸 자격이 없었다.
깨끗한 연꽃이라니, 누가? 정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찬란하게 빛나던 사람들을 진흙탕으로 끌고 와 처박은 주제에.
다짜고짜 개명해 달라는 기상천외한 부탁에 변호사는 바로 달려왔다. 정연은 단호하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정연의 목적은 부모님에게서 제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억 조작이 가능한 초능력자라도 섭외해 정연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을 쓰고 싶었다. 부모님은 제가 없을 때가 더 완벽했다.
변호사는 이름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를 바꾸어 달라는 부탁에 조금 난감해했으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왔다. 협조적이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본질적인 이유를 듣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곧 정연에게 한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원하시는 이름이 있으십니까?”
정연은 고민했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쓸 염치는 없었지만, 아직도 너무 소중한 글자였다. 이정연이라는 세 글자 조합을 대신할 만한 것을 도무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소년을 끈기 있게 바라보던 변호사는 조심스레 조언을 건넸다.
“다른 글자가 끼어드는 게 싫으면, 정이연은 어떨까요?”
“……정이연이요?”
“네, 순서만 바뀌어도 다른 이름이 되니까요.”
그나마 가장 좋은 안이었다. 정연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새집에서 살고 싶다는 의사도 표시했다. 부모님은 놀랍게도 이런 예외 상황에 대해서도 예상을 하셨던 모양이었다. 집 매매 등의 거액을 융통해야 할 일이 생긴 경우, 변호사의 입회하에 가능했다. 혹시 다른 지역의 집을 원하느냐는 물음에 정연은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초호시요.”
원래라면 부모님과 초호시로 이사 가려고 했었다. 단순한 마음으로 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변호사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집을 새로 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네?”
“사실 이태민 씨가 이미 초호시에 구매해 둔 집이 있습니다. 어디…… 한 이 년쯤 전에 사 두셨더군요. 세를 주지 않은 빈집이라 바로 들어가셔도 상관없을 겁니다.”
이태민은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정연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초호시에 새로 사 둔 빈집. 그 의미를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초호시에 있는 곳으로 가자던 아버지의 얼굴이 손쓸 틈도 없이 불쑥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