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재경은 처음에 저어한 것과 달리 꽤 재미있어했다. 실컷 무서워하는 주제에 침묵이 좀 흐른다 싶을 때 다른 이야기 없냐고 묻는 건 언제나 재경의 역할이었다. 이연도 깜짝깜짝 놀랄 뿐이지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는 괜찮았다. 애초에 놀라는 것도 그만큼 이야기에 몰입했다는 증거 아닌가. 혜강은 두 청자의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세헤라자데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풀었다.
“아, 저 또 생각난 거 있어요.”
혜강이 맥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바로 앞에 앉은 이연이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테이블 가까이로 숙이다가 옆자리의 산오와 팔이 닿자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산오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이연 쪽의 팔을 올려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그 기척에 한 번 더 놀랐다.
“이건 우리 옆 동네에서 벌어진 이야기야.”
“……그렇게 가까워?”
“응. 형 거기 알지? 동로역 쪽에 병원 많이 있는 커다란 빌딩 있잖아.”
“아……. 거기.”
이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일하다가 몇 번인가 갈 일이 있어 익숙한 곳이었다. 왜 그렇게 가까운 곳에 괴담이 있는 거야?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연의 뇌는 착실하게 공감을 시작했다.
“그 빌딩 골목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다 보면 3층짜리 건물이 있어. 지금은 아마 영업 안 하는 건물일 텐데……. 아무튼 거기 2층에 자영업 사무실이 하나 있었거든.”
“원래 그렇게 자세한 위치까지는 말 안 하지 않아? 건물주가 싫어할 텐데. 아, 폐건물이라 상관없나?”
재경이 의아하게 물었다. 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본 글에서는 정확히 어디라는 말이 없었는데, 그냥 저희 동네 근방이라는 얘기만 듣고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알아봤어요. 조건이 딱 들어맞는 데가 몇 군데 없어서 바로 알았죠.”
쓸데없는 호기심은 고급 인력을 만나 화려하게 피어났다. 구체적인 지명이 나오니 심리적인 거리감이 한층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연이 진지한 얼굴로 혜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집중 조명에 턱과 뺨 언저리 정도밖에 보이지 않아 말을 내뱉는 입술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거기 직원이 자정 즈음에 퇴근하려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혜강의 무심한 어조가 오늘따라 음산하게 다가왔다. 이연이 저도 모르게 옆의 온기에 바싹 붙었다. 방어하듯 제 옆구리로 파고드는 몸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산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고의인가?”
“응?”
속삭이는 것처럼 조그마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이연은 빤한 시선의 의미를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아, 미친. 이연이 대경실색하며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
엄마 품 찾는 캥거루도 아니고 제산오에게 붙을 생각을 하다니. 하긴, 몸이 크고 탄탄해서 안정감이 좀…… 정이연 미쳤냐? 이연이 정색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헛생각이나 하고, 새삼 산오가 편해지긴 편해졌나 보다 싶었다.
그런 이연의 몸을 등받이에서 내려온 팔이 슥 잡아당겼다.
“왜.”
강한 힘이 허리를 붙들자 약한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산오는 쉽게 놔줄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힘이 강해졌다. 얼결에 산오에게 딱 붙은 채로 얼어붙은 이연이 해명을 요하는 눈으로 산오를 바라보았다. 뭔데. 왜 이러는데……?
“계속해 봐.”
산오는 정말로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뭐, 뭘 계속해.”
“하던 거.”
뭔 힘이 이렇게 센 건지 조금만 균형이 무너지면 바로 산오의 허벅지 위로 쓰러질 것 같았다. 이연의 뇌가 필사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래 놓고 나중에 내 체온을 빼앗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이러면서 죽이는 거 아냐? 고슴도치가 되어 버리는 거 아니냐고. 이연의 산오에 대한 불신은 생각보다 깊었다. 특히 정신을 차리자마자 집 안에서 공격한 것이 주효한 인상으로 작용했다.
이연이 산오를 좋아한다고 해서 산오에 대한 이미지까지 갑자기 바뀐 건 아니었다. 호감에 정비례하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수상한 눈으로 째려보는데도 산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슬그머니 허리에 얹은 커다란 손을 떼어 내려고 용을 썼으나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두 사람, 그만 속닥대고 집중 좀 해 줄래?”
“미, 미안.”
소리 죽여 옥신각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기껏 분위기를 잡고 있는 혜강의 이야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이연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등을 세웠다. 그제야 산오가 힘을 풀었다. 등을 둘러 허리에 얹은 손은 가볍게 떨어져 다시 소파 등받이 위로 올라갔으나, 온기가 닿았던 곳은 데기라도 한 것처럼 더웠다.
“아무튼. 원래 거기가 층마다 사무실이 3개씩밖에 없거든? 그럼 남녀 화장실 문이랑 계단 입구까지 합해서 문이 총 여섯 개여야 하잖아.”
음성이 점점 낮아졌다. 혜강은 꽤 괜찮은 이야기꾼이어서, 그의 말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연은 산오의 존재감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다. 산오를 제외한 모두의 몸이 혜강 쪽으로 기울어졌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을 보며, 혜강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원래 벽이어야 하는 부분에 문이 하나 더 있더래.”
“웬 문?”
“모르지. 그런데 시간이 늦어서 복도에 불이 다 꺼져 있으니까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그냥 퇴근했대.”
거기서 끝나면 얼마나 다행이었겠냐마는, 혜강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다음 날도 일이 많아 자정 즈음에 사무실을 나오게 됐는데, 어제 본 거랑 똑같은 문이 보이더래. 그런데 그 직원은 어제 기억이 아무래도 찝찝해서 출근할 때 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었거든. 아침에는 분명히 없었어. 벽밖에 없었는데, 퇴근할 때 보니까 그 문이 다시 생겨 있는 거지. 게다가 어제랑 조금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아?”
한 박자 쉰 후, 혜강이 말을 이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대.”
집중한 이연이 인상을 쓰며 몸을 움츠렸다. 산오의 시선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듣는 맹한 뒤통수에 흘깃 닿았다 떨어졌다.
“안이 안 보일 정도로 아주 살짝 열린 거긴 했는데 분명히 어제는 닫혀 있었거든. 그쯤 되면 좀 무섭잖아. 그래서 직원은 그날도 뒤도 안 돌아보고 퇴근해 버렸어.”
“맞아. 공포 영화에서 보면 괜히 그런 데 호기심 가지는 사람이 제일 먼저 죽잖아.”
재경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거야? 이연은 공포 영화를 안 봐서 몰랐지만, 혜강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그런 공식이 진짜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둘 순 없고, 퇴사 사유가 자정에 헛것 보인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조심하려고 한동안 정시 퇴근을 했는데, 워낙 영세한 사업장이다 보니까 그렇게 근무 시간을 조절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우리도 종종 야근하잖아.”
“그…… 그렇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이연에게 재경이 놀랍다는 듯 물었다.
“와, 너희 야근도 해? 맨날 노는 것 같더니.”
“저희 정연할 땐 바빠요. 같이 내야 할 서류가 많아서.”
“그렇게 말하니까 너네 진짜 헌터 같다.”
“……헌터 맞거든요?”
새삼스럽게 감탄하는 게 어이없어 이연이 불퉁하게 말하자, 재경이 농담이라며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그 손길이 아주 밉지는 않아 입만 삐죽이고 마는데, 산오가 갑자기 자세를 바꾸는 바람에 건너편에 있던 재경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아무튼, 오랜만에 자정까지 일을 하게 된 거지. 그런데 아무래도 자정에 바로 퇴근하려니까 영 무서워서, 그 직원도 나름대로 머리를 썼어. 일부러 급하지 않은 업무까지 해서 새벽 1시 넘어서 퇴근하려고 한 거야. 아예 늦게 나가면 없겠지 싶어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야기를 듣느라 혜강이 잠깐 말을 멈추면 사무실은 금세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간극이 묘하게 섬찟함을 가중해서,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조심조심 사무실을 나서면서도 이상한 문이 있던 쪽은 일부러 안 보려고 애를 썼는데,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 있는 거. 오늘은 진짜 없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슬쩍 눈동자만 돌려서 문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려고 했거든.”
누군가에게서 입 다시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거야.”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게다가 거기에서…….”
딩동!
“헉!”
“으악!”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펄쩍 뛰어오르며 손에 잡히는 걸 얼결에 꼭 붙들어 안은 이연이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