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그 후로도 세은은 미래의 브이로그 만들기를 도와주었다. 한 번은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해도 또 모르니까. 어린애니까 무심코 말할 수도 있잖아. 세은은 자기 자신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되뇌며 미래가 찍어 온 영상들을 꼼꼼히 보았다. 덕분에 세은의 편집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해 나중에는 영상 효과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미래는 그 많은 영상을 찍는 내내,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세미가 나랑 계속 같이 있으니 세은이는 요즘 심심하지?’
식사 시간에 아버지가 뱉은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세은은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래랑 놀아 주는 시간이 생각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아버지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은이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부드럽게 제안했다.
‘밖에 한번 나가 보는 건 어떠니?’
‘밖이요?’
‘그래.’
아버지가 권하는 것을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세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여 준 것은 SNS 속에 나오는 고급 파티 사진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희수라면 데려다줄 수 있을 거란다.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고는 나머지는 네 몫이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세은은 다음에 희수를 만났을 때, 혹시 자신도 데려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희수는 난감한 기색을 표했지만 마침 함께 있던 희수의 어머니가 데려가라며 힘을 실어 주었다.
덕분에 세은은 예쁜 옷과 액세서리를 맞추고 화려하게 치장해 참석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파트너 동행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희수의 힘을 빌려 입장하는 것 자체는 가능했던 것이다.
처음 참여해 본 상류층 파티는 신세계였다. 전혀 경험한 적 없던 환경이었다. 세은은 금세 그 분위기에 흠뻑 매료되었다. 반짝이는 조명과 화려한 장신구, 공작새처럼 치장한 사람들, 우아한 행동거지. 그런 것들은 세은에게 어떤 감동과 동경을 불러왔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고생했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재미있지? 또 가고 싶으니?’
사실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세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는 아버지를 아주 아꼈고, 그래서인지 세은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 때문에 희수 역시 세은의 부탁은 대부분 들어줘야 했다. 세은이 파티에 자주 갈수록 아버지가 칭찬을 해 주었기 때문에, 점점 파티에 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가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세은은 언제 가도 질리지가 않았다.
게다가 파티는 보통 늦은 저녁, 그러니까 아이가 잠이 든 시간에 이루어진다. 덕분에 세은은 미래와의 시간 역시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언니 오늘 엄청 예쁘다.’
시간 계산을 잘못해 파티에 참석할 차림새로 차려입고 연구실에 내려온 세은을 본 미래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세은은 머쓱하게 별거 아냐, 하고 대답하고는 미래의 옆에 앉았다. 옷에 달린 반짝이는 비즈들이 신기한지 미래는 작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공주님 같아, 하고 속삭였다.
‘무도회에 가는 거야?’
‘뭐……. 비슷하긴 해.’
‘짱이다!’
미래가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왠지 으쓱해져, 세은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끝내 저도 무도회를 가 보고 싶다며 조르는 미래에게 네가 조금 더 크면 갈 수 있다는 말로 달래고 나자 시간이 아슬했다.
세은은 미래에게 조심히 들어가라는 인사와 함께 먼저 방을 나섰다. 집이 너무 넓다 보니 연구실에서 건물 밖까지 나가는 길도 한참 걸어야 했다. 황급히 발걸음을 놀리는 세은의 뒤통수로 가벼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제 나가?’
세미였다. 한동안 막바지 단계라며 제 책상에서 꼼짝 않더니 잠깐 기분 전환이라도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응. 쉬는 시간?’
‘어어. 거의 다 했는데, 효율 개선이 잘 안 되네…….’
세미가 골치 아프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세은이 힘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다 차려입고 여긴 왜 왔어? 바로 나가면 되는 거 아냐?’
그 질문에 세은이 티 나지 않게 멈칫했다. 세은의 방은 위층이었다. 굳이 차려입고 지하에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건 누가 봐도 번거로운 동선이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나 여기 구경하러 다니는 거 좋아하잖아.’
태연한 척 말했지만 정말로 이상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은이 머쓱하게 웃었다. 느리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세미는 그런 세은을 향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렇긴 하지.’
‘그럼 난 갈게. 힘내.’
‘응. 너도.’
빠르게 연구실을 나서는 세은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미는 이내 등을 돌렸다.
세은은 파티에 익숙해지면서, 태도가 점점 여유로워졌다. 고개를 두리번대며 구경하기 바빴던 전과는 달리 이제는 느긋하게 벽에 기대어 분위기를 살피거나 이야기를 주워들을 정도는 됐다.
그런 자신을 인지하며 세은은 어떤 성취감을 느꼈다. 여긴 아버지도, 세미도 없었다. 오롯이 그녀 혼자서 일궈 낸 경험이었다. 친절하게 웃는 사람들을 대할 때 세은은 머릿속을 관통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미가 세은에게 달려왔다.
‘이거 껴 봐.’
‘이게 뭔데?’
독특하게 생긴 팔찌였다. 열심히 만든 세미에게는 미안하지만 수많은 파티 참석으로 온갖 액세서리와 비싼 의복에 익숙해진 세은에게는 조금 투박하게 보이기도 했다. 떨떠름하게 팔찌를 착용하자, 세미가 기력을 운용해 보라며 난리를 부렸다.
‘알았어, 하면 될 거 아…… 어?’
세은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종류의 초능력이 방 안에 나타났다. 얼빠진 얼굴로 그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자, 세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대박이지?’
아버지 역시 세미의 발명품에 아주 흡족해했다. 잘했다며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 준 아버지는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끼리만 보기엔 아까운데, 다른 사람에게 팔아 보지 그러니?’
‘이걸 팔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웃는 얼굴은 세은에게로 향했다.
‘파티를 많이 다니는 세은이가 아마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런 깨달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세은에게 새로운 취미를 권하던 아버지, 꾸준히 파티를 다니는 세은을 칭찬하던 아버지.
나를 빼놓지 않았어.
세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약하게 느껴졌던 소외감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내가 뭐 어떻게 도우면 되는데?’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협력 의사를 표한 후에도 사실 세은이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희수와 함께 파티에 갔고, 평소처럼 구경을 잔뜩 했다. 세미는 공식적으로 동행하지 않았고, 세은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거 끝내주던데. 또 살 수 있어?’
‘내 친구도 관심이 있다고 해서…….’
‘얼마 정도가 필요한 거지?’
세은과 세미는 닮긴 했지만 둘을 착각할 정도로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다. 일단 두 사람의 외모 취향이 달랐기 때문에 꾸미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도 세은과 세미를 헷갈리는 거라면 한 가지 결론뿐이다.
세미가 세은의 행세를 하고 파티를 몰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방법을 쓰다니, 세미는 역시 똑똑했다. 미리 말을 해 주지 않은 것은 조금 서운했으나, 세미가 그것을 파는 것은 아버지에게도 좋은 일이었기 때문에 세은은 순순히 협조했다. 세미가 움직인다 싶으면 세은이 슬그머니 파티장에서 자리를 비우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퇴장할 때마다 마치 쓰임을 다한 대역이 무대 아래로 버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시무룩해진 기분은 발걸음마저 축축 처지게 했다.
그날도 중반부까지는 평범한 파티였다. 특이사항이라면 이연을 만났다는 거였다.
세은은 사실 이연을 만나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즐겁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떨어져 음식이나 집어 먹고 있던 사람은 미래의 영상에서 본 하얗고 순하게 생긴 남자였다. 미래의 친구.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액정 너머에서 본 얼굴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것이 퍽 반갑고 기뻤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그녀도 몰랐다. 그냥 미래의 친구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의 목적을 알았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