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막 잠자리에 들려는 미래를 데리고 나와 지하로 향하면서, 그 어두운 계단을 걷고 뭔지도 모를 복도를 의심 없이 따라오는 미래를 보면서, 세미의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혔다. 미래는 가는 내내 언니가 제 방에 놀러 온 것은 처음이라면서 즐거워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만나는 게 이상하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미래가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도 알고 있었다.
미래가 몸부림치지 않게 의자에 묶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가죽끈의 잠금장치가 섬세해서 잘 채워지지가 않았다. 손가락을 한참을 움직였는데도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하여튼 굼뜨기 짝이 없었다.
눈물이 났던 것은 분명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언니, 언니 왜 울어?’
미래는 묶이고 있는 주제에 바보 같은 질문만 내뱉었다. 그 사실이 너무 짜증 나서,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세미를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던 미래 역시 곧 울먹였다.
‘울지 마아…….’
맨날 가라고 했는데 오늘은 왜 오라고 하냐고 물어봐야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봐야지.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봐야지…….
외출한 태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시간이 아슬아슬할 것 같다며 세미에게 실험을 먼저 시작해 두라고 했다.
이게 세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눈물을 닦고 의자에 묶인 미래에게서 떨어진 세미가 컴퓨터 앞에 섰다.
그리고.
“그냥 변덕이었을 뿐이야.”
세미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낮은 음성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이세미 씨.”
세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미래가 여기서 나가기 전에, 이세미 씨한테 인사하면 안 되냐고 물어봤어요.”
“…….”
“자기는 기다리는 걸 잘하니까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 있다고 했어요.”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세미의 표정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다.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던 몸은 한참 후에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세은은 진짜 죽었어?”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힐끔 산오를 바라보자,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이 그를 마주 봐 왔다.
사실 이연도 그 부분이 계속 걸렸으나 차마 묻지 못했다. 대답을 듣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연은 그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무거운 침묵을 깬 건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죽였다는 소리는 한 적 없는데.”
“뭐?”
눈을 크게 뜬 이연이 다시 고개를 휙 들었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하자, 산오는 어째 좀 심술궂은 표정이었다.
“죽일 생각이었지만.”
산오의 시선이 이연을 꿰뚫듯 주시했다. 의아한 눈빛이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오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냥 마음이 바뀌었다.”
죽일까 말까 고민하다 마음이 정해진 순간 산오는 세은을 바로 기절시켰다. 묶은 후 방치해 뒀던 것을 땅속으로 끌고 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털썩. 세미와 조금 떨어진 곳의 바닥이 열리며 정신을 잃은 세은이 밀어 올려졌다. 세미가 확인할 수 있는 각도였다.
의식을 잃은 세은은 여기저기 상처가 있었고 옷도 머리도 엉망이었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가느다란 호흡이 흉곽을 들었다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연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세미의 등이 조금 떨리는 것을 발견하고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안내드릴 것이 있습니다.]
“응?”
그때, 칠칠이 이연의 바지 자락을 잡아당겼다. 이연이 의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꼬질한 분홍 인형이 낭랑하게 폭탄 발언을 터트렸다.
[미래가 만약 긴급 탈출 기능을 이용하여 이동되었을 경우, 남은 저에게는 시한이 주어집니다.]
“……시한이요?”
별로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었다. 이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칠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1분 3초 후, 제 몸은 폭파합니다.]
“예?”
[이제 1분 1초 남았습니다.]
“……예?”
마지막 대답은 비명에 가까웠다. 이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멈추지는 못해요? 아니, 왜 빨리 말 안 했어요!”
[취소 기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래는 긴급 탈출 기능 직후 안내하도록 되어 있는데, 바빠 보이셔서 잠깐 보류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배려심이었다. 이연이 황당함을 못 이겨 턱이 빠질 듯이 입을 벌리는데, 산오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괜찮군.”
“폭탄이 터진다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사람이 왜 그렇게 폭력적이야?”
“어차피 여길 남겨 둘 생각은 없었다.”
[폭파 범위는 지하 전체에 닿습니다. 현재 저택 전역에 걸쳐 다수의 보호 장치가 확인됩니다. 아쉽게도 지하가 폭발한다고 해서 건물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아주 만든 사람이랑 똑같고만!”
칠칠이 대답하듯 줄줄 읊고 이연이 맹비난하는 광경을 무시한 산오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그에 맞추듯 바닥이 꿀렁이며 퍼져 나갔다. 멀리서 쓰러진 태진은 물론이고 세미와 세은까지 전부 제 앞으로 끌어온 산오는 손을 들어 가볍게 까딱였다.
그러자 지하에 있는 기물을 땅 안으로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일단 부숴 두면 허튼짓 막을 시간은 벌겠지.”
연구실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산오의 권역 속으로 파묻혔다. 책상, 의자, 볼펜, 컴퓨터와 깨진 모니터까지도. 바닥이 늪이라도 된 것 같았다. 지하의 다른 방들에서도 전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되겠군.”
산오는 범죄자 삼인방까지 단차가 내려앉은 구덩이에 처넣은 후 그 역시 그 안에 들어섰다. 탑승 인원이 많아 평소보다 엘리베이터 면적이 넓었다.
“빨리 들어와.”
가벼운 재촉에 이연이 얼결에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문득 스친 생각에 우뚝 멈췄다.
“아니, 잠깐만. 그럼 칠칠 씨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자폭을 한다는 소리는 칠칠의 몸이 산산조각 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런 지하에서 폭발하면 건물 파편에 파묻혀 잔해조차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폭탄을 지고 함께 갈 수도 없었다. D.S에게 가서 해체를 부탁할 정도로 여유 있는 시간도 아니었고.
[뒤처리를 하는 것까지 제 몫입니다. 미래를 무사히 탈출시켰으니 저는 더 이상 바라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연은 칠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텅 빈 연구실에 홀로 남은 인형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로봇이라는 것도, 인공 지능이 하는 소리라는 것도 전부 안다. 칠칠은 생명체가 아니다. 그냥 상황에 맞게 대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기계다.
기계를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폭파까지 13초 남았습니다.]
“빨리 타.”
산오가 이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끌어당겨져 엘리베이터 바닥에 올라서자, 지하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시야가 점점 낮아지며 칠칠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느꼈을 때, 평소와 다름없이 명랑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제 이름은 FT-7이지만, 칠칠이라는 호칭도 좋았습니다.]
이연은 어쩐지 반질한 눈동자가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와 동시에, 다섯 사람은 지하로 깊이 잠수했다. 엘리베이터는 신속하게 위험 지대를 벗어났다.
쿠웅…….
잠시 후 웅장한 파괴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들이 있는 땅속까지 진동할 정도로 엄청난 세기였다.
*
[초호시 북구에 위치한 단독 주택 폭발 사고의 원인이 관리 부실로 인한 가스 누출로 밝혀졌습니다. 초대 초능력관리청장인 진희원의 가문이자 초능력 관리청의 변이종대응국장 진희수의 자택으로도 유명한 이 거대한 저택에서, 사흘 전 새벽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지반이 일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다는 사실이…….]
“결국 그렇게 되네.”
이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높은 책상에 가볍게 걸터앉은 이연을 D.S가 신경질적으로 밀었다.
“사장이 이렇게 땡땡이가 잦은데 혜강이가 뭐라 안 하냐?”
“혜강이도 지금 놀고 있거든요.”
미래 구출 사건의 성공을 자축하며 명일을 휴일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다음 날이 주말이었던 탓에 월요일을 대체 휴일로 쉬기로 했다. 아마 혜강은 지금쯤 한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연은 휴일을 맞아 D.S의 공방에 놀러 온 참이고.
“야. 작업하는 데 방해하지 마.”
“아, D.S 씨. 저 넘어져요.”
툴툴대며 이연이 일어서자, D.S가 그 옆에 있던 조그마한 상자를 끌어와 뒤적였다. 각종 공구가 서로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폭발 직전 저택을 탈출한 산오와 이연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D.S의 공방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래는 그곳에 없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혜강과 D.S 둘뿐이었던 것이다. 무사히 귀환한 두 사람을 보고 벌떡 일어서는 사람들을 본 이연이 곧바로 물었다.
‘미래는요? 칠칠 씨가 이동시켰는데.’
‘그럼 진희수 집무실에 있을 거야.’
‘국장님한테요?’
이연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칠칠에게 간이 포탈의 좌표를 입력한 것은 D.S다. 긴급 탈출 시에 쓰는 기능이었으니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가 희수의 공간이라는 이야기였다.
‘……D.S 씨는 생각보다 진 국장님을 믿네요.’
죽어라 싫어하는 것 같더니 의외였다. D.S는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그놈이 4단이기만 했어도 거기 안 보냈어.’
어쨌든 어떤 상황에서건 미래를 보호할 거라고 믿은 거잖아요……. 그러나 구박이나 들을 게 빤한 그 말을 이연은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