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44)화 (144/250)

#144

이어붙인 모니터에는 여전히 커다랗게 감시 카메라 화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조금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의자가 텅 비었다는 것뿐이었다. 끄트머리가 깨져 지직거리는 액정을 흘끗 바라본 이연이 몸을 돌렸다. 여길 빠르게 나가려면 우선 산오부터 찾아야 했다.

통신이 두절된 탓에 혜강의 안내를 기대하지는 못해도, 이연에게는 이미 전달받은 지도가 있었다. 간략한 구조여도 얼추 알아볼 정도는 될 것이다. 산오가 아직 세은과 싸우는 중이라면 입구 쪽에 있을 테니, 그쪽을 향해 가면 된다.

“으응…….”

그때, 품 안에서 조그마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연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미래야? 괜찮아?”

멍한 눈은 몇 번 깜빡이고는 초점이 잡혔다. 곧 동그란 눈동자에 이연의 얼굴이 담겼다.

“으우……. 이연 삼춘?”

아, 감사합니다. 이연이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인사를 읊조리며 미래를 살폈다. 미래의 목소리는 조금 잠겼을 뿐 멀쩡했다. 태진의 뉘앙스로는 이미 실험을 진행한 것 같아서 걱정했었는데, 아직 초기 단계였던 모양이다.

“삼춘이 왜 여기에 있지? 여기는…….”

미래는 주위를 두리번댔다. 작은 머리통이 휘휘 돌아가다 어느 곳에 딱 멈추었다. 이연 역시 덩달아 미래의 시선을 좇았다.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소녀가 얼핏 보였다.

“어…….”

쓰러진 세미를 발견한 미래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삽시간에 바둥거리는 몸을 이연이 급하게 추스르며 균형을 잡았다.

“왜, 왜 그래?”

이연의 물음에도 미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려 달라는 듯 몸부림치는 것을 얼결에 놔주자, 미래는 조금 비틀거리다가도 쌩하니 달려 나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실험실에 울려 퍼졌다.

“비밀이 언니!”

넘어질 듯 거친 달음박질로 세미에게 도달한 미래가 세미를 마구 흔들었다. 모로 쓰러져 있느라 얼굴에 쏠려 있던 머리카락이 따라서 달랑였다. 세미가 반응이 없자, 미래가 이연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삼춘, 비밀이 언니 왜 이래? 많이 아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절박했다. 얼결에 뒤에 남겨져 눈만 깜빡이고 있던 이연이 다가왔다.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래야, 그 사람 비밀이 언니 아니야. 잘 봐…….”

워낙 닮은 쌍둥이다 보니 세은과 세미를 착각한 모양이었다. 네가 지금 깨우려고 하는 그 사람은 너와 놀아 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아이가 충격받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미래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무슨 소리야! 비밀이 언니 맞아. 비밀이 언니가 눈을 안 떠. 왜 이런 거야? 언니, 언니…….”

미래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엉엉 울며 작은 손이 하염없이 세미를 잡아 흔들었다. 거센 손길에 이연이 미래를 잡아끌었으나, 미래는 뿌리치고는 세미를 놓지 않았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꼭 쥔 옷자락은 잔뜩 구겨진 지 오래였다.

그 울음 소리가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돌연 세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에 찬 신음성이 입술 새로 작게 흘러나왔다.

“으, 뭐야…….”

“언니! 비밀이 언니!”

눈꺼풀이 힘겹게 뜨였다. 세미가 깨어났다는 것에 안도한 미래가 손에 힘을 푼 틈을 타서 이연이 미래를 안아 들었다. 상황을 파악한 세미가 태진을 데리고 도망가면 큰일이다. 이연이 경계심 어린 얼굴로 태진 쪽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움직일 힘이 없는지 조용했다.

“언니, 괜찮아?”

미래는 이연에게 안겨서도 세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아이의 목소리에 잔뜩 구겨진 눈가가 떨렸다. 위치를 찾듯 삐걱이던 고개가 곧 이연과 미래를 발견했다. 이연이 미래를 보호하듯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연의 적의 어린 시선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세미가 벌떡 일어났다.

“너, 어떻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가만히 있었어! 삼촌이 왔는걸…….”

“하여튼 말을 듣는 법이 없어! 위험하다니까!”

정신을 차린 세미는 세은과는 전혀 달랐다. 나긋하고 순한 어조도, 부드러운 인상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익숙하다는 듯 말을 건넸다. 세미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어?’

무언가가 뒤통수를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이연은 멍청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은의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이 생각의 틈바구니에서 빛났다. 비틀려 있던 조각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세은의 ‘이비밀 언니’는 세은이 아니었다.

세미였다.

“그렇군.”

나직한 음성이 희미한 웃음을 담고 뒤에서 울렸다. 미래를 향해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세미가 단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이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 꼬맹이가 왜 그렇게 팔팔한가 했더니.”

어느새 일어난 남자가 신기루처럼 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는지 자세는 조금 삐딱했으나, 방금 전 이연에게 보였던 처절한 몰골은 온데간데없이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세미가 내 말을 안 들었구나.”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닿자, 세미가 겁에 질린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됐다.

조그만 비품실에서 미래를 처음 만났던 것도, 그 후 계속 돌봐 줬던 것도, 브이로그를 편집해 주고, 일상을 지켜봤던 것도.

그리고 마지막까지 보호했던 것도.

“미래야.”

이연의 속삭임에 미래가 시선을 들었다. 똘망한 눈빛을 흘끗인 이연이 아이에게만 들리도록 소곤댔다.

“아까 삼촌이 보니까 눈이 퉁퉁 부었던데, 미래 의자에 앉을 때 울었지?”

“으응.”

“왜 울었어? 무서워서?”

미래는 음, 하고 눈알을 굴리다가 마찬가지로 이연에게 속삭였다.

“비밀이 언니가 울었어.”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괜찮을 거라는 말을 엄청 많이 했어. 근데 언니는 안 괜찮아 보였어.”

“…….”

“그걸 보니까 미래도 슬퍼졌어.”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오르는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이연이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래는 다정한 품을 파고들었다.

“괜찮아. 세미야.”

태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더없이 자비로운 어조로, 부드러운 권유가 세미에게 건네졌다.

“이리 오렴.”

세미가 움찔했다. 이연은 혼란과 두려움에 질린 눈동자가 태진을 향한 와중에도 미래에게 슬쩍 시선이 닿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세미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죄책감으로 범벅된 얼굴이 미래를 피하듯 바닥을 향했다.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세미와 태진이 함께 있으면 안 된다. 순간 이동 능력자가 모습을 감추면 목적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본능적인 위기감에 이연이 세미를 불러 세우기 위해 막 입을 열 때였다.

콰앙!

아마도 입구 쪽이라고 추정되는 벽면이 통째로 날아갔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날린 건지 파편들이 반대편 벽에 몽땅 부딪혀 오히려 부서진 곳은 깔끔했다. 무수히 날아간 벽의 조각들은 수많은 모니터 액정을 뚫었다. 투툭, 툭……. 뒤늦게 유리 부스러기들이 떨어졌다. 미래가 갇혀 있던 방을 비추던 화면은 죄다 까맣게 변하다 못해 내부 부품들을 슬쩍 내보이고 있었다.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세미 역시 놀랐는지 움직이다 말고 그대로 정지했다. 그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미래의 두 귀를 틀어막아 준 이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박살 난 벽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커다란 인영이 삐딱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할 놈이야 하나밖에 없다.

“제산오…….”

그 누구보다 요란한 등장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구석에 처박히는 걸 좋아하는군.”

산오가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태진을 향한 적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태진이 이런, 하고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안녕, 3호.”

일부러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의도가 저열했다. 정작 산오는 아무 반응 하지 않았지만, 이연이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보니 훨씬 늠름해졌는걸.”

태진은 마치 그들이 친근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이전에 산오를 죽이려고 했던 기억은 아예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내가 준 능력은 잘 쓰고 있니?”

그도 그럴 것이, 태진에게 산오는 그의 연구 인생 최대의 성과였다. 제 손으로 만들어 낸 무궁화 5단, 랭킹 1위. 산오의 업적들이 기록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태진의 능력은 영원히 입증 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망이라도 났나 보군.”

산오가 웃기는 농담이라도 들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

“곱게 죽기는 글렀겠어.”

그 말과 동시에, 바닥과 벽면에서 새까만 가시들이 솟아올랐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자라난 가시가 태진을 노리고 몰려들었다. 쉬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터지며 이연의 옷자락까지 휘날렸다.

“안……!”

높은 톤의 외마디 비명이 터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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