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태진의 수법은 십 년 전에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십 년 전에는 부모님이었던 미끼가 이번에는 미래라는 것만 달랐다. 거기에 이연이 당연히 넘어갈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이연은 미래를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패를 벌써 까 보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보여 주지 않으면 이야기 진행이 안 될 텐데요.”
그 말과 동시에, 하얀 모래가 피어올랐다. 곧장 태진에게 돌진한 모래는 단단하게 뭉쳐 그를 노렸다. 쉭,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피어올랐다. 태진의 눈앞으로 단번에 공격이 날아들었다.
대신 움직인 것은 세미였다.
곁에 서 있던 세미가 팔을 뻗어 태진을 잡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이 공격 범위 바깥으로 이동했다.
예상한 패턴이다. 경고용 공격이라 정말로 다치게 할 셈도 아니었고. 이연이 건조하게 농담을 건넸다.
“삼촌, 중학생한테 쓰던 수법을 계속 쓰실 수는 없죠. 저도 성장이란 걸 하는데요.”
열넷의 정연과 스물넷의 이연은 달랐다. 태진은 비초능력자였고, 세미가 가지고 있는 건 순간 이동 능력이었다. 태진은 이연의 기력이 필요하므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세미의 단거리 순간 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연을 상대하려면 태진은 보이지 않는 패까지 다 꺼내 보여야 했다. 말뜻을 정확히 알아듣고도 태진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네가 협조하지 않으면 패는 틀림없이 부서질 거야.”
이연이 웃었다. 어쭙잖은 허세에 말려들 나이는 지났다.
“당신은 내 앞에서 아무것도 무너트릴 수 없어요.”
다시 하얀 모래가 덮쳐들었다. 알갱이들이 모이고 모여 파도처럼 출렁였다. 방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쏴아아, 하는 바닷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파도는 제 몸집에 비하면 아주 조그마하게 보이는 두 인영에게 순식간에 덮쳐들었다.
세미가 조금 전과 같이 단거리 순간 이동으로 피해도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았다. 이연의 눈짓에 따라 물결이 끝없이 쏟아졌다. 세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공격이 거머리처럼 쫓아왔다. 아예 이 방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태진이 그럴 생각이 없다면 세미 역시 나가지 못했다. 대체 저 녀석이 뭐라고……. 짜증이 솟아올라 잠깐 멈칫한 찰나.
그녀의 뒤에서 파도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헉……!”
급하게 호흡을 들이켠 작은 몸이 단번에 휩쓸렸다. 강한 힘이 세미를 밀어 냈다. 시야는 물론이고 균형 감각마저 이지러졌다. 풍랑이 그녀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태진을 쥐고 있던 손은 풀린 지 오래였다.
순간 이동은 대인 전투에 적합한 능력이 아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세미 같은 타입은 더더욱.
입 안으로 조그마한 모래가 쏟아져 들어왔다. 세미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기도가 틀어막힌 폐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사지를 버둥거리며 모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던 세미가 이내 축 늘어졌다. 기절이었다.
“미안해요. 순간 이동으로 도망가면 골치 아파서요.”
이연이 가진 대안 중에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기절한 세미를 향해 뒤늦게 사과한 이연은 태진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다르게 심각한 얼굴이었다.
세미와 떨어졌으니 태진 역시 파도에 휩쓸려 진작에 기절했어야 했다.
그러나 태진 혼자 남게 되자, 주변으로 하얀 원형 방어막이 생겼다. 이연이 파도로 아무리 두들겨도 깨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엔지니어의 장비인 줄 알았으나, 곧 이연은 그게 아주 낯익은 종류라는 것을 알아챘다.
“기력 소모가 심할 텐데요.”
이연이 중얼거리며 파도를 없앴다. 세미가 기어코 기절하고 나서야 꺼내 들었다는 점이 그답다고 해야 할까. 뭉쳐서 출렁이던 하얀 알갱이들이 공기 중으로 스르륵 날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사이로 태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 알갱이로 이루어진 방어막 역시 곧 흩어져 사라졌다.
“기력 파장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어도, 비슷한 사람은 있단다.”
남의 능력을 훔쳐 쓴 남자는 당사자 앞에서도 여전히 태연했다.
“그런 사람들은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실험 가운에 가려진 태진의 팔 안쪽에 익숙한 것이 보였다. 넝쿨이 자라난 모양의 로즈골드 빛 액세서리. 가운데에 박혀 있는 보석.
다른 점이 있다면 보석의 크기가 이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크고, 여러 개라는 것 정도.
“내가 좀 운이 좋아.”
태진이 입술을 길게 끌어 올려 웃었다. 곧 그의 주변으로 하얀 모래가 모여들었다. 조금 전에 이연이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파도가 방 전체를 채웠다.
하얗게 빛나는 물결이 부드럽게 출렁이며 이연을 향했다.
*
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벽에 세은이 부딪쳤다. 이미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걸레짝이 된 벽에서 파편이 부스스 떨어졌다.
등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신음하던 세은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괴물 같은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진짜 죽는다.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미가 이연을 데리고 사라지자, 산오는 이연이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세은이 경계 어린 눈으로 뒤통수를 쏘아봐도, 제게 완전히 몸을 돌린 등은 고요했다.
태진은 산오를 잡아 두라고 했지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속으로 심호흡을 한 세은이 슬그머니 기력을 일으켰다. 아무리 랭킹 1위여도, 기습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어디지?”
끝이 내려간 음성은 의문문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도무지 질문 같지가 않아서, 세은은 반응할 타이밍을 놓쳤다. 침묵이 계속되었으나 산오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세은이 다시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산오가 더 빨랐다.
콰지직! 바닥을 뚫고 거대한 가시들이 솟아올랐다. 날카롭게 벼린 금속은 세은의 몸과 크기가 비슷했다. 반짝이는 가시가 산오에게서 세은에게로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급하게 숨을 들이켠 세은이 황급히 능력을 썼다. 퍽! 간신히 불러낸 암석이 코앞의 가시를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바위의 겉이 가시에 긁혀 파편이 튀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암석은 단숨에 박살 났다.
너무 찰나였기 때문에 뭐로 부수었는지도 보지 못했다. 가루가 된 암석은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세은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몸을 움츠리며 앞을 본 세은이 눈을 크게 떴다.
산오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서 있던 남자가 온데간데없었다. 안 돼, 잡아 놓으라고 하셨는데. 세은은 당황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버려두고 이연을 찾으러 간 거라면…….
그때, 목덜미에 섬찟한 기운이 들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세은은 뭔지도 모르고 몸을 틀었다. 급하게 불러낸 다른 암석 역시 부서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파삭, 하는 소리가 잔상처럼 귓가에 들러붙는 것과 동시에 세은의 몸이 충격에 관통당했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갔다.
“……!”
실로 오랜만에 겪어 보는 격통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세은이 부들거리는 목을 겨우 가누며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받아 표정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몸이 방금 세은이 있던 자리에 대신 서 있었다.
남자는 밀랍 인형처럼 멈춰 있었다. 그러나 세은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다리를 오로지 의지로 수습했다. 바닥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세은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암석들이 길을 만드는 것처럼 울퉁불퉁하게 바닥과 벽을 따라 튀어나왔다.
세 방향으로 갈라진 공격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산오에게 쇄도했으나, 몸에 닿기도 전에 부스러졌다. 아주 잘게 다져진 바위가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 모래는 다시 합쳐져 가시가 되었다. 제 능력의 부산물을 고스란히 뺏긴 세은이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세은의 능력인 암석 조종은 엄밀히 따지면 산오의 하위 호환.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어도 이런 식으로 재확인받는 건 별로였다.
그녀가 마음껏 기분 나빠 할 여유도 없이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세은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생채기들이 생겨났다. 투둑. 핏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싸우는 내내 산오는 처음의 한마디를 제외하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제야 세은은 산오가 한두 마디라도 하던 것이 이연이 있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