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이태진 씨가 절 데려오라고 했어요?”
미래의 납치도 이연을 꾀여 내는 과정에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이유뿐이라면 이연이 도착할 때까지 미래가 안전할 테니 오히려 다행이지만, 만약 정말로 가주와의 모종의 거래가 있어 실험이 따로 예정되어 있었다면……. 칠칠을 쥔 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넌 너무 물러.”
산오가 이연의 앞으로 나선 것은 그때였다. 몇 발자국 걷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세은의 뒤까지 다다른 남자가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움직임을 따라 땅에서 새까만 철 줄기가 솟아올라 세은을 노렸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뚫어 버릴 것처럼 거친 속도였다.
캉! 그것을 막은 것은 세은의 등 뒤로 불쑥 솟아오른 암벽이었다. 제법 튼튼하게 굳은 벽은 날카로운 공격을 간신히 막아 냈다. 암벽. 암석. 그제야 이연은 세미를 구출할 때 세은이 암석을 이용해 경찰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세은이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심경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잔잔했다. 단 한 가지 감정만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적의.
뒤로 물러난 세은은 산오와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커다란 암석을 불러와 시야를 가렸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며 마루가 군데군데 부서졌다. 순식간에 커다란 바위들이 복도를 메웠다.
“허튼수작을.”
코웃음을 친 산오가 조금 전보다 훨씬 두꺼운 가시들을 불러냈다. 바닥과 벽에 고슴도치처럼 솟구친 가시들은 암석을 가차 없이 박살 냈다. 쾅, 쾅, 콰앙! 망치로 호두를 깨부수는 것처럼 강한 공격에 바위 부스러기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세은은 산오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약하지도 않았다. 정식으로 심사를 받았다면 무궁화 4단 정도. 흔치 않은 재능이었다.
바로 후속 공격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산오 역시 죽이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기세가 감춰지지 않고 흘러나왔다. 여차하면 무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모르포가 있는 곳을 말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이제까지 들어 본 그 어떤 음성보다도 싸늘했다.
“……제가 말할 이유는 없는데요.”
세은이 산오를 노려보았다. 순한 얼굴에는 선명한 거부가 담겨 있었다.
“그럼 죽든가.”
그 말과 함께 산오의 가시가 다시 세은에게 덮쳐들었다. 쾅, 쾅!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가시가 여기저기 꽂히는 소리가 산발했다. 세은은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며 치명상을 피해 냈다.
둘의 전투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이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세은은 묘하게 싸움에 익숙한 듯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산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지 않는 것이 증거였다.
대인 전투 능력은 단순히 초능력 활용을 잘한다고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기술이 아니다. 어쩌면 세은은…….
쾅! 의문은 이어지는 폭음에 연기처럼 흩어졌다. 한가한 고찰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이태진 씨의 계획에 따르는 거예요? 미래를 살리고 싶지 않아요?”
이연이 세은을 향해 외쳤다. 고의로 그들을 함정에 빠트린 만큼 미래에 대해서 한 말 역시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이야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디테일이 있었다. 완전히 꾸며 낸 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목소리를 들은 세은이 산오와 싸우는 와중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세은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느리게 보였다.
“하여튼 이세은. 왜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나 했더니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이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세은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톤이었다.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어깨를 잡혔다.
“추리 놀이는 적당히 해. 갈 길이 바쁘거든.”
불청객을 눈치챈 산오가 몸을 이연에게로 돌리는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검은 광석들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금속들이 이연에게로 뻗어 나오는 광경은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이정……!”
얼굴이 찌푸려진 산오가 고함치며 손을 뻗었다. 그 끝이 이연에게 닿기도 전에, 이연의 시야가 빙글 돌았다. 뒤집히는 풍경과 함께 익숙한 멀미가 약하게 치밀었다. 이연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이럴 줄 알았다.
세은은 미래를 미끼로 산오와 이연을 유인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지하로 완전히 내려온 이 시점까지 태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꿍꿍이가 더 있지 않겠는가.
“안녕, 정연아.”
뺨에 닿는 공기가 달라졌다. 서늘한 냄새가 나는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신 이연이 눈을 떴다. 환하게 불이 켜진 커다란 방은 처음 보는 곳인데도 낯익었다. 익숙한 책상, 익숙한 자료, 익숙한 실험대.
그리고 익숙한 사람.
“잘 지냈니?”
반가운 친구라도 대하는 것처럼 살가운 인사였다. 다정하게 웃으며 그를 반기는 얼굴은 꿈에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현실감이 없었다. 이연은 제가 대답을 멀쩡히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손에 움켜쥔 인형의 털 감촉만이 이 상황이 실제라는 사실을 그나마 인지시켜 주었다.
“삼촌.”
십 년 만의 해후였다.
“우리 조카,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태진이 빙글빙글 웃었다. 그는 이연이 어릴 때 봤던 모습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얼굴에 주름 한두 개가 늘었을까.
태진의 뒤에는 수많은 모니터들이 거대한 네모를 그리며 나열되어 있었다. 각각의 화면에는 어떤 공간의 광경들이 떠 있었는데, 이연이 아는 곳도, 모르는 곳도 있었지만 정체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진씨 집 안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태진은 산오와 이연이 여기에 침입했을 때부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삼촌은 똑같으시네요.”
이연은 태연한 척 대답하며 곁눈질로 저를 끌고 온 사람을 확인했다. 태진의 지하 연구실에 있을 만한 순간 이동 능력자면 크게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이세미 씨도 오랜만이에요.”
“알은척하지 말아 줄래?”
세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순식간에 태진의 뒤로 이동했다. 상종도 하기 싫다는 태도였다.
태진의 목표는 산오와 이연을 떼어 놓는 거였다. 산오가 있으면 이연과 이야기를 할 기회도 찾지 못했을 테니까. 아마 산오의 정체도 진작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어린 시절의 산오를 알고 있으니 모르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세은 씨는 버리는 패예요?”
“버리다니, 세은이는 유능한 아이야.”
그렇다고 해도 산오에게는 오래 대적하지 못할 터였다. 태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거고.
세미는 이연만 데리고 이동했다. 그렇다면 세은에게 주어진 역할은 태진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전까지 산오를 상대하며 시간 끌기.
그리고 태진의 목표는 아마도…….
“기력을 또 가져가려고요?”
원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젊은 얼굴에 가볍게 걸쳐진 웃음이 한층 진해졌다.
“십 년 전보다 말이 통해서 좋구나.”
이제는 꿍꿍이를 숨길 생각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형 설정 기능에, 보석 정제에, 그걸 또 세미의 팔찌 만드는 데에 쓰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기력을 많이 뽑았다고 해도 슬슬 바닥이 드러났을 것이다. 무려 십 년 전 이야기 아닌가. 태진은 이미 실체화 능력의 유용함에 대해 뼛속까지 체감한 사람이고, 이연이 연구소에서 그대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연은 태진의 혈육이기도 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까지는 이정연이었으니까.
“어떻게 절 찾았어요?”
그러나 이연은 혼자 남은 시점에 돌연히 제 흔적을 모두 지우고 종적을 감췄다. 대놓고 정연을 찾던 산오에게조차 감감무소식이었으니 아무리 태진이라고 해도 쉽게 알아낼 수는 없었을 텐데, 그는 클럽 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점에 이미 이연의 거취를 알고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잖니. 내가 또 인복도 좀 있어서 말이야.”
“……인복?”
“그리고 네가 여전히 이정연인 것도 도움이 되었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태진이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정말로 재수 없게 느껴진다는 점이 이연이 성장했다는 증거일 터였다.
“이정연이라고 부르지…… 아니, 됐어요.”
태진의 페이스에 말려 의미 없는 입씨름을 할 생각은 없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이연이 적의 어린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미래 어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