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41)화 (141/250)

#141

“그래도 우리, 같은 처지인데.”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쉬운 쪽이었다.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린 세은이 헐떡이는 숨 너머로 빈정대듯 말했다.

“너무 안 봐주네요.”

세은도 이런 말 몇 마디로 산오가 정말 봐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숨 돌릴 틈을 벌기 위한 시간 끌기였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산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같아?”

낮은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은 싸늘한 경멸이었다.

“너랑 내가?”

혐오의 농도는 아주 짙었다. 세은이 일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혔을 정도로.

“……나비가, 됐잖아요. 당신은 3호니까 따지면 제 선배…….”

세미는 초능력이 발현되었지만, 세은은 아니었다. 세미는 기꺼이 세은과 함께 있으며 그녀를 도와주었으나 그걸로는 불충분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태진을 알게 되었다. 세은은 10호가 되었다.

실험은 고통스러운 만큼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허물을 벗는 데에 성공했고, 태진은 실적이 나온 결과물을 곁에 두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산오에 대한 이야기 역시 몇 번인가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태진이 세은에게 주입한 것은 이연의 기력과 산오를 실험할 때에 채취해 뒀던 기력 일부였다. 실체화 능력에서 파생된 광물 변형 능력, 광물 변형 능력에서 파생된 암석 조종 능력. 태진의 실험은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18살 때 이미 소년범으로 쫓기다가 이태진에게 제 발로 기어들어 가고, 지금까지 발이나 핥고 있는 개 주제에.”

“……!”

“네 같잖은 거짓말에 속을 만한 놈이라고 해 봤자 정이연 정도지.”

산오가 빈정거렸다. 세은은 태진과 함께하면서 이름을 바꾸었으나, 흔적까지 모두 지우지는 못했다. 산오에게는 그런 걸 충분히 캐서 분석할 수 있는 유능한 비서들이 있었고.

“제 예상보다 꽤…… 철저하네요.”

세은은 헐떡이면서도 칭찬하듯 웃었다. 그녀가 본 산오의 모습은 내내 관심 없다는 듯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는 것뿐이었는데, 잊혔다고 생각한 과거를 들고 올 줄이야.

“뭐, 부정해도 소용 없어요. 당신이 제 선배라는 사실은 안 변하니까.”

선배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는 목소리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산오가 별다른 대꾸없이 계속 듣기만 하자, 세은의 말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태진이 산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늘 세은과 비교할 때였다. 고작 4단. 태진에게 세은의 능력은 그렇게 불렸다. 태진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세은은 모니터에 떠 있는 수치 앞에서 늘 주눅들어야 했다.

두 사람이 집에 침입한 것을 보고 나서야 세은은 파티에서 본 남자가 태진이 그토록 말하던 ‘제산오’라는 사실을 알았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다. 세은은 태진이 지시한 유인 작전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랭킹 1위니 뭐니 해도, 고작 인공 능력자인 주제에 남들과 다른 척……. 양심에 찔리지 않는 게 대단하네요. 아버지한테 선물 사 들고 와서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슬쩍 웃으며 빈정거리는 어조는 거짓말을 들켜 가냘픈 목소리를 흘리던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순하고 여린 감정이 전부 드러나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세은 본인 역시 이쪽이 더 편해 보였고.

흐릿하게 웃은 세은이 혼잣말치고는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하긴……. 거의 실격당했었지. 더 이상 실험할 의미도 없을 정도로 무능해서.”

악의로 가득찬 말에도 산오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평연한 시선이 싸늘하게 노려보는 세은을 마주했다.

“숨은 충분히 돌렸나?”

무심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세은이 멍하니 다가오는 산오를 바라보았다.

세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연과 산오가 함께 다닌다고 해서 같은 성격인 건 아니었다. 산오는 오히려 태진을 닮았다. 그는 멈추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인간이다. 주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류였다.

“죽으면 숨 같은 건 안 돌려도 될 텐데.”

까만 눈동자 속에 세은이 비쳤다. 그 안에서 초록색 불꽃이 세은을 태우듯 타올랐다.

*

“헉…….”

뺨을 타고 땀이 흘렀다. 이연이 턱 끝으로 떨어지려는 땀방울을 거칠게 닦았다. 태진을 압박해 비장의 수를 꺼내게 한 건 좋았는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같은 능력으로 겨뤄야 한다니.

몇 번 공방을 주고받아 본 결과, 태진이 운용하는 실체화 능력은 이연의 것과 세기가 비슷했다. 이연과 싸우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기력을 출력하는 것도 있겠지만, 비초능력자가 무궁화 5단급의 초능력을 사용하면서 이만큼의 기력 운용을 보여 주는 것도 터무니없긴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이만큼이나 제 기력이 남아 있었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마 남은 이연의 기력을 모두 긁어모으긴 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연에게 이기면 어차피 충전될 기력이므로.

“체력이 좋지 않은가 보구나.”

“기절할 때까지 기력을 뽑아 간 누구 때문에요.”

하다 하다 태진에게 체력 지적을 당하다니. 이연이 불퉁하게 대꾸하며 손을 휘저었다. 새하얀 모래가 구름처럼 모여들다가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작은 폭풍이 이연의 손짓에 따라 태진에게로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리고 바닥에 생채기가 날 정도로 강한 세기였다.

그러나 그 공격은 곧 막혔다. 맹렬한 기세로 소용돌이치던 폭풍은 눈 깜짝할 새 사그라들었다. 이연과 똑같은 행동으로 같은 공격을 만들어 낸 태진이 여유롭게 자세를 바로 했다. 이연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이연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든 태진은 동일한 운용으로 공격을 상쇄했다. 마치 기 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뭘로 공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울처럼 죄다 반사해 버리니 레퍼토리도 다 떨어져 가는 판이었다.

“그동안 많이 써 봤나 봐요?”

초능력도 신체 능력처럼 쓸수록 숙련된다. 힘이 강할수록 더더욱. 단순히 실험을 하면서 다루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이 정도의 운용 능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뭐, 꽤 능력 있는 제자가 생겨서.”

세미의 초능력 팔찌에 왜 그렇게 관심을 보였는지 알 만했다. 그 많은 기력을 실험에만 쏟아붓다가 자기가 직접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홀하게 다가왔겠는가.

이연이 잘 보이지 않는 실험 가운 안쪽의 액세서리를 흘끗였다. 흐릿하게나마 팔찌에 주렁주렁 달린 보석들의 색이 조금 탁해진 것 같기도 했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라고 하면 당연히 보석에 저장되어 있을 기력을 전부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태진이 가진 이연의 기력은 자력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기력이 다해 능력을 쓰지 못하게 되는 시점이 되면 끝이었다.

‘언제 바닥날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

이연이 혀를 찼다. 태진의 팔찌에 있는 보석은 세미가 만들었던 초능력 팔찌에 박혀 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심지어 여러 개이기까지 했다. 저만한 보석을 정제하는 데에 필요한 기력량은 모르지만 이연과 전투하는 내내 비슷한 정도의 능력을 쓰고도 별 티가 안 나는 것을 보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곤란한데…….’

이연이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었다. 아까부터 심장에 자리 잡은 작은 불안감이 크기를 쑥쑥 키우고 있었다.

태진이 미래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이연은 싸우는 내내 태진의 뒤에 있는 수많은 화면을 흘끗거렸으나, 그중 미래의 모습은 없었다. 어딘가에 갇혀 불안에 떠는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은 이연을 압박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그 카드를 꺼내지 않는 데에는 하나의 결론밖에 나올 수가 없다.

미래는 현재 보여 줄 수 없는 상태다.

“진정원 씨가 부탁한 일이 뭐죠?”

의도가 빤한 질문에 태진이 능청스레 웃었다.

“우리 조카는 호기심이 많아졌네.”

“원래 많았어요. 그러니까 산오를 만났죠.”

“아, 하긴…… 그래서 네가 내 연구소도 그 지경으로 만들었지.”

이연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물론 제가 산오를 구한 건 맞지만, 연구소가 파괴된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다. 연구소를 폐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기 전까지 이연은 얌전히 그 안에만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마치 태진은 그게 전적으로 이연의 탓이라는 것처럼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저는 오히려 연구에 협조했다고요. 그것도 속은 거지만.”

그런 항변에도 태진은 어깨만 한번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믿고 싶다면.”

뭐지? 대답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에 이연의 눈썹이 꿈틀했다. 태진의 연구소 일은 너무 어릴 때라 돌아가는 정황을 전부 파악하지도 못했고, 그걸 온전히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연이 연구소 폐쇄 같은 중대사에 관여할 틈이 없었다는 건 확실했다. 당시에 그가 신경 썼던 것은 오로지 산오에 관해서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연의 마음 한구석에서 슬그머니 불안감이 새어 나왔다. ……내 기억이 틀리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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