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아, 배달인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장본인인 혜강이 태연하게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마실 게 부족하다며 추가로 술을 배달시켰다. 그게 온 모양이다.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이연이 깜짝 놀란 정신을 수습하는 사이 혜강이 배달을 받으러 가며 사무실 불을 켰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환해졌다.
“아, 진짜 깜짝 놀랐네…….”
재경이 종알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혜강이 묵직한 봉투를 받아 들고 희희낙락하며 돌아오다가 이연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이 왜 그러고 있어?”
“어?”
어리둥절하게 대답한 이연은 그제야 제가 산오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진하게 주름이 진 여름 니트의 목 부분이 늘어져 쇄골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헉, 미안.”
이연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뭐가 이상하게 따뜻하다 싶더라니, 자세도 산오의 옆구리에 자연스럽게 끼어 들어가 있었다. 묘하게 걸리는 부분 없이 편해 몸이 닿은 줄도 몰랐다. 민망함에 꾸물꾸물 떨어지는 사이 재경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두 사람은 진짜 사이좋구나. 알바생 친구 성격은 엄청 무뚝뚝하잖아.”
산오는 귀찮았는지 재경에게 꿋꿋이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재경도 계속 묻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어쩌면 물어보는 게 무서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산오가 말하지 않으니 이연이나 혜강도 산오의 이름을 섣불리 부르지 않았고, 재경도 되는대로 알바생 친구 정도로 지칭해서 부르곤 했다.
남이 보기에도 사이좋아 보이는구나. 그 사실이 내심 뿌듯했다.
“둘이 같이 살잖아요.”
“그래, 그것도 신기했어. 동거는 어쩌다 하게 된 거야?”
“뭐……. 길바닥에서 자는 걸 제가 주웠어요.”
“헉. 그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알바생 친구는 다행히 무사했나 보네.”
순도 100%의 진실을 재경은 장난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장난스러운 대답에 굳이 정정해 줄 필요도 못 느낀 이연이 어깨만 으쓱이며 웃었다. 그사이 포장을 헤치고 새로운 맥주를 꺼내 든 혜강이 모두에게 배급했다. 야식을 먹고 마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다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고등학교 때 생각난다. 학창 시절에 이런 거 많이 하잖아요. 교실 불 다 꺼 놓고 무서운 이야기 하고.”
“아, 나도 한 적 있어. 밤에 반 전체가 모여서 교내 담력 체험 했었는데.”
“맞아요. 전 친구들끼리 모여서 간단하게 했어요.”
도란도란 떠드는 혜강과 재경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들떠 있었다. 산오야 원래 말을 하지 않으니 차치하고, 웬일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이연을 혜강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형은 밤늦게 교내 돌아다니고 그런 거 안 해 봤어? 재밌어했을 것 같은데.”
“안 해 봤어.”
이연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나 검정고시 봤어. 중학교 때 자퇴하고 고등학교도 안 갔거든.”
혜강과 재경이 나란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연을 바라보았다. 말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비밀로 할 것도 아니었다. 이연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학교 다닐 수 있는 환경이 안 돼서.”
태진에게 기력을 빼앗겨서 기절했다가 눈을 다시 뜬 게 2년 후, 16살. 이미 중학교를 제 나이 때 다니기는 물 건너간 시기였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이연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는 걸 재빠르게 눈치챈 혜강이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지금 가 볼래?”
“어?”
“괴담 이야기는 지금 실컷 했고, 담력 체험도 이제 해 보면 되지.”
“……지금?”
그렇다고 당장 가고 싶은 건……. 떨떠름한 이연의 대꾸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재경이 재빨리 거들었다.
“그럼 되겠다. 바로 옆 동네라며? 가는 데에 얼마 안 걸릴 거 아냐.”
“그건 그런데……. 재경 씨는 괜찮아요?”
재경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연만큼 무서워했다. 귀신의 존재도 믿는 모양이었고……. 이야기를 듣는 거야 간접적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직접 가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이런 자리에 선뜻 낀다는 것이 의외라 묻자, 재경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어어. 다 같이 가는 거면 괜찮을 것 같아.”
“그래요. 그냥 폐건물 슬쩍 보기만 하고 오는 건데.”
“맞아. 그리고 이연 씨가 안 해 봤다니까.”
이연을 바라본 재경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겸사겸사 변이종도 찾으면 좋고.”
건물 안, 그것도 문이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는 괴담 속에서 변이종이 난데없이 등장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재경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못내 어색해하다가 난데없이 맥주를 원샷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다소 거칠게 내려놓았다. 쾅,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그럼 결정! 갈까?”
기세에 묘하게 압도된 이연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경과 혜강이 동시에 일어나며 부산스레 외출 준비를 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에 이연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이연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혜강이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나서 좀 꺼려지기야 하겠지만, 진짜로 문이 하나 더 있을 리도 없고. 동네 순찰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곤란할 것도 없었다. 비록 내 동네는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두 사람이 이렇게 의욕적으로 움직이는 까닭을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해서, 가슴 한구석이 조금 간지러웠다.
잠깐 그 감각을 진정시키는 사이 혜강이 잔소리했다. 형, 빨리 정리하고 가야지. 거기 접시 좀 줘. 유난한 닦달에 이연이 어어, 하고 대답하며 텅 빈 일회용 접시를 건넸다. 재경은 비닐봉지를 펼쳐 쓰레기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배달 음식을 평소에 얼마나 많이 시켜 먹었는지 관록이 엿보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슥 몸을 일으켜 컵을 차곡차곡 쌓는 산오 역시.
별것도 아닌 광경인데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연이 남몰래 조금 입꼬리를 올렸다.
모두가 바지런히 움직이자 자리는 금세 깨끗해졌다.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정되지 않은 외출에 다들 신났는지 얼굴이 들떠 있었다.
혜강의 이야기는 바로 옆 동네이니만큼, 차가 끊긴 지 오래인 야심한 시각에 걸어서 이동해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오는 웬일로 지하 엘리베이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듯 얌전히 산책에 협조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동로역이 보였다.
“어, 동로역! 저기 맞지?”
“네. 저쪽까지 걸어가서 꺾으면 돼요.”
역 근처는 대로변이었으나, 상가가 많은 거리라 밤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 고요한 도로는 가로등만 점점이 켜져 있었다.
새벽에 변이종 잡으러 다닐 일이 많아서 이제까지 별생각 없었는데, 혜강의 이야기를 듣고 오니 아무도 없는 거리마저도 좀 으스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다가 새벽 임무 못 하게 되면 이혜강 탓이다. 이연은 괴담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다소 삐뚤어진 시각을 갖게 되었다.
역에서 괴담 건물로 걸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거리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노후된 티가 났다. 도로도 좁고, 건물이나 담도 군데군데 때가 끼거나 깨진 흔적이 보이는 것이 증거였다.
“오, 벌써 좀 분위기가 나네요.”
“그러게. 어느 쪽이지? 많이 가야 돼?”
“조금 더 가야 해요.”
“그렇구나.”
조잘거리며 재경과 앞서 걷던 혜강은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졸졸 쫓아가던 뒷사람들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작은 건물이니까 우리 사람을 나눠서 들어갈래요?”
“뭐?”
“어?”
상황에 가장 취약한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했다. 혜강이 짓궂게 웃었다.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나눠서 둘둘씩, 어때요?”
재경이 형이야 좀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이연이 형은 임무 할 때 이런 데 많이 다녀 봤잖아. 교묘하게 오기를 자극하는 발언에 재경과 이연 둘 다 발끈했다.
“나 고등학교 때 비슷한 거 해 봤다니까?”
“야, 나 귀신 안 믿거든?”
“그럼 됐네. 가위, 바위, 보!”
기습적인 외침에 이연이 뭐라 생각하지도 못하고 주먹부터 냅다 내밀었다. 재경 역시 비슷하게 본능에 맡긴 바위였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친 혜강이 팔랑팔랑 제 손을 흔들었다.
“내가 이겼네. 그럼 난 형이랑 갈게.”
혜강이 가리킨 것은 산오였다.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쟤랑? 그럼 나랑 재경 씨랑 같이 가라고?”
“이연 씨, 말이 뭔가 아프다?”
재경이 투덜대든 말든 이연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산오다. 산오는 피치 못할 사정일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이연을 혼자 움직이도록 놔둔 적이 없었다. 아예 자리에 없었다면 모를까, 있다면 무조건 이연을 쫓아 나섰고 심지어 본인의 의사는 물은 적도 없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와서 이연을 내버려 두고 다른 사람과 팀을 짜서 움직일 리가 없었다. 차라리 혼자 다닐 인간이 아닌가. 아무리 단순한 담력 시험이라고 해도, 아무리 혜강이라고 해도…….
“왜? 형, 저랑 같이 가기 싫어요?”
혜강이 의아하게 산오를 돌아보았다. 산오는 이연과 혜강을 번갈아 흘끗 보고는 툭 대답했다.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