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50)화 (150/250)

#150

13. 겁쟁이의 행동 방법

“고백해.”

혜강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온갖 쑥스러움을 타며 뜸을 들인 끝에 제산오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비장하게 선언한 이연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혜강은 이미 사귀는 거 아니냐고 의심한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연이 그를 좋아한다는 고백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라 좀 자존심까지 상한다고 할까…….

근데 이거 뭔가 익숙한 패턴인데? 이연은 짙은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착실히 반박했다.

“아니, 야. 고백할 생각은 없다니까.”

“왜?”

좋아하면 고백하는 거 아냐? 혜강이 정론을 내밀자, 돌연 이연이 아련한 얼굴을 했다.

“세상에는 바라만 봐도 좋은 게 있는 법이지…….”

“……뭐?”

“원래 인생이란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잖아. 연애도 비슷하지.”

“형 연애 해 봤어? 안 해 봤을 것 같은데.”

정곡이다.

“……아무튼,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 감정을 만끽할 시간이 필요해.”

이 형 지금 제정신인가? 혹시 저택 지하가 폭발할 때 어디 맞은 건가? 머리라든가……. 혜강이 의심스레 이연을 바라보았다. 뻔뻔한 얼굴로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연은 최소한 고백을 하지 않겠다는 말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럼 평생 짝사랑만 할 거야?”

“아니, 좋아하는 감정엔 그, 유통 기한 같은 게 있다며.”

“……엥?”

“그, 어쩌다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호르몬 같은 게 분비된대. 도파민이랑, 아드레날린이랑, 펜에틸아민 같은 거……. 근데 그게 영원하지는 않은 것 같더라고.”

자세히도 찾아봤다.

혜강이 없으면 인터넷은 쳐다보지도 않는 인간이 그런 걸 자발적으로 알아냈다는 사실을 장하다고 해야 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혜강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 공백을 이연이 다시 채웠다.

“그러니까 그냥 보기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너무 순진무구한 얼굴이라 구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혜강은 대체 뭐가 괜찮은 건지, 왜 그렇게 소극적인 건지 묻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의외네.”

“뭐가?”

“형은 가끔 좀 저돌적인 구석이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바로 고백할 것 같았거든.”

“……칭찬이야?”

“분석이지.”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가족 같은 것도 좋아하고. 애인이면 나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 생기는 거잖아. 산오 형이랑은 이미 같이 살기도 하니까 사귀게 되면 정말 가족 같을걸.”

혜성을 보는 이연의 시선이 어떤지 혜강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수빈과 수아를, D.S와 미래를 돕는 것도 모두 지켜보았다. 뭐, 물론 그 사람들을 도운 데에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연에게는 가족에 대한 열망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바로 애인을 사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족은 무슨.”

이연이 픽 웃었다. 묘하게 냉소적으로 변한 인상에 혜강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어떤 말을 해도 무던하게 받아치던 평소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탓이다.

“난 혼자가 좋아. 그게 더 편하고……. 제산오랑은 친구만 하면 됐지, 뭐.”

지나치게 단정적인 말이었다. 혜강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해하지 못한 기색으로 이연을 살펴보던 그는 곧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형, 지금…….”

“왜 이렇게 늦게 와.”

“으헉!”

별안간 음산하게 울린 목소리에 이연이 펄쩍 뛰었다. 양손에 들린 음료 컵이 흔들리며 짙은 액체가 덩달아 출렁였다.

간단한 저녁 식사 후 가위바위보로 결정된 음료 심부름 담당은 혜강이었으나, 이연은 옆에서 괜히 깐족거리다 짐꾼 노릇으로 굴비처럼 잡혀갔다.—2년 내내 구라를 쳤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이연은 마지못해 일어나면서도 동무를 만들기 위해 산오에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한심하다는 얼굴의 산오가 무시한 덕에 둘만 옆 건물의 카페까지 다녀온 참이었다.

“넌 왜 여기까지 나와 있냐?”

이연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투덜댔다. 옥상에 있는 사무실에서 1층인 건물 입구까지는 이동하기 꽤 번거로운 거리다. 별일 없다면 소파에서 유유자적 앉아 있는 것을 선호하는 산오가 설마 그들을 마중하러 나왔을 리는 없고…….

“전화.”

산오가 심드렁하게 휴대폰을 흔들었다. 아.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진을 잡아넣은 이후, 산오는 묘하게 바빠졌다. 이연과 같이 출퇴근을 하는 건 전과 같았지만, 잊을 만하면 울리는 휴대폰 덕에 대화가 방해받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 때문에 의뢰도 같이하지 못한 게 몇 번 있었고……. 최근에는 사무실까지 종찬과 종희가 데리러 온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연은 우연한 기회로 그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는데, 바로 태진의 재판이었다. 종희가 이연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 태진에 대해 물어보며, 혹시 증인으로 설 의향이 있냐고 물어 왔기 때문이었다.

‘증인이요?’

‘네. 아마 산오 님이 원치 않아 하셔서 실제로 그렇게까지 할 가능성은 적지만…… 동시에 최대한 강한 처벌을 원하고 계시기도 해서요.’

보험차 여쭤보는 겁니다, 하고 말하는 종희는 꽤 진심인 것 같았다. 이연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연 역시 태진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으면 했다. 그는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재판 날짜는 잡혔나요?’

‘아직입니다. 송치된 이태진 씨가 옆구리 통증을 호소해서 검사를 받아 본 결과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거동이 가능해질 때까지 일자가 미뤄질 것 같습니다.’

‘…….’

이연이 찔리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산오는 마지막 기절용으로 날린 공격 외에는 태진에게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콕 집어 옆구리라고 했으면 아마 높은 확률로 이연이 날렸던 레킹 볼의 흔적일 터였다.

물론 상황이 급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반쯤은 홧김이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이연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뒤늦게 감정에 휘둘렸던 것이 민망해졌다.

‘목숨에 전혀 지장이 없는 부상이라, 전투 중 정당방위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으니 걱정 마십시오.’

마치 그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태연하게 읊는 내용에 지레 놀란 이연이 시선을 피하며 아니, 뭐, 하고 말끝을 흐렸다. 종희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럼,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게 일주일도 더 된 일이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긴 한데……. 이연은 불쑥 치미는 궁금증을 꾹 잡아 눌렀다.

산오가 직접 물어본 게 아니라 종희가 비밀리에 연락한 걸로 보아, 산오는 이연이 그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차피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게 빤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치려는데, 산오가 불쑥 손을 뻗어 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이연이 쥔 잔 중 하나가 커다란 손에 잡혔다.

“칠칠치 못하긴.”

아까 놀라느라 컵이 흔들린 탓인지 이연의 손에 커피가 몇 방울 튀어 있었다. 산오는 제 몫의 음료를 집어 들면서 손가락으로 이연의 살갗을 훑었다. 따뜻하게 문질러지는 온기에 이연이 움찔 튀려는 손을 간신히 참았다.

산오는 짙은 색의 액체가 옮겨 묻은 손가락 끝을 끌어당겨 날름 핥았다. 붉은 혀가 오늘따라 더 선명하게 보여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숨이 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에 손님 왔다. 곧 다시 올 테니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

이연이 무언가 하기도 전에, 산오는 산뜻하게 제 할 말만 내뱉고 가 버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뒤통수는 너무 빨라서 금세 멀어졌다.

그 모습을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혜강이 아직도 멀거니 서 있는 이연을 깨웠다.

“형, 정신 차려. 우리도 들어가자.”

“어? 어어…….”

앞장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혜강을 뒤쫓으며, 이연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산오는 어느새 거리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드디어 태진을 잡았다. 무려 십 년 전의 악연. 그토록 찾아 헤맨 악당. 그 사실이 주는 후련함을 만끽하기도 전에, 묘한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다음은?

이연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할 게 없었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일이 일단락된 지금이 나가려면 제일 적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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