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43)화 (143/250)

#143

눈가를 굳힌 태진이 주위를 두리번댔다. 세미는 아직 쓰러져 있고, 이연은 고통에 신음 중이니 이 공간에서 말소리를 낼 사람은 태진밖에 없어야 했다. 들린 것은 여자아이 목소리였으므로 산오도 아니었다.

태진이 당황하는 사이, 경쾌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쪽 공간만 유독 벽이 얇습니다. 벽이 아니라 숨겨진 문으로 추정됩니다.]

“……!”

그제야 태진은 어디서 들리는 음성인지 눈치챘다. 급히 몸을 틀자, 거대한 모니터 옆 구석에 작은 털 뭉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연이 내내 들고 있던 인형이었다.

[정상적인 개폐 방법을 알지 못하는 관계로 강행 돌파 합니다. 재물 손괴에 대해 미리 사과 말씀 전합니다.]

반질한 인형의 눈에 새빨간 빛이 돌았다. 지이잉. 까딱이는 움직임을 따라 빨간 선이 그려졌다. 레이저였다.

“어딜…….”

혀를 찬 태진이 칠칠에게로 다가갔다.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 사이로 하얀 모래가 모여들었다. 칠칠의 위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태진은 작은 솜인형 같은 건 단번에 짜부라트릴 만한 바윗덩이를 만들어 내 곧바로 떨어트렸다.

[응?]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칠칠이 고개를 들었다. 그 탓에 레이저의 방향이 잘못 조준되어 바위를 찔렀으나, 전부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처음보다는 작아졌으나 여전히 커다란 돌덩이들이 인형에게로 쏟아졌다. 작은 흙구름이 일었다.

그 후로는 침묵이었다.

“귀여운 발악이네.”

돌무덤 앞에서 태진이 가볍게 빈정댔다. 그리고 다시 이연의 상태를 보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귀여운 친구죠.”

옆에서 날아온 레킹 볼이 태진을 날려 버렸다.

쿠당탕! 방비할 틈도 없이 밀쳐진 태진의 몸이 저 멀리 나뒹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달리는 차에 치인 것처럼 어떠한 쿠션도 없이 가해진 충격이 몸을 지배했다. 평생 운동이라곤 담을 쌓고 살아온 연구자는 팔다리만 부들댈 뿐 쉽게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 앞으로 이연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은 선명하게 존재감을 표출했다. 태진은 이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댔지만, 유의미한 이동을 하지는 못했다.

“이거 봐, 나만 돌발 상황에 이렇게 얻어맞는 거 아니라니까.”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투덜거림을 내뱉는 이연 역시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저, 저리 가.”

짜증이 가득한 신경질이 흩뿌려졌다. 이연이 다가오는 이유를 태진 역시 알아챈 모양이었다. 태진의 몸 주변에서 흘러나온 하얀 모래가 두터운 벽으로 변해 그를 감쌌으나, 곧 다시 모래로 변했다. 태진이 한 것이 아니다. 영문 모를 현상이 그를 무력하게 했다. 남자는 횡설수설 단편적인 말만 내뱉었다.

“내 거야. 너는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제 손목을 감싸 쥐는 태진의 손가락 사이에 하얀 모래가 스며들었다. 억지로 떼어 낸 살갗에 감긴 팔찌와 그 위에 박혀 있던 보석들이 보였다.

“그게 왜 삼촌 거예요.”

땅에서 튀어나온 모래가 날카로운 형상으로 변해 태진의 팔에 쇄도했다.

챙강!

팔찌에 달려 있던 보석들을 정확히 향한 공격이었다. 유리구슬처럼 빛나던 보석들이 산산조각 나며 잔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 잔해들을 보는 태진의 시선이 멍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연이 중얼거렸다.

“제 거지.”

태진이 칠칠을 상대하러 간 사이, 이연은 온몸에 내리꽂히는 고통 속에서도 제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무시무시하게 빨려 나가는 기력 때문에 정신이 멍했다. 간신히 들어 올린 손으로 이연은 주먹을 쥐듯 손을 그러모았다.

조금 전 이연이 분노로 아무렇게나 공격할 때, 태진의 주변을 보호하듯 휘돌던 모래가 제 감정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울렁였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곧 꽤 그럴듯한 가설이 만들어졌다.

제가 능력을 더 써서 이 기계를 부술 필요는 없었다. 이연을 압박하고 있는 이 기계들은 태진이 실체화 능력으로 만들었다.

이 능력은 원래 이연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다시 없애면 되는 거였다.

등이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이 상황에서 이 이상 팔팔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력을 계속 빼앗길 테고, 이연의 힘은 점점 빠질 테니까.

영겁이 흐르는 것 같았다. 팔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천이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스러졌다. 모래 알갱이가 몇 알 떨어져 나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기계는 조금 부서진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몸에서 떨어진 지 오래된 기력은 끝내 제 주인을 알아봤다. 그다음은 식은 죽 먹기였다.

기력 가공 기계는 곧 완전히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태진은 제 능력이 아닌 것들이 사라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연은 텅 빈 자리에서 떨어진 제 고글을 챙겨 들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칠칠을 향해 바위를 내리꽂는 태진이 보였다.

“이걸로 끝이네요.”

이연은 죽어 가는 짐승처럼 부들거리는 태진을 흘깃 바라보았다. 몸을 웅크리고 다리를 굽힌 남자는 생각보다도 더 작았다. 옅은 색의 눈동자에 일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이연은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몸을 돌렸다. 부서지다 만 벽과 그 앞에 쌓여 있는 돌덩이들에게로.

“칠칠 씨!”

이연은 급하게 달려가려다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능력을 해제하자, 묵직한 바위들이 잘게 쪼개져 날아갔다. 그 안에 못생기게 찌그러진 분홍 털 뭉치가 보였다. 이연이 재빨리 그를 안아 들었다. 뽀얗던 연분홍빛 털이 흙먼지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칠칠 씨, 괜찮아요?”

이연이 태진에게로 다가갈 때, 가만히 손안에 쥐여져 있던 칠칠이 이연의 손목을 톡톡 두드렸다. 말 대신 행동으로 존재감을 표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연은 일부러 칠칠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실험대에 앉기 전, 교묘하게 실험대 아래로 칠칠을 떨어트렸다. 이연의 기력을 뽑아 먹을 생각에 신난 태진은 조그마한 인형이 제 발밑을 통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칠칠은 탐색 기능을 가진 로봇이다. 비록 미래를 찾지는 못하지만, 내장된 레이더로 주변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숨겨진 방 같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통신 기능에 다소의 손상이 있는 듯합니다. 수리가 필요합니다.]

“이따 D.S 씨에게 데려다줄게요. 금방 고쳐 줄 거예요.”

다행히 칠칠은 멀쩡한 것 같았다. 이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칠칠이 부수다 만 문을 바라보았다. 칠칠의 눈이 다시 붉게 빛났다.

지이잉. 그려지다 만 붉은 선이 다시 이어졌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기는 것은 금방이었다. 발로 툭 밀어 파편을 넘어트린 이연이 망설임 없이 벽을 넘었다.

비밀 공간 안쪽에 쌓인 온갖 기괴한 기계들과 모니터, 연구 자료들.

그리고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

이연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기력이 부족해 헐떡이면서도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힘이 빠지는 발을 억지로 내디뎠다. 작고 씩씩한 친구를 향한 길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래야!”

태진의 수법은 십 년 전에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늘 인질을 가까운 데에 잡아 둔다. 그때도, 지금도.

“미래야, 괜찮아?”

정신없이 달려간 이연이 미래의 어깨를 살그머니 잡고 흔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미래의 눈가가 부어오른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이연이 이를 악물었다.

미래가 실험 중에 죽으면 곤란한 것은 진정원 쪽이다. 아이 보호를 명목으로 본가에 데려온 건데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되니까. 그러니 미래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쉽지도 않았을 것이다. 묶인 가죽끈 사이로 발갛게 부어오른 살이 보였다. 기억 속에서 헐렁한 옷 사이로 보이던 손톱자국이 오버랩처럼 스쳐 지나갔다.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린 이연이 끈에 손을 대자 하얀 모래가 모여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죽끈을 수월하게 잘랐다. 이연은 지탱할 힘이 없어 의자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몸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미래야.”

겉으로 보기에 커다란 상처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태진의 실험은 기력을 건드리는 종류이기 때문에, 기력 기진 상태는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초능력자를 비초능력자로 만들려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어찌 되었든 병원에 먼저 가는 게 좋았다. 이연이 미래를 추슬러 안으며 비밀 공간을 나왔다. 그 뒤를 칠칠이 아장아장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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