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익숙한 몸짓으로 앞장서는 세은의 등을 얌전히 따라가던 이연이 불쑥 물었다.
“계획은 있어요?”
그 말에 세은은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가, 이연과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톤의 음성이 개미만 하게 흘러나왔다.
“그게, 어.”
희수를 데려오는 것 외에 대안도 없었고, 그럴듯한 계획도 없고. 아무래도 세은은 생각보다 더 충동적인 인간상인 듯했다.
“그냥 부숴.”
맨 뒤에서 따라가던 산오가 뚱하게 내뱉었다. 그는 순순히 따라가고 있는데도 누구보다 이 상황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 보면 하나씩 나타나게 되어 있어.”
평소 그가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파악 가능한 발언이었다.
“야, 그래도 미래 안전은 확보한 다음에 부수든 말든 해야지.”
이연이 작게 타박했으나 산오는 귓등으로 흘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산오의 목적은 모르포였으니 아이는 안중에도 없겠지만, 이연은 오히려 모르포보다 미래가 더 중요했다. 모르포의 실험은 어른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동반한다. 누구여도 평생 겪을 필요 없는 경험이었다.
- 어…….
혜강의 당황한 듯한 신음성이 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이연은 반사적으로 왜 그러냐 물으려다 말고 앞의 세은을 의식했다. 발소리마저 적나라하게 들리는 고요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작게 속삭여도 그녀에게 들킬 것이다. 혜강 역시 이연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곧 일방적인 브리핑이 쏟아졌다.
- 형들. 듣기만 해요. 점점 신호가 약해지고 있는 걸 보니 곧 통신이 끊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지하에 독자적으로 구축한 전파 방해 시스템이 있는 모양이에요. 노력은 해 보겠지만 당장 해킹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이다음부터는 둘이서 알아서 해야 해요.
전파 간섭 초능력자인 혜강에게 전파 방해 장치는 쥐약이었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그것도 가정집에 그런 게 있다고?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이연은 반사적으로 놀라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혜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 사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확신이 들면 말하려고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아까부터 좀 수상한 점이 있었어요.
이연이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산오는 심드렁한 태도로 걷고 있었으나, 귀에 꽂힌 통신기로 같은 내용을 듣고 있을 것이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잠깐 바라본 이연이 다시 혜강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왜 집 안 불이 다 꺼져 있는 걸까요?
그건…… 어? 이연의 눈이 깜빡였다. 고글 덕에 시야 확보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넘겼는데, 세은을 따라 오는 내내 실내조명은 물론이고 장식용 조명조차 빛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세 사람은 오로지 달빛에 시야를 의지해 걷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집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별채에서 본채 심층부까지 들어오면서 꽤 많은 거리를 걸었지만, 누군가의 말소리나 인기척은 한 번도 맞닥뜨리지 못했다. 이렇게 거대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오후 10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었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 제 생각에는 별채랑 본채에…… 가…… 되어서, 모르포가 사실은…… 경우가…… 아요.
전파 방해 장치가 있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지하로 내려가는 걸음을 옮길수록 목소리가 띄엄띄엄 끊어졌다. 티 나지 않게 걷는 속도를 최대한 늦춰 봤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음성의 맥락을 끼워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잠깐.
혜강의 목소리 사이에 D.S가 끼어들었다. 급하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이연이 귀를 기울였으나 이미 뚝뚝 끊기는 통신으로는 정확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야, 아까…… 한…… 그러니…… 나면…… 들어…….
그게 다였다. 어느 순간부터 통신기 너머가 고요해졌다. 망할. 이연이 욕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세은의 어깨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지하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계단을 전부 내려온 이연은 펼쳐진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지하는 예전 모르포의 연구소와 전혀 달랐다. 조금 낡은 것 같은 긴 복도 여기저기에 박스 같은 것이 쌓여 있었고, 허름한 나무 문은 열려 있는 곳도, 열려 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열려 있는 방 너머에는 온갖 연구 도구나 자료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무시무시하게 크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냥 슬쩍 보기에도 복도 끝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었다.
“미래가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짐작 가는 곳은 있어요. 따라오세요.”
세은은 바로 몸을 틀어 어딘가로 향했다. 정확히 목적지를 아는지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이연은 그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이세은 씨.”
“네?”
“이세은 씨는 저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요.”
“……네?”
세은이 어리둥절하게 등을 돌려 이연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중학생 때, 이태진 씨는 미혼이었거든요.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어요.”
이연과 세은은 고작 두 살 차이였다. 그가 열넷일 때, 세은은 열둘이어야 했다. 태진의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연의 아버지와 꽤 나이 차이가 났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저한테 일부러 숨긴 걸까요? 농담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내용까지 경쾌하지는 못했다.
“진짜 아버지 아니죠?”
세은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왜 거짓말을 했어요?”
세은은 마치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배터리가 다 된 로봇처럼 돌아선 채로 멈춰 있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황급히 앞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냈다. 시선을 피하는 반응은 누가 봐도 어색했으나, 이연은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예요. 제 아버지 맞는데…….”
웃는지 우는지 모를 음성이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치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다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것처럼.
이연은 그런 소녀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 날 생겨난 이태진의 딸들. 그리고 초능력.
“이세은 씨, 실험체잖아요.”
그녀는 이연이 낙천적으로 피해 버린 책임의 대가였다.
세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 태도 자체가 이연의 말을 긍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서 있는 각도에서 간신히 보이는 세은의 귓불과 뺨 언저리가 낭패한 듯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당황한 모습일 텐데도 이상하게 선뜩한 느낌이 들어, 이연은 그 윤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숨겨진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이걸로 확실해졌다. 태진은 산오를 버린 후에도 실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아이를 찾아 그의 이상을 실현하려 들었다. 세은이 몇 번째인지도 추측하기 힘들었다.
이연이 멍청한 선택을 했던 것이 증명된 셈이다.
“…….”
하얀 얼굴은 고글에 절반 이상이 가려져 있었지만, 산오에게는 그 틈새로 짙은 죄책감이 스미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옅은 눈동자에 고통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짜증스러운 혓소리가 매끈한 입술 새로 튀어나왔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없어.”
산오는 이연과 세은의 사이에서 걸음을 슬쩍 틀었다. 큰 몸이 움직이면서 이연의 시야를 채웠다. 이연은 세은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 버린 널찍한 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상하게도 새까만 뒷모습이 저를 보호하려는 것같이 느껴졌다.
산오 역시 이연의 과오가 낳은 피해자인데도.
“그래, 그거 말고 더 중요한 게 있지.”
이연이 한숨처럼 웃었다. 곧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태진 씨. 어디 있어요?”
혜강의 말을 곱씹다 보니 느낌이 왔다. 과하게 조용한 집 안의 상황과 세은의 이야기를 조합해 보면 말이 안 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희수가 바쁜 것을 세은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름 아닌 세은이 그 이유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세은은 이 집 안에서 누구보다도 희수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사람이었다. 희수가 별채에 있는지 없는지 몰라 확인하러 온다니. 웃기는 핑계였다.
게다가 세은은 별 관심도 없었던 일을 태진이 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성실하게 수행하거나 그가 말을 꺼내고 나서야 제 쌍둥이를 구하러 갈 만큼 아버지에게 순순한 사람이었다. 미래를 빼내려는 것은 태진에게 반하는 행동이었고. 그러나 그녀는 그럴듯한 내적 갈등조차 표시하지 않았다. 태진에 대한 적의 역시 전혀 없었다.
처음에 별채를 잇는 마당을 바로 건너오려다가 돌연히 방향을 튼 것도 그랬다. 안 그래도 급한 사안인데 굳이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넓은 집 안의 구조를 모르는 침입자들에게 일부러 등을 내주고 잡히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그리고 일반 가정집은 물론이고, 이연이 그동안 해치운 불법 연구소에도 구비되어 있지 않던 전파 방해 장치가 고작 사람 너댓 명 출입하는 비밀 연구실에 설치가 되어 있다니.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아는 사람의 대처였다. 특히 이전 동료가 대부분의 연구 자료를 날린 해킹의 범인을 안다면 당연히 취할 조치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혜강이 마지막으로 해 주려던 말도 대충 추측이 가능했다.
태진은 이미 그들이 침입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의도된 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