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59)화 (159/250)

#159

“……재경 씨?”

멍하니 다시 불러 봐도 재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연의 목소리가 빈 공간에 메아리친 후에는 섬찟한 적막이 이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혼자 여기 온 것처럼.

“재경 씨!”

이연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일직선인 복도를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직접 뛰었다. 타다닥! 다급한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계단 근처의 구멍까지 다가가 확인한 후에야 이연은 재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떡하지. 어쩔 줄 모르고 인상만 찌푸리던 이연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사라진 재경이 있을 만한 곳은 상식적으로 하나 정도다.

굳게 닫힌 문은 무저갱처럼 새까맸다.

이연은 천천히 상황을 파악했다.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지는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런데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산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혹은 알고도 들어오지 못했다면,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건 시간 낭비였다. 안에 있는 이연 본인이 알아서 헤쳐 나가야 했다.

“진짜 불길하게 생겼는데…….”

작은 투덜거림도 잠시, 이연은 걸음을 옮겼다. 계속 서 있는다고 뭐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재경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다발신이 죽여서 끌고 간 게 아니라면 아직 기회는 있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문 앞에 선 이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재경 씨? 안에 있어요?”

대답은 없었지만, 그 정도야 예상하고 있었다. 하얀 모래가 자욱하게 이연의 곁에 모여들었다. 주인을 보호하듯 전신을 감싸며 일렁이는 모래에 사이로 팔을 뻗은 이연이 문고리를 단단히 잡았다.

“벌써 죽어 있으면 안 돼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익. 검은 문이 천천히 아가리를 벌렸다.

그다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귓가에 삑, 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연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뻐끔거렸으나, 잔뜩 잠긴 목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건조하고 텁텁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달칵.

그때였다. 저편에서 작은 문소리가 났다. 이연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히 제 몸인데 구속이라도 된 것처럼 옴짝달싹 않는 것이 이상해 인상을 찌푸리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차분한 발걸음은 타박타박 이연을 향해 걸어오다가 멈칫했다. 눈을 뜬 이연을 보고 놀랐는지, 곧이어 높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그쯤에서 이연은 이게 무슨 장면인지 깨달았다. 설마, 말도 안 돼……. 끔찍한 추측을 부정하는 동안 단정한 인상의 여자는 벨을 눌러 의료진에게 빠르게 보고했다. 사형 선고 같은 목소리가 이연의 귓전으로 날아들었다.

새하얀 침대. 주변에 잔뜩 늘어선 기기. 손등에 연결된 수액. 1인실 병실. 병원.

그는 이전에 이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이정연 환자 깨어났습니다!”

기력을 빼앗긴 지 2년 후, 이정연이 막 깨어났을 때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연은 제가 여기까지 온 경위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귀신 체험 하러 왔다가 웬 변이종 안에 들어와서, 재경 씨는 사라졌고 저는 문 안에 들어왔는데. 방금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기억 역시 생생했다.

‘다발신의 능력 중 하나인가?’

워낙 자료가 없다는 재경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아마 공격 대상의 정신과 관련된 공격인 것 같았다. 평생 마주쳐 본 적도 없는 다발신이 이연의 과거를 알 리가 만무하니까.

그렇다면 재경도 정신 공격에 당하는 중일 것이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중 다행이지만, 마음 놓고 안도할 만큼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 환상을 벗어나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나마 이연은 재경보다 사정이 나았다. 초능력 등급이 높을수록 신체 능력과 정신력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검증된 연구 결과다. 변이종 중에서는 정신 계통의 능력을 가진 변이종들이 종종 있었고, 정신 공격에 대한 간단한 훈련도 받을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유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론으로 배웠을 때 이런 종류의 정신 공격에서 깨어나는 법은 두 가지였다. 환상을 고의적으로 어그러트려 심각한 불균형을 만들어 내든가, 아니면 밖에서 누가 원인을 제거해 주거나.

그러나 재경과 이연 둘 다 환상 속에 들어간 거라면 후자의 방법은 불가능했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으나, 이연은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상황이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현재 이연은 병실 침대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는 상태. 2년 내내 잠들어 있다가 막 깨어난 몸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물 한 잔 떠 먹는 것도 어려워 간병인이 도와줘야 하는 형국이었다. 진짜 2년 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현실성이 쓸데없이 높았다.

그러나 그걸 차치하더라도 이연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거나 숨을 쉬는 것조차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는 몸 안에 분명히 있었지만 몸 주인이 아니었다. 마치 빙의 체험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상황을 어그러트리라는 거야.’

이연이 투덜거렸다. 말이 빙의지, 거의 관객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상황을 지켜보는 것과 정연의 감정에 몰입하는 것뿐이었다. 이연은 몸의 실제적 주인인 정연이 느껴졌다. 정연의 사고와 마음이 이연에게 정확히 전달되고 있었다.

사실 그 부분은 커다란 문제였다. 정신을 공유한다는 것.

8년 전 ‘정연’의 감정이 생생하게 겹쳐졌다. 혼란, 걱정, 두려움, 의문, 그리움……. 여린 어린아이의 정신은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여기가 병원이라는 것 정도만 깨닫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연’은 이후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달칵. 내내 조용하던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그때쯤에는 정연도 고개 정도는 돌릴 수 있는 기운이 충전된 뒤였다. 문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가운과 정복을 입은 의료진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조용하던 1인실은 금세 꽉 찼다.

“환자분, 기분은 좀 어때요?”

의사의 간단한 안부에 정연의 속이 울렁였다. 당장에라도 다다다 던지고 싶은 질문들을 참고 얌전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2년 동안 누워 계셨다는 건 들으셨나요?”

“네……. 아까 말해 주셨어요.”

정연은 그에게 정보를 알려 준 간호인을 흘끗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간호인은 그를 안쓰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솔직히 눈 감았다 뜨니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는 말은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어서 믿기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낯선 생김새의 기계들을 보면 그럴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로 어제 삼촌에게서 산오를 구하고, 엄마랑 아빠도 구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산오는 잘 탈출했으려나. 만날 수 있을까? 태평한 생각을 하며 정연이 어른들 무리를 다시 살폈다. 역시 없었다.

“그런데…… 엄마랑 아빠는…….”

경계 어린 목소리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이정연 씨의 변호사입니다. 이정연 씨가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대리인 역할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정연은 대답 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리인? 그런 게 왜 필요하지? 그냥 부모님한테 말하면 되잖아. 어린애다운 순진해 빠진 의문에 이연이 가만히 혀를 찼다.

이 당시의 기억은 똑똑히 가지고 있었다. 아마 평생 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부모님은 일하고 계신 거예요? 제가 일어난 거 알고 계세요?”

멍청한 질문에.

“이정연 씨.”

침통한 음색.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정연 씨의 부모님은 얼마 전 돌아가셨습니다.”

이어지는 끔찍한 대답.

“……네?”

정연은 아주아주 긴 침묵을 거친 후에야, 간신히 한 음절을 내뱉을 수 있었다. 숨소리로 착각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깜짝 파티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냥 정연이 깨어난 게 기쁘니까, 놀래 주려고 장난을, 치는……. 허무맹랑한 바람은 금세 스러졌다. 싸늘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변호사의 얼굴이 도무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저기, 이제 막 일어난 분에게 너무 직접적인 말씀은…….”

“저희도 그 부분을 고민하긴 했지만, 최대한 빨리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어른들이 소리 죽여 말하는 목소리가 이명처럼 웅웅거렸다. 정연은 고장 난 인형처럼 눈만 가만히 깜빡였다. 꿈인가? 자고 일어나면, 사실 나는 아직 열네 살이고 부모님이 옆에…….

“이정연 씨.”

“환자분.”

엄마가 이번엔 정말 위험했다고, 다치지 말라고 말을…….

아빠는 그 옆에서 껴안고 사랑한다고 해 줄 텐데…….

그게 현실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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