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뒤늦게 D.S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그때는 진짜로 헛소리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미래를 발견하면 재우셔야 합니다.]’
‘멀쩡해. 지금 중요한 말 하고 있잖아.’
그야, 무려 간이 포탈 기능 작동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말할 법했다. 이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그래도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좀 명확하게 말하라고요…….”
왜 그렇게 미래의 숙면에 집착하나 했더니, 발동 조건이 침대처럼 ‘일정 범위가 확보되는 장소’였던 것 같았다. 굳이 침대를 언급한 건 아무래도 자는 사이 납치되는 상황을 가장 먼저 가정했던 모양이고…….
“미래는 어디로 간 거예요? D.S 씨 공방?”
[저는 입력된 좌표로만 보낼 뿐, 그곳이 어딘지는 모릅니다.]
이연이 잘린 침대 안에 갇힌 칠칠의 팔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남은 침대 잔해가 하얀 모래로 부서졌다.
[그러나 틀림없이 미래에게 안전한 곳입니다.]
“그거 또 못 써요?”
[일회용입니다. 재사용을 위해서는 충전이 필요합니다.]
미래 전용이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쉽네. 이연이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미래의 안전이 보장되었으니, 나머지는 훨씬 쉬웠다. 이연의 시선이 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태진에게로 향했다.
팔찌가 부서져 아무런 능력도 쓸 수 없게 된 태진은 멀리서 세미와 산오를 구경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태진이 조금이라도 이동할라 치면 어김없이 산오의 공격이 위협 사격처럼 날아왔다. 선명한 경고에 자비는 한 톨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태진 역시 진작에 알아챈 듯했다.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기만 한 게 그 증거였다.
비밀 공간은 부서진 지 오래고, 출구는 산오가 가깝다. 방에 있는 장비들은 수많은 전투로 박살 난 지 오래였다. 태진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했다.
그런 태진을 향해 이연이 걷기 시작했다.
“……!”
이연의 걸음은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웠다. 평범하게 그에게로 걸어오는 이연을 태진이 금세 눈치챘다. 아직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었다. 멀리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더 이상 태진의 얼굴에는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으득. 이를 간 남자가 커다랗게 목청을 높였다.
“이세, 쿨럭, 이세미!”
배에 힘을 줘서 상처가 자극받았는지 중간에 목이 메면서도 꿋꿋한 부름이었다.
세미는 현재 산오와의 싸움으로 만신창이였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옷자락이 찢기고 생채기가 났다. 바닥을 구르고 뛰느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로도 태진 대신 산오를 저지하기 위해 분주히 뛰고 있었다.
그러나 태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녀가 현재 어떤 몰골인지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는 그저 이연만을 똑바로 노려보며 명령했다.
“당장 날 데리고 여길 나가!”
커다란 외침에 세미가 움찔했다. 주춤한 것은 찰나였으나, 산오가 그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강한 철골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세미를 잡아 눌렀다. 인상을 일그러트린 그녀가 순간 이동으로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으득.
“헉!”
어깨로 새까만 가시가 깊게 파고들었다.
세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초능력, 특히 순간 이동은 이동 범위와 위치 계산을 위해 다소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온몸을 내달리는 격통에 모이던 기력이 구름처럼 흩어졌다. 세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몸을 관통한 가시를 빼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나 산오의 초능력이 단순한 근력으로 빠질 리가 없다.
“이 멍청한……!”
태진이 답답하다는 듯 노성을 터트렸다. 산오는 바닥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세미에게 다가갔다.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세미에게는 산오가 등장하자마자 태진을 데리고 바로 순간 이동으로 탈출해 버린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굳이 산오를 상대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자리를 선뜻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발악은 끝났나?”
새까만 신발이 세미의 앞에 섰다.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몸은 그림자에 반쯤 가려져 눈동자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세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동안 산오를 쏘아보던 세미의 입이 열렸다. 최대한 의연하게 묻고 싶었지만, 어깨에서 올라오는 고통 때문에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이, 이세은은 어디 있어?”
서늘한 눈길이 세미를 향했다. 산오의 입가엔 비웃음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 매끈한 얼굴을 노려보면서, 세미는 문득 그의 뺨과 목 언저리에 무언가가 점점이 튀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핏자국이었다.
“어떻게 될지 예상하고 보낸 거 아니었나?”
덤덤한 대답에 세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충격에 떨리던 눈가가 이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세미가 가시를 몸에 박은 채로 이동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오의 머리 위 천장으로 이동한 세미가 사각지대에서 산오를 향해 뛰어내렸다. 몸무게를 고스란히 실은 공격이 머리를 노렸다.
“위험…….”
이연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하얀 모래가 접시 모양으로 모여들어 산오의 머리 위에 고였다. 텅! 플라스틱 같은 방해물에 튕겨 나간 세미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끄럼틀처럼 길어진 접시는 세미를 저 멀리 구석으로 미끄러트렸다. 순식간에 상대를 잃은 산오가 심드렁한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짓은 일등이군.”
“넌 진짜 말로 매를 버는 타입이야.”
도와줘도 면박이다. 이연이 투덜대다가 다시 태진을 바라보았다. 믿고 있던 마지막 카드, 세미가 제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태진은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흔들리는 시선이 반대편에 쓰러져 꿈틀대는 세미와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산오, 그리고 걸어오는 이연을 번갈아 훑었다.
“3호의 능력은 내가 준 거야.”
태진이 애써 웃었다. 살면서 수세에 몰려 본 적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던 남자는 근거도 없는 자신감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덕분에 훌륭한 나비가 되었지.”
말을 하면서, 태진은 점점 여유를 찾아 갔다. 따지자면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제가 아니었다면 산오는 무궁화 5단을 받을 일도, 랭킹 1위가 될 일도, 제산을 세울 일도, 도시의 영웅이라고 추앙받을 일도 없었다.
태진이 준 건 단순한 초능력이 아니었다. 제산오의 인생 그 자체였다.
엎드려 절을 하며 감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내게 예의를 지켜, 3호.”
그런 태진을 조용히 노려보던 이연의 턱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이제 와서 은인인 척하지 마. 당신은 산오를 수단으로 썼어. 계획이 잘못될 때 죽이려고 했잖아. 입에 맴도는 많은 말들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서서 비난하지 못한 것은 태진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실험이 성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진이 하는 말이 온전히 틀린 게 아니었다. 산오의 초능력을 만든 것은 태진이다. 산오는 초능력을 가짐으로써 현재의 산오가 될 수 있었다. 태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이연과도 만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건 분명히 빚에 가까웠다.
산오가 그 때문에 죽을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문득 끔찍하게 느껴져서, 이연이 시선을 땅바닥에 떨구었다. 어두워진 얼굴을 흘끗 바라본 산오의 입술이 문득 비틀렸다.
“예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면상을 뭉개는 것은 쉬웠으나, 산오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느릿한 목소리가 빈정댔다.
“목숨을 구걸하는 주제에 입은 살았군.”
날카로운 공기 속에서 그보다 더 날 선 목소리가 태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왜 내 인생이 네놈의 실험으로 판단되는지 모르겠는데.”
태진이 보일 듯 말 듯 눈썹을 꿈틀했다.
“네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는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오는 그에게 인이라도 박는 것처럼 느리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이연은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나는 나비가 아니라 제산오다.”
산오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라곤 전혀 없었다. 평소와 똑같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심드렁한 말투로 태진의 말을 부정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을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건 네가 만든 게 아니지.”
쿵……. 심장이 별안간 빠르게 뛰었다.
맥박이 이유도 모르고 세차게 쿵쾅댔으나 거기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가느다란 실들이 툭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있는 줄도 모르던 감정은 잘게 부서지고 나서야 그 존재를 드러냈다. 야트막한 해방감은 어느새 거대한 파도가 되어 온몸을 휩쓸었다. 울컥. 목구멍 아래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이연은 간신히 그것을 삼키고 주먹을 꽉 쥐었다. 등줄기에서 뒷 목까지 전율이 일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저 굳건한 등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