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42)화 (142/250)

#142

“진정원은 진희수라는 멋들어진 아웃풋을 가지고도 만족을 못 했지.”

이연의 상념을 끊은 것은 태진이었다.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걸친 남자가 동화라도 읽어 주는 것 같은 말투로 조곤조곤하게 사실을 속삭였다.

“둘째인 진정원은 첫째인 진정욱보다 단수가 낮거든. 그게 그 여자의 가장 큰 콤플렉스라서.”

진씨 집안 사람들에게 초능력 등급은 무엇보다 확실한 계급이었다. 이미 집안 내의 권력을 욕심껏 움켜쥐고도 안심하지 못했다. 가주 자리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초능력 등급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건 언제든 제 오빠인 진정욱에게 밀릴 수 있다는 이야기와 동일했다.

그런 와중에 진정욱이 자신의 손녀, 강미래를 본가에 데려왔다.

불온하기 짝이 없는 싹이었다.

진정원에게 미래의 존재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만약 미래가 희수와 같은 등급이 된다면? 진정욱은 잠깐 머리를 수그린 뱀이다. 지지가 나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행히도 희수가 미래를 대신 돌봐 주겠다고 나섰다. 융통성이 없어 늘 속을 썩이던 아들이 그때만은 기특했다. 부모님보다는 확실히 더 친한 사촌이라는 사실은 그럭저럭 아이의 보호자로 밀어붙일 만한 명분이 되어 주었다. 미래가 조부모에게서 떨어져 제 범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진정원은 대책을 강구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태진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내 연구 업적을 다 알고 있더구나. 지형 기능 설정 같은 게 아니라 내 진짜 업적을.”

진정원은 파격적인 조건을 걸고 태진을 불러들였다. 협상 테이블에서 태진은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울질을 이미 끝낸 얼굴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급한 자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는 것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쉬웠다. 원하는 것을 전부 약속받은 태진이 선의라도 베푸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이제 가주님의 조건을 들을 차례군요.’

그 말에 진정원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비초능력자를 초능력자로 만들 수 있다면.’

그녀의 요구는 단 하나.

‘초능력자를 비초능력자로 만들 수도 있을 테지.’

자신의 권력 유지.

“정확히는 미발현자를 비발현자로 만들어 달라는 거겠지만.”

눈을 크게 뜨고 굳어 버린 이연을 향해 태진이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이연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당연하게도, 이 일은 극비로 진행되어야 했다. 가문의 초능력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진씨 가문의 절대적인 명제를 반하는 가주가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진정원은 미래의 초능력 발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아쉽게도 발현이 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따져 보면 네가 부탁받았을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도 좋은 일일걸.”

가벼운 음성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들렸다.

“미래가 비초능력자가 된다면 이 집에서 쫓겨날 테고, 그렇다면 진덕선이 데려갈 수 있게 되잖니.”

그 어머니는 다행히 딸이 초능력자든 아니든 별 상관 없는 모양이고, 본인이 비초능력자여도 잘 사는 모양이고. 편안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손톱이 박힐 정도로 강하게 쥔 주먹이 펼쳐지며 팔이 휘둘러졌다. 품이 넓은 소매가 펄럭이며 바람 소리를 냈다. 그 선을 따라 하얀 모래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가시로 변한 모래는 날카로운 빛을 띠고 태진에게 날아갔다.

쾅, 쾅, 콰앙! 거대한 폭음이 연달아 나며 태진이 있던 자리에 가시들이 꽂혀 들었다. 콰직. 살벌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바닥과 벽이 깨지며 흙먼지가 날렸다. 뒤에 있던 모니터들 중 몇 개가 가시 파편에 깨지며 화면이 꺼졌다.

이 정도 공격으로 태진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먼지가 걷힌 후의 태진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방어에 사용한 듯한 검은 방패가 뒤늦게 모래로 변해 흩날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굳은 얼굴의 이연이 태진을 노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렇게 화를 낼 필요까지야.”

태진은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 위로 미래가 찍힌 영상을 보는 D.S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미래를 사지로 밀어 넣었다고 자책하던 목소리가 덮어씌워졌다. 이연은 D.S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인상이 부드러워지는 걸 봤다. 미래와 살 날을 그리는 것을 봤다.

태진의 말대로 비초능력자인 것이 확실시되면 미래는 D.S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두 사람에게 더 행복할 수도 있었다. 이연으로서는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는 당사자가 아니었으니까.

“미래한테도 선택할 권리가 있어.”

그러나 그게 이런 방식이어서는 안 됐다.

그 누구도, 미래가 초능력을 원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뭘 하고 싶은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른들 선에서 이루어졌다. 미래는 커다란 손에 내내 휘둘려 다녔다. 아이는 어떤 것도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초능력을 발현시킬지 말지조차.

“걔가 선택하게 내버려 둬.”

이연이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씹어 뱉었다. 분노가 뇌수 사이사이에 질척하게 고여 들었다.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공격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모래를 일으켰다. 새하얀 알갱이가 마구잡이로 날렸다.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나부꼈다.

생각 없이 휘두른 공격은 이전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태진은 여유롭게 이연의 공격을 전부 방어해 냈다. 이연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태진을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그의 주변으로 팔찌에서 불러낸 모래들이 보호막을 치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저 능력을 뚫을 수만 있다면. 그런 염원이 강하게 피를 타고 돌았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실체화 능력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어?’

이상을 느낀 이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태진의 주위에 있던 모래가…….

그러나 그 위화감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보다 태진의 말이 더 빨랐다. 태진은 마치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웃었다.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

마치 기폭제처럼, 그 말을 듣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이미 실험은 시작한 지 오래야.”

그와 동시에 태진의 뒤에서 집 안의 온갖 장면을 보여 주던 감시 카메라 화면들이 전부 꺼졌다. 그다음, 일제히 어떤 화면이 송출되었다.

방 안은 여러 개의 디스플레이가 합쳐져 큰 화면으로 확대되어 보였다. 군데군데 깨진 액정이 있긴 했으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앉기엔 너무 커다란 의자에 미래가 묶여 있었다.

“미…….”

이연이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마와 팔다리에 전극을 붙인 미래는 기절했는지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었다. 안색이 창백했다.

눈가에서 뺨으로 흐른 눈물 자국이 보였다.

“미래를 풀어 줘.”

난리통에도 내내 쥐고 있던 칠칠의 몸통이 짜부라질 것처럼 뭉쳐졌다. 이연은 부드러운 털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드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동요했다.

“하하.”

소리 내어 웃는 태진의 주위로 하얀 모래가 모여들었다. 싸움으로 부서졌던 실험대와 기구가 다시 만들어졌다. 기억 속에 있던 광경 그대로였다. 태진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그러려면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것 같은데.”

이연의 눈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넋이 나간 것 같은 발걸음을 태진에게로 내딛었다.

태진은 이연이 그의 앞에 도달할 때까지 재촉하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착하구나.”

제 발로 걸어온 실험체를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은 태진이 팔을 잡아끌었다. 털썩, 맥없이 실험대에 주저앉은 몸에서 힘이 풀리며 칠칠이 떨어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연분홍색 인형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십 년 동안 네 초능력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생각을 해 봤거든.”

이연의 사지에 천이 둘둘 감겼다. 천과 이어진 수많은 전선은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웅……. 기계가 세차게 작동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내가 너보다 능력을 더 잘 쓰는 것 같은데.”

이마에 전극을 붙이느라 고글이 벗겨졌다.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글 역시 바닥에 떨어졌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것처럼 소곤대는 목소리는 모니터와 이연의 상태를 연신 점검했다.

“넌 어차피 숨기고 살 거고, 그럼 내가 계속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야.”

태진이 기계를 살피느라 숙였던 허리를 폈다. 이연은 그 와중에도 연신 미래가 있는 화면을 바라보느라 태진의 말에 대답할 여유도 없는 듯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액정 너머의 아이를 계속해서 담았다.

“오히려 그게 세상에 더 이롭지 않겠어?”

찰칵.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진동이 이연에게 전달되었다.

“헉!”

이연의 눈이 커다랗게 홉떠졌다. 오래전 사경으로 몰고 갔던 격통이 다시 덮쳐들었다.

“아, 윽……!”

퍼득 떠는 몸을 태진이 잡아 눌렀다. 그를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았던 힘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내내 느긋하던 눈동자에 언뜻 희열이 섞였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태진은 인간을 뽑아 먹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채취한 기력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정이연이라는 인간 자체가 반영구적인 충전기나 다름없었다.

그때야 뭘 모르고 놔줬지만, 멍청한 실수를 두 번 하지는 않는다. 탐욕에 물든 눈빛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청년을 지켜보았다. 곧 그도 받아들일 것이다. 평생 태진의 그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뭐, 태진이 만드는 것들은 의도야 어떻든 발전된 물품들이었고, 이연은 좋은 세상을 원하니 이 또한 나쁘지 않은 길일 터였다.

[찾았습니다.]

명랑한 기계음이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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