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45)화 (145/250)

#145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태진의 옆에 세미가 나타났다. 가시가 닿지 않는 구간에 안전하게 태진을 데려다 놓은 세미가 그를 보호하듯 산오 앞에 섰다.

“이건 또 뭐야.”

산오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곧이어 가시들이 방향을 돌렸다. 이번에는 세미를 향한 공격이었다.

“미래야, 잠깐만 눈 감고 있자.”

“삼춘, 괜찮은 거야? 사노가 비밀이 언니한테…….”

이연이 황급히 미래를 돌려 안았다. 얼굴을 품 안에 감싸고 뒤통수를 꾸욱 누르자 미래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지금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연은 난감하게 미래를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지금 산오는…… 비밀이 언니랑 놀아 주고 있는 거야.”

“놀아 줘?”

“응. 놀이공원 갔던 거 기억하지? 그거랑 비슷한 거야. 비밀이 언니 너무 재밌어서 지금 펄쩍펄쩍 날아다닌다.”

희대의 구라를 치며 미래를 달래자, 미래는 긴가민가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보면 놀이기구 타는 거랑 얼추 비슷해 보이긴 했다. 타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도 같고…….

“나랑 산오는 미래를 엄마한테 데려다주려고 온 거거든.”

“엄마?”

미래가 신나서 고개를 반짝 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 다시 품에 묻은 이연이 도닥였다.

“으응. 미래네 엄마가 나한테 부탁을 했어. 우리 놀이공원 같이 간 거 기억나지? 그것도 엄마가 부탁한 거였잖아.”

“맞아. 엄마 대신 삼춘이 놀아 줬어.”

“그거랑 비슷한 거야. 엄마가, 미래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대.”

“정말? 엄마가 미래 보고 싶대?”

“당연하지. 너희 엄마는 맨날 네 이야기만 하는데.”

날카로운 파열음과 파공음에게서 최대한 떨어진 채로 이연이 미래에게 말을 조곤조곤 흘려 넣었다. 다행히 미래는 엄마 이야기에 금방 정신이 팔렸다.

그때, 미래를 어르고 있는 이연의 바지 자락을 뭔가가 잡아당겼다.

[미래 친구님.]

칠칠이었다. 그제야 조그마한 털 인형을 발견한 미래가 놀라서 소리쳤다.

“엄마!”

몸을 숙여 칠칠에게 손을 뻗는 미래를 간신히 일으키고 쪼그려 앉아 칠칠을 주워 든 이연이 꼬질꼬질해진 인형을 살펴보았다. 인형 이름을 엄마라고 지은 모양이다.

“칠칠 씨가 D.S 씨랑 닮은 외형은 아닌데…….”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미래가 야무지게 대꾸했다.

“엄마가 이거 주면서 엄마 생각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이건 엄마야.”

그래서 D.S에게 쉴 새 없이 콜이 들어왔던 거였군. 단순히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영상이 전송되었을 테니까……. 흙과 먼지로 더럽혀진 인형을 아이에게 주기 그래서 좀 망설이는 사이 미래가 칠칠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미래. 저는 칠칠입니다.]

“칠칠? 엄마 아니고?”

[네. 미래의 엄마는 따로 있습니다. 미래를 아주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미래가 동그란 눈을 굴렸다. 그 얼굴에는 옅은 걱정이 어려 있었다.

“왜 걱정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아니, 아니야.”

화들짝 놀란 이연이 재빨리 부정했다. 미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하고 달래자 미래는 시무룩한 얼굴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가 진정하자 칠칠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필요합니다.]

“……예?”

[현재 시간은 오후 11시가 다 되어 갑니다. 미래가 잘 시간이 훨씬, 훨씬 넘었습니다.]

“와! 그런데 칠칠이가 말도 하는구나.”

미래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말하는 거지? 하고 종알대며 칠칠을 이리저리 들어 돌려 보는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아이가 그러든 말든 칠칠은 꿋꿋하게 제 할 말만 했다.

[미래를 눕힐 만한 곳이 있습니까?]

“있어 보여요?”

[미래는 푹신한 이불을 좋아합니다.]

“…….”

D.S가 인공지능 설정을 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까지 수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애를 재울 타이밍이냐고……. 이연이 그런 눈으로 바라봐도 칠칠은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로봇이라 그런지 눈치가 좀 없었다.

산오 쪽을 흘끗 바라보니 세미와 싸우느라 바쁜 것 같았다. 싸운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형국이긴 하지만…….

세미가 산오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고작 순간 이동 능력 하나뿐. 원거리에서 퍼붓는 산오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어찌어찌 산오에게 접근을 한다고 하더라도 육탄전에서 상대가 될 리 없고.

“윽!”

막 산오의 등 뒤로 이동해 옆구리를 걷어차려는 발목을 커다란 손이 잡아챘다. 가벼운 몸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훌쩍 날아갔다. 벽에 처박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순간 이동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어딘가가 부러졌을 터였다.

“이 상황에 미래가 잠이 오겠냐고요…….”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전투하느라 생기는 폭음이 쉴 새 없이 들리는 난장판에서는 어른도 못 잔다.

[미래 친구님의 신체적 조건으로 판단했을 때, 육아 방침에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저기요. 키는 유전적 요인이 제일 크거든요.”

[건강한 생활 패턴을 유지하셨는데도 그렇게 크셨단 말씀입니까?]

“…….”

2년 동안 잠만 퍼질러 잤다.

[침대가 필요합니다.]

슬슬 입씨름하기도 지겨워서, 이연이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뜬금없는 요청이 황당할 뿐이지, 까짓것 침대 만들어 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누웠는데 미래 안 자기만 해 봐라……. 유치하게 벼르는 동안 하얀 모래가 어린이용 침대를 하나 만들어 냈다. 까다로운 요청대로 푹신한 이불까지 완벽하게 실체화되자, 이연이 침대에 미래를 내려놓았다. 의도적으로 미래의 시야에서 전투 장면을 가린 채였다. 품에서 떨어진 미래가 어리둥절하게 이연을 바라보았다.

“미래야, 여기 눕자. 잘 시간이래.”

“웅?”

이 상황에 미래가 눕겠나 싶었지만 의외로 미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의 포용력은 놀랍군……. 이연은 귀마개 머리띠도 하나 만들어 미래에게 씌워 주었다. 아까부터 거칠게 울리던 전투음이 영 신경 쓰이던 차였다.

“삼춘.”

동그란 털 귀마개를 쓴 미래가 오도카니 앉은 채로 이연을 끌어당겼다. 허리를 숙인 이연이 미래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미래가 이연의 귀에 소곤거렸다.

“있잖아, 비밀이 언니한테 인사하고 자면 안 돼?”

“그건…….”

지금 세미를 바라보면 미래가 덩달아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겠지.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이연이 미래와 눈을 맞추고 머쓱하게 웃었다.

산오와 싸우는데 행색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조금 전 잠깐 확인한 걸로도 이미 상당히 꼬질꼬질해 보였다. 미래는 세미와 아주 깊은 유대를 쌓은 모양이니, 만신창이가 된 세미의 상태를 보면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갈 것이다.

당장 세미가 한 짓에 대해 미래에게 차근차근 설명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미래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그 언니도 지금은 미래가 푹 자길 원할 거야. 나중에 만나면 인사하자.”

이연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최선이었다. 그 말에 미래가 꼬물꼬물 누워서 이불을 덮었다. 목까지 올라온 새하얀 이불 끝을 조그만 손가락이 꼭 쥐었다.

“삼춘.”

“응?”

“우리 엄마도 맨날 나중에 만나자구 했어.”

“…….”

어린아이치고는 과하게 담담한 어조였다. 순간 말문이 막힌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다들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계속 기다리고 있어.”

나이에 맞지 않는 배려를 중얼거린 아이는 오늘따라 더 시무룩해 보였다.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꼭꼭 숨기는 데에 익숙해진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연은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잊지 않았어.”

“…….”

“미래를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미래가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당겼다.

“응.”

이연은 미래가 눕느라 침대 구석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칠칠을 주워 옆에 놓아 주었다. 어깨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미래가 자연스럽게 칠칠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징하기까지 한 기계음이 다시 새어 나왔다.

[미래가 침대에 누운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 예. 빨리 재워 주세요.”

[안전 범위 확보 완료. 대상자 접촉 중. 근처에 계신 분은 물러서 주세요.]

“웅?”

“예?”

[사전 설정 된 위치로 이동합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칠칠에게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연이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손을 떼고 반 발자국 물러서자, 칠칠의 주변으로 구 모양의 범위가 동그랗게 퍼졌다. 누워 있는 미래를 충분히 덮을 정도의 크기였다.

순간 이동 특유의 부유감을 느낀 미래가 놀란 얼굴로 눈을 깜짝 떴다. 이연과 미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칠칠을 제외한 범위에 닿은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불은 물론이고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까지 범위에 맞춰 정확하게 잘린 탓에 공중에 잠깐 체공한 칠칠이 동그랗게 뚫린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런 형태는 처음 봤지만, 정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연의 입술 새로 멍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포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