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아무튼, 여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얼른 나가.’
별채와 본채와의 거리는 꽤 되던데 어떻게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세은은 무작정 미래를 쫓아내기 위해 아이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러나 아이는 힘을 주고 버텼다.
‘나 여기서 구경 조금만 하면 안 돼? 방해 안 할게. 얌전히 있을게.’
‘여기 구경할 게 뭐가 있어.’
가벼운 타박에도 아이는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나 여기 좋아. 조금만 있을래. 응? 조금만…….’
그렇게 조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어쩐지 애처롭게 들렸다. 세은은 시무룩한 얼굴에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뭘 알 리도 없고, 여기선 메인 연구실이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냥 잠깐 시간만 때우는 정도면……. 작게 한숨을 쉰 세은이 미래의 옆에 털썩 앉았다.
‘갈 때까지 내가 감시할 거야. 조금만 있다가 빨리 가야 돼.’
‘응!’
미래는 환해진 얼굴로 목이 부서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가 있던 곳은 온갖 잡동사니 부품들과 보고서가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창고로, 여덟 살짜리가 용도를 알기에는 지나치게 고차원적인 것들이었다. 당연히 멀뚱히 앉아 있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도 미래는 천국에라도 온 것처럼 뺨을 붉히고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건드려서 어지럽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낱낱이 눈에 담아 가려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연구에 관심이 있는 건가? 내가 아니라 세미랑 맞을 수도 있겠는데. 이런 것에 문외한이다시피 한 세은은 머쓱하게 말을 걸었다.
‘뭐 만들고 하는 거 좋아해?’
‘으응, 아니.’
아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흥미가 없으면 왜 그렇게 재미있다는 듯 보는 거야? 세은이 의아하게 아이를 바라보았지만, 미래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그냥 작은 콧노래만 흥얼거렸다. 꼭 이 상황이 설레고 즐거워 죽겠는 사람 같았다.
그 후로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미래는 아이들이 흔히 하는 혼잣말 같은 것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분 후 세은이 이제 그만 가라고 하자 순순히 발딱 일어나 출구 쪽으로 향했다.
고마워, 이비밀 언니, 하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아이에게 저도 모르게 마주 손인사를 해 주던 세은이 제풀에 놀라 움찔 멈추고는 후다닥 두 손을 뒤에 감췄다. 그냥 손만 흔들었을 뿐인데, 바로 내쫓지 않은 것보다 더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느 날의 해프닝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기려던 미래와의 깜짝 만남은 그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혹시나 싶어서 연구실 구석을 돌던 세은은 어제와는 다른 방에서 미래를 찾아냈다.
‘너 여기 있으면 안 된다니까.’
‘나 조용히 있을게. 진짜 조금만. 응?’
‘대체 여긴 어떻게 안 거야?’
‘그으냥, 놀다 보니까…….’
대강 대답을 얼버무리는 미래를 빤히 바라보던 세은이 한숨을 푹 쉬며 그 옆에 털썩 앉았다. 무언의 허락임을 알아들은 미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폈다.
‘구경하는 건 알겠는데, 약속 하나 해.’
‘무슨 약속?’
‘여기 왔다는 거랑 날 봤다는 거, 여기 관련된 건 아무것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희수조차도 연구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어린아이가 입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다 나불대면 곤란한 건 세은이었다.
‘네가 만약에 말해 버리면 절대로 못 오게 할 거야. 농담 아니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으름장을 놓자, 미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조그만 얼굴에 걸린 비장한 결심이 조금 웃겨서, 세은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꼭 참고 근엄하게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당연하다는 듯 미래는 매일매일 연구실에 내려와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세은은 오후만 되면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미래를 찾아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미래는 대체적으로 말을 잘 듣고 얌전했지만, 이곳에 오지 말라는 말만큼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참 곤란한 꼬맹이였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미래는 세은이 제법 편해진 듯했다. 처음에는 연구실의 여러 곳을 가만히 둘러보기만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구석진 곳에 나란히 숨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비밀이 언니는 가족이랑 같이 살아?’
‘같이 살지.’
‘난 같이 못 살아.’
그렇게 말하는 미래의 얼굴은 이제까지 세은이 봤던 것 중에 가장 우울해 보였다.
‘엄마 있는데, 같이 못 산대.’
‘……그래도 삼촌이랑 같이 살잖아.’
‘삼춘도 좋지만, 그래도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
미래는 제 엄마의 좋은 점에 대해 이것저것 나열하기 시작했다. 키가 크다, 돈을 많이 번다, 일을 열심히 한다……. 가만히 들어 보니 비초능력자인 데다가 일에 치여 사느라 딸을 내팽개쳐서 다툼 끝에 집안에서 맡아 키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점이 짠해서, 세은은 미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네 삼촌도 좋은 분이야. 널 정말 좋아하거든.’
희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미래에 대한 화제가 나왔다. 그럴 때마다 희수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어지곤 했다. 제 조그만 당질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알아. 나도 삼춘 사랑해.’
맹랑한 꼬맹이는 당당하게도 말했다. 그게 귀엽다고 느껴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세은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엄마가 그렇게 좋아?’
‘웅. 언니는 안 좋아?’
‘난 없어서 몰라.’
세은이 기억이 있을 때부터 그녀의 곁에는 아버지와 세미뿐이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평생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없어?’
미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아이는 이내 중요한 사실이라도 가르쳐 주는 것처럼 낮게 속삭였다.
‘언니를 낳아 준 사람을 엄마라고 하는 거야.’
‘나도 알아, 바보야.’
그런 것도 모를까 봐. 웃음을 삼킨 세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기실 그녀에게는 그게 그렇게 슬프거나 마음 아픈 사실도 아니었다.
‘그런데 난 아빠만 있어.’
‘아, 나랑 반대다.’
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엄마가 없고, 난 아빠가 없으니까 두 개가 합쳐지면 좋을 텐데. 종알거리는 목소리는 어린아이답게 순수하다 못해 무도한 내용이었다.
‘아빠가 있으면 어때?’
‘그냥, 엄마 있는 거랑 비슷하지.’
‘그렇구나.’
미래는 납득했는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 얌전한 태도가 귀여워서, 세은은 아이의 머리를 한 번 더 헝클어트렸다.
‘엄마가 보고 싶어?’
‘응.’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세은이 번뜩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때?’
‘편지는 어떻게 보내는데?’
‘삼촌한테 부탁해 봐.’
‘삼춘이랑 엄마랑은 사이 별로 안 좋아.’
목소리는 금세 시무룩하게 처졌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된 세은이 쩔쩔매며 미래를 달랬다.
‘그럼, 편지 말고 다른 거. 문자는 안 돼?’
‘미래는 엄마 번호 몰라. 아무도 안 알려 줘.’
‘그, 그럼…… 아! SNS 같은 건 어때? 계정을 따로 안 알려 줘도 네가 유명해지면 엄마가 바로 찾아볼 수 있을걸.’
‘SNS?’
미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먹힌다. 세은이 열띠게 설명했다.
‘그래. 사진이라든가, 동영상 같은 거 올리는 거 있잖아.’
‘그거 뭔지 알아. 브이로그 말하는 거지?’
‘맞아, 그런 거.’
얼결에 내지른 말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은 제안이었다. 세은은 신나서 미래를 부추겼다.
‘엄마한테 직접 말은 못 걸어도, 영상으로 알려 주면 되잖아.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하고.’
‘……응, 해 볼래.’
‘그래도 나나 여기에 대한 건 말하면 안 된다?’
‘응.’
뒤늦게 덧붙였지만 어린아이의 약속이란 게 도통 안심이 되지 않아서, 세은은 영상 편집을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찍은 영상들을 모두 보여 달라고 했다. 도와줘서 고맙다며 환하게 웃는 얼굴에 양심이 조금 찔렸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미래가 가져온 동영상들은 구도도, 내레이션도 모두 어설프고 허술했다. 고작 여덟 살 아이가 찍은 거니 당연했다. 세은과 약속한 대로 미래는 철저하게 자신의 일과에 대해서만 말을 했다. 영상만 보면 세은이나 연구실은 전혀 모르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잘 찍었네.’
‘정말?’
뒤늦게 미래를 믿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져, 세은은 일부러 과장되게 칭찬하며 짧은 영상들을 이어 붙였다. 무료 앱으로 하는 편집은 그녀도 처음이라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완성하고 나니 그럭저럭 브이로그다운 모양새였다.
‘어때?’
‘언니 대단해. 고마워!’
완성본을 확인한 미래는 기뻐하며 세은을 껴안았다. 미래가 이렇게 안아 주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세은은 멈칫하면서도 잠시 후에 주춤거리는 손으로 아이를 마주 안았다. 품 안의 온기가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