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어? 이연이 눈을 깜빡였다. 대화는 눈 깜짝할 새 진행되어서 미처 이해할 틈도 없었다. 두어 호흡 후에야 이연은 상황을 인지했다.
당연히 이연과 같이 가는 게 아니면 거부 의사를 표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산오가 선선히 승낙했다. 그간 이연에게 집착적으로 느껴질 만큼 붙어서 행동하려고 굴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혹시 모르잖아. 조에 헌터가 하나씩은 있어야지.”
뒤이어 내뱉은 논리는 반박할 수도 없이 합리적이었다. 이연이 생각하기에도 산오를 재경과 묶느니 혜강과 다니게 하는 게 맞았다. 산오는 재경을 싫어하지 않는가. 재경도 산오를 껄끄러워하고……. 그러니까 이게 적절한 조합이긴 하지만.
깎아지른 것처럼 수려한 얼굴선은 이연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혜강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그건 그래.”
왜 그 태도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럼 이연이 형이랑 재경이 형이 먼저 가는 걸로 결정.”
가위바위보에서 또 한 번 이긴 혜강이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선언했다. 울상으로 제 손을 붙들고 있는 재경은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을 목격한 사람 같았다.
“뭐, 얼마 안 걸릴 테니까 후딱 다녀와. 문 개수 확실하게 세는 거 잊지 말고. 이연이 형. ……이연이 형?”
“어?”
이연은 혜강의 부름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혜강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빨리 다녀와.”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연이 재경을 보자 그는 벌써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으로 가는 걸음이 벌써 삐걱대고 있었다.
“막상 가려니까 떨리네……. 가자, 이연 씨.”
고개를 끄덕인 이연이 주춤대며 걷는 재경을 따랐다. 산오의 얼굴은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간 두 사람은 바로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켰다. 환한 라이트가 벽 구석구석을 비췄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작은 빌딩이라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계단 문을 찾아 걸어 올라가는데, 분위기에 졸아든 재경이 보기에도 어딘지 반응이 느린 이연의 태도가 영 이상했던 모양이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건네졌다.
“괜찮아? 많이 무서워?”
“아, 그런 거 아니에요. 뭐 좀 다른 거 생각하느라. 빨리 가요.”
정신을 차린 이연이 빙긋 웃었다. 평연한 얼굴에 재경 역시 한층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을 올랐다.
생각해 보면 크게 신경 쓸 일도 아니다. 뭐 오지 산간에 혼자 간 것도 아니고, 고작 담력 체험 다른 조가 된 것뿐이지 않은가. 화장실까지 같이 갈 것처럼 굴던 놈이 갑자기, 너무 선선하게 다른 사람이랑 가겠다고 하니까 놀란 거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은 없었다.
‘……혹시 혜강이한테 관심이 있나?’
혜강과 이야기하던 산오의 얼굴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 들었다. 다른 사람한테 집중하는 산오는 흔치 않아서,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산오와 혜강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지조차 못했다. 물론 사실이라고 해도 이연이 참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건 알지만…….
넉살 좋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할 정신도 없었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이연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한데 섞여서 비논리적인 감정을 이끌어 냈다. 이연이 눈썹을 희미하게 찡그렸다.
……절대로 안 떨어진다더니.
“와, 여기 진짜 어둡네. 2층에 있어야 하는 문이 여섯 개였지?”
“네. 여기로 이어지는 계단 문이랑, 화장실 문까지 합쳐서 여섯 개예요.”
아.
이연은 문득 깨달았다.
산오가 저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던 건 그냥 이연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였다.
그를 좋아해서, 그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으면 하고 바랐다. 계속 붙어 있고 싶어 할 만큼 자신을 좋아한다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사소한 행동에서도 호의를 찾기 위해 애썼다. 단순한 행동에 의미 부여를 했다. 사람들이 친하다고 해 주니까 산오가 이 관계를 정말로 특별하게 여긴다고 착각했다.
좋아하는 건 이연이었다. 헷갈려서는 안 됐다.
“이연 씨?”
머리 위로 떨어진 목소리에 이연이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두어 계단 위에 선 재경이 어정쩡하게 선 채로 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이연을 의아하게 보는 얼굴은 긴장이 가득한 상태에서도 걱정이 조금 스며들어 있었다.
‘우선순위가 명확한 인간은 좀처럼 기준이 바뀌지 않아.’
왜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이연이 홀린 듯 물었다.
“있잖아요, 재경 씨.”
“어?”
“아직도 인간보다 변이종이 더 좋아요?”
“뭐?”
뜬금없이 날아온 질문에 재경이 긴장하던 것도 잊고 황당하게 되물었다. 맥락이 모조리 거세된 물음은 너무 붕 떠 있어 헛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당연하지. 나 취직한 곳 보면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경의 대답은 단호했다. 명쾌하게 느껴질 만큼 빠르게 나온 대꾸에 이연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잘 바뀌지 않는구나.
“갑자기 그건 왜? 무섭게 왜 자꾸 그래?”
별안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니 재경에게는 좀 귀신 들린 사람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겁먹은 얼굴로 재경이 계단을 내려와 이연의 옆에 섰다. 괜찮냐며 호들갑을 떠는 남자를 이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소릴 하더라고요. 우선순위가 명확하면 사람이 안 바뀐다고.”
아무렇지 않게 흘렸다고 생각한 말은 그대로 마음속에 남았다. 타인을 향한 발언이 그토록 신경 쓰이는 이유는 이연이 거기에 어떤 동질을 느꼈기 때문일 터였다.
“그게 진짜일까요?”
그렇게 묻는 이연의 얼굴은 조금 우울해 보였다. 그래서 재경은 실없는 소리라고 무시하는 대신 흠, 하고 침음을 냈다.
“뭐, 사람은 잘 안 바뀌긴 해.”
복잡한 심경 사이로 재경의 목소리가 가볍게 흘러들었다. 이연이 고개를 들었다. 재경의 얼굴은 대수롭지 않았고, 큰 고민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살다 보면 우선순위가 바뀔 수도 있으니까.”
“네?”
“내가 뭐, 태어났을 때부터 사람보다 변이종을 더 좋아했겠어? 나도 어릴 땐 변이종 무서워했어.”
피식 웃은 재경이 다시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연은 홀린 것처럼 그 뒤를 쫓았다.
“나 중학교 때 따돌림당했거든. 그래서 친구가 없었어.”
가벼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별거 아닌 내용처럼 들렸다.
“근데 그걸 주동하던 애가 헌터가 되어서 변이종을 박멸시킬 거라고 맨날 그랬어.”
그러나 당연하게도, 진짜로 별거 아닐 리가 없었다.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하지 않아? 그런 말을 들으니까 청개구리 심보처럼 변이종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지 뭐야. 네가 뭔데 그걸 박멸해? 하면서.”
그게 계기였다. 이어지는 학창 시절 내내 재경은 도서관과 컴퓨터 앞에서 살았다. 사람과 친해지는 것보다는 글과 친해지는 게 훨씬, 훨씬 쉬웠다.
오기처럼 시작했던 변이종 검색은 어느새 재경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궁금했고, 알고 싶었고, 재미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대학에 가서도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곁에 아무도 없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변이종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순수한 학구열이 빈자리를 충분히 채웠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모여서 괴담 이야기도 했다고.”
“그거야 뭐, 반 전체 행사였거든. 안 가고 싶어도 필수 참여였어. 그래도 이야기 듣는 게 재미있긴 했어. 아무도 날 신경 쓰진 않았지만.”
구석에 혼자 있으니까 놀라도 아무도 모르더라고, 아니면 알고도 그냥 무시한 걸 수도 있고. 재경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뚜벅뚜벅 계단 오르는 소리 사이로 이연이 슬그머니 또 물었다.
“그럼 다시 사람이 우선순위가 되는 날이 올 것 같아요?”
“그건…… 어려울지도.”
“왜요. 사람도 좀 좋아해 주세요.”
“어허. 난 변이종에 온몸을 바친 사람이야.”
농담 같은 대화를 나누며, 이연이 시무룩하게 처져 있던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크게 결론이 난 것도 없는데 이야기를 하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표정이 한층 풀어진 이연을 바라본 재경이 그제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연 씨.”
“네?”
“2층이 원래 이렇게 오래 걸어야 하던가?”
“……네?”
이연이 눈을 깜빡이며 재경 너머의 앞을 보았다. 중간에 잠깐 멈췄다고는 해도 이야기하면서 계속 걸었으니 꽤 많은 계단을 오른 셈이다. 백팔십도를 꺾어 다시 오르는 계단 중간층도 몇 번이나 지나간 것 같은데.
다음 층으로 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똑, 똑, 똑…….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재경과 이연이 흠칫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두 사람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으니 선명하게 들렸다.
계단 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