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그러나 당연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들어가 볼까요?”
“……그래도 될까?”
재경은 여전히 울상이었지만, 들어가는 것 외에 딱히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모래를 다시 불러냈다. 검은 액체에 닿지 않을 만큼 단이 높은 새하얀 다리가 그들이 있는 난간에서 구멍 너머를 이었다.
“근데 이연 씨, 이거 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종이도 없는데?”
“아…….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서요. 나중에 얘기해 드릴게요.”
상황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니 재경 역시 그 얼렁뚱땅한 말에 대충 넘어갔다. 지금 이연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긴 했다.
검은 물이 흐르는 계단을 넘어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연이 문득 멈춰 섰다. 잘 걷다 말고 우뚝 멈춰 주변을 두리번대자 뒤를 따르던 재경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아뇨…….”
이연은 영 찝찝하다는 얼굴로 뜯어진 벽면을 한 번 노려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착각인가? 방금 부서진 벽 단면 안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복도로 들어오니 스산한 공기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그냥 보기엔 평범한 건물 같은데, 이상하게 기괴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대체 뭘까요?”
“그러니까……. 분명히 밖에서 들어올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복도 안은 구멍 너머에서 본 것과 거의 동일했다. 각자 다른 사무실 간판이 붙어 있는 문 세 개와 남녀 화장실. 그리고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뭔지 모를 검은 문 하나.
폐건물치고는 과하게 정돈된 풍경이었다.
“……이거, 그거 아냐?”
눈살을 잔뜩 찌푸린 재경이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명확한 명사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이연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요. 저희가 부순 벽이 계단 문이라고 치면…….”
두 사람의 시선이 깨끗하고 새까만 문으로 향했다.
“……혹시 저기로 들어가야 할까?”
재경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연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딱 봐도 황천길 가는 문처럼 생겼잖아요. 절대 들어가면 안 될 것처럼 생겼다고요.”
“나도 그런 생각은 했는데…… 다른 길이 없는걸.”
“……창문 쪽으로 가 볼까요?”
암만 봐도 불길한 기운을 줄줄 흘리고 있는 문으로 다가가기에는 재경도 꺼려졌던 터라, 두 사람은 슬금슬금 게걸음을 하며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은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로 높이 위치해 있었지만, 너머의 풍경을 보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바깥을 본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
“저게 뭐야……?”
침묵 사이에서 신음 같은 한탄이 스륵 새어 나왔다. 하얀 달이 떠 있는 바깥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을 가득 메운 검은 강 외에는.
그들이 아는 풍경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가로등도,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가들도, 그리고 건물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도. 그저 비상식적인 검은 강 위에 그들이 들어온 건물이 덜렁 서 있었다.
“이거 대체 뭐예요? 저승 체험?”
“우리 이렇게 죽는 거야?”
재경이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비틀거리며 창문에서 떨어졌다. 이연 역시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그냥 단순히 담력 체험 하러 왔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헉!”
그때, 벽에 기대듯 달라붙었던 재경이 몸서리쳤다. 경련이라도 온 것처럼 사지를 퍼득이는 모습에 이연이 놀란 얼굴로 다가갔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이, 이거.”
재경이 온통 소름이 돋은 팔뚝을 연신 문지르며 방금 기댔던 벽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반듯하게 메워진 단단한 콘크리트라고 생각했다.
“이거 말랑해…….”
“말랑하다고요?”
이연이 재경의 말을 그대로 내뱉으며 벽으로 팔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슬쩍 눌러 보니 힘을 주는 대로 슥, 하고 들어갔다. 재경의 말대로 물렁하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이게 뭐지?”
손가락은 곧 손바닥으로 면적이 넓어졌다. 꾹 밀자 손바닥 모양대로 벽이 들어갔다. 이연은 곧 그 감촉이 마냥 흐물한 것이 아니라 어떤 굴곡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울룩불룩한 것이, 이거 꼭…….
“계, 계속 누르지 마. 갑자기 뭐가 튀어나오면 어떡해.”
“재경 씨. 이거 꼭…… 문어 다리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뭐?”
“물론 문어치고는 좀 크긴 하지만. 이거 봐요. 빨판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이연의 말에 재경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연이 벽을 꾹꾹 누르는 손길을 유심히 바라보던 재경이 저도 손을 뻗어 벽을 만졌다. 보기에는 더없이 딱딱할 것 같은 질감이 여전히 부드럽게 눌렸다.
“……잠깐만.”
벽을 빤히 노려보던 재경이 휙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급히 두리번대다 못해 발걸음까지 옮겨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는 모습은 척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뭔가 단서를 찾은 건가? 이연은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로 벽을 만지던 것을 멈추고 재경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재경은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저 혼자 바닥을 뱅글뱅글 돌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문어, 문어 다리에 공간 이동, 아니, 변이인가? 둔갑?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어디선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말소리가 뚝 끊긴 것은 어느 순간이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별안간 입을 다문 재경은 정확히 3초 후에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가 거칠게 출렁이고, 놀란 얼굴이 이연을 향했다.
“이연 씨, 이거 다발신이야!”
“다발신?”
처음 들어 보는 이름에 이연이 반문하자, 재경은 입이 트인 어린애처럼 말을 와르르 쏟아 냈다.
“3급 변이종 다발신. 발견된 적이 거의 없어서 알아채는 데 오래 걸렸어. 세상에, 다발신이라니. 이게 말이 돼? 도시 한복판인데? 짱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재경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달빛뿐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뺨이 달아오른 것 같기도 했다.
“왜요, 뭐 하는 놈인데요?”
3급 변이종이면 상급 분류다. 단숨에 심각해진 이연이 재경을 재촉하자, 재경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몇 개 없긴 한데……. 다발신은 자기 구역을 가지는 변이종이야. 일정 범위를 본인의 구역이라고 삼으면, 권역 내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 그 공간이 다발신 자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우린 지금 다발신 내부에 들어와 있는 거지.”
“……변이종 안에요?”
미묘한 뉘앙스에 이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소화되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저 검은 물이 위액…… 아냐, 아니라고 믿자.
“처치 방법은요?”
“처치? 처치할 거야?”
재경이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물었다. 그런 목소리를 내야 될 건 이쪽이다. 이연이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재경을 바라보았다.
“그럼 여기서 캠핑이라도 해요?”
“아니, 내 말은, 다발신은 워낙 희귀한 변이종이라서 연구 가치가…….”
이연의 째려봄이 심화될수록 재경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곧 우물대는 목소리가 쥐똥만 하게 흘러나왔다.
“……내 기억으로, 처치한 기록은 없어.”
“3급인데요?”
3급은 상급 변이종 중에서 가장 등급이 낮은 변이종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두 번쯤 처치한 기록이 있는 종류가 대다수일 텐데……. 의문으로 가득한 이연의 머릿속에서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반짝 떠올랐다. 아, 설마.
“다발신은 보주가 있는 변이종이야.”
에너지 원천이 따로 있는 보주 변이종에, 심지어 능력이 공간 지배니 처치 기록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오히려 고작 3급밖에 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다. 그런 이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재경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다발신이 보주를 가지고 있는데도 3급인 이유는 능력이 국지성인 데다가 이동성이 거의 없어서야. 적공 안에서 거의 나오려 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가 잠깐 나올 뻔하다가 다시 들어가 버린 것도 목격된 적이 있거든. 나도 사실 얘가 왜 이연 씨 옆 동네 건물에 진을 치고 있는지 모르겠어.”
“이제까지 발견 안 된 게 용하네요…….”
이연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재경은 아직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복도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며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말랑한 벽을 찔러 보기도 하고, 진짜처럼 느껴지는 패널이나 화장실 문 등을 한참 당겨 보던 재경의 시선이 복도에 뻥 뚫린 구멍 너머의 검은 물로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런데 희한하네. 다발신의 몸은 연체동물의 형태가 포함되어 있으니 물을 어느 정도 다루긴 하지만, 저렇게 점성이 짙은 검은 색 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먹물 아니에요?”
“문어 먹물은 점성 없어.”
“……그래요?”
“어. 오징어라면 모를까……. 게다가 건물 바깥도 왜 저렇게 됐는지 모르겠네. 저렇게 넓은 지역을 전부 다룰 정도로 강력하진 않을 텐데. ……아니, 이제까지 발견을 못 한 건가? 하긴 워낙 정보가 없는 종이니까.”
이연이 발표하듯 손을 들었다. 재경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두 사람은 그것 외에도 변이종의 새로운 능력이 발견된 또 다른 사례를 알고 있었다.
“혹시 연구소에서 실험을 거친 변이종일까요? 재경 씨 전 직장처럼요.”
“에이. 중하급 정도야 컨트롤 가능하니까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얘는 3급이나 되잖아. 국가 연구소가 도시 내에 변이종을 풀 리도 없고. 시민들이 알면 민원이 쏟아질걸.”
“그거야 그렇긴 하죠…….”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두 사람은 다시 복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화장실 문처럼 보이는 곳은 마치 장식인 것처럼 열리지 않았고, 계단이나 창문으로 갈 수도 없다.
그럴듯한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이연의 눈에 긴장이 스며들었다. 미지의 변이종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연은 하얀 달이 액자처럼 담긴 창문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처치 기록은 없어도 대응 기록은 있죠? 뭐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요?”
그런데 몇 초를 기다려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뭐지? 못 들었나? 이연이 뒤늦게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