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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67화 (133/250)

#67

형석 역시 수빈의 소식에 대해 알고 있는지, 금세 목소리가 의기소침해졌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당연하겠지만.

수빈과 불법 클럽에 다니던 친구니 불법 물품도 같이 구매했을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이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거 때문에 말인데, 좋은 팔찌를 구할 수 있다고 해서요.”

그 질문에 대한 형석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너 그 팔찌 샀어?”

“네, 네?”

“그걸 왜 샀어! 수빈이 쓰러진 거 보고도 몰라? 쓴 건 아니지? 많이 썼어?”

낮게 소리치는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수빈 누나가 왜 쓰러진 줄 아세요?”

“……확실하진 않아. 확실하지는 않은데.”

형석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 팔찌를 산 애들은 전부 상태가 안 좋아졌어.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겹치잖아.”

형석은 수빈 말고도 다른 친구들도 죄다 그런 식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중 수빈이 가장 심하긴 했지만, 체력이 쪽쪽 빨린 사람처럼 집에 틀어박혀 자리보전하고 있는 친구도 많은 것 같았다.

“아무리 모르포가 만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애들도 그걸 덥석덥석……”

“누구?”

느릿하게 반문한 것은 산오였다. 이제까지 내내 가만히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열자 형석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얼결에 순순한 답이 흘러나왔다.

“아. 소문에는 팔찌 제작자가 모르포라는 말이 있거든.”

“모르포가 누군데요?”

모르포라면 김 박사가 말한 이름이다. 이쪽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연의 물음에 형석이 오히려 놀랍다는 듯 물었다.

“클럽도, 팔찌도 아는데 모르포를 몰라?”

그쪽하고 연관이 있으면 잘 쳐줘 봐야 범법자일 터였다. 거액의 현상금 수배자라도 되나? 이연이 얼굴을 갸웃 기울였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에요?”

“당연하지!”

형석의 설명에 따르면 모르포는 이쪽, 그러니까 뒷골목과 깊게 연관된 음지에서 전설적인 엔지니어라고 했다. 그를 가지면 억만금은 우습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이다.

“고작 부작용 있는 허접한 팔찌를 만드는 사람인데 억만금이요?”

이연이 삐딱하게 중얼거렸다. 불량품 개발자에게 붙여 주기에는 너무 과분한 수식어였다. 그러나 형석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것처럼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팔찌 파는 놈이 모르포가 개발했다고 하고 팔기는 하는데, 난 사실 그렇게 생각 안 해.”

“왜요?”

“그, 전투 구역의 지형 설정 기능 있지?”

“알죠.”

헌터인데 그걸 모르면 기본 교육부터 다시 이수해야 했다.

“그걸 만든 게 모르포래.”

“……예?”

이건 또 생각도 못 한 정보다.

“왜, 그 개발자 그거 만들고 잠수 탔다고 그러잖아. 사실 실종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음지로 숨어들었다는 거야.”

이연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그럴 이유가 있어요?”

“우리야 모르지. 근데 아무래도 돈 때문 아니겠어?”

국가 연구소 소속 수입은 빤하니까. 형석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긋였다. 자본가의 자식다운 대답이었다.

“아무튼 지형 설정 기능까지 만든 사람인데, 변변찮은 물건을 만들어 내서 팔지는 않겠지. 가격도 모르포 이름값에 비해서 말도 안 될 정도로 싸고. 설마 가성비 같은 걸 챙기고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그거야…… 그렇겠죠.”

형석의 추측은 그럴듯했다. 이연이 생각하기에도 모르포가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들었다는 개발자와 동일 인물이라면 굳이 이런 식의 초능력 팔찌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이연이 알기로 이미 그는…….

“그러니까 팔찌 같은 건 손도 대지 마. 알았지?”

이연의 상념을 끊은 형석이 엄한 형처럼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 모습이 조금 웃겨 이연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진실을 말했다.

“팔찌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전 헌터인걸요.”

“헌터?”

형석의 눈이 금세 초롱초롱해졌다.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와, 너 헌터구나! 좋겠다.”

“네. 2단이긴 하지만…….”

“2단이어도 엄청 대단한 거잖아! 능력이 뭔데? 한 번만 보여 주면 안 돼? 아, 뭔지는 말 안 해도 돼. 보여 주기만 하면 내가 맞혀 볼게.”

2단짜리 능력에 이렇게 열광하다니, 5단이라도 나서면 기절하겠다. 실제로 형석이 이연에게 들러붙어 졸라 대자 산오의 눈썹이 미미하게 좁혀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종이랑 펜 있어요?”

그러나 정말로 형석을 기절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연은 순순히 형석을 데리고 창가 쪽으로 다가섰다. 흔히 얻기 힘든 정보에 대한 일종의 답례였다.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공간의 가장자리에서, 이연은 형석이 건넨 종이를 벽에 대고 무언가를 슥슥 그렸다. 거침없는 손놀림 후 종이에 손가락을 대자, 조그마한 종이비행기가 튀어나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기 때문에 평소 그리던 것보다 알아보기 쉽다는 점이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가볍게 그들의 앞을 날아오른 하얀 비행기를 본 형석의 얼굴이 묘했다.

“왜 그래요?”

“이거 혹시 실체화 능력이야?”

“와, 바로 아시네요.”

정확히 말하면 그림 실체화지만……. 이연이 그렇게 덧붙이기도 전에, 형석이 이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무언가 찾는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왜, 왜 그래요?”

그 얼굴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이연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가 물러서는 만큼 형석은 그에게 다가왔고, 결국 등 뒤에 산오의 몸이 닿아 더 이상 이연이 물러서지 못할 때쯤에야 형석이 물었다.

“설마 네가 모르포야?”

“예?”

갑자기요?

“지형 설정 기능, 실체화 능력으로 만든 거잖아. 물어본 것도 다 위장인가?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내가 가둬 놓고 일만 시킬까 봐?”

“제가요? 왜요? 팔찌고 지형 설정이고 저는 집안일 기계 조작도 잘 못 한다고요. 그리고 제가 모르포면 이렇게 당당하게 시연을 하겠어요? 봐요, 제 초능력자 등록증. 그림 실체화 능력이잖아요.”

이연이 황당해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등록증 화면까지 보이며 늘어놓는 말에도 형석은 수상하다는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지긋이 노려보는 시선에 억울해진 이연은 산오를 돌아보았다.

“야, 너도 뭐라 말 좀 해 줘.”

무감한 시선이 이연을 훑었다. 녹색 눈에 당황한 하얀 얼굴이 그대로 담겼다.

“이 녀석은 모르포가 아니야.”

“모르포가 뭐, 나 모르포다 하고 다니겠어?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이 인간이 속고만 살았나……. 이연은 너무 억울한 나머지 발작하듯 부르르 떨었다. 내가 법 없이도 살…… 수는 없지만, 초능력자 기력을 갈취하다 못해 일반인 기력까지 갈취하는 인간과 동급 취급을 받다니. 사실 이연의 말을 형석이 믿든 안 믿든 상관은 없었지만, 기분상의 문제였다.

그런 그를 진정시킨 것은 의외로 산오였다. 가볍게 내리깐 시선이 이연의 뒤통수와 그가 만들어 낸 조그만 종이비행기를 번갈아 보았다.

“모르포였다면 더 쉬웠겠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칼을 벼린 것 같은 서늘함이 있었다.

“아쉽게도 아니야.”

기묘한 위압감이 세 사람이 있는 공간에 차올랐다. 결국 물러선 것은 형석이었다.

“……아니라면 뭐.”

“왜 제 말은 안 믿고 쟤 말은 믿어요? 지금 차별해요?”

“믿어도 뭐라 그래. 계속 안 믿을까?”

“아! 그게 아니잖아요.”

급기야 짜증을 내는 이연을 향해 형석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동생이라도 보는 것 같은 손길이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키 크면 다야? 이미 마음이 삐뚤어진 이연이 노려봐도 형석은 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림은 왜 그렇게 못 그려?”

최근에 산오한테 그렇게 구박받았는데 이제 다른 사람까지 잔소리였다. 산오의 피나는 객관화 덕에 자신감은 좀 줄었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관대한 이연이 구시렁거렸다.

“왜요? 종이비행기는 자주 그려서 그래도 괜찮지 않아요?”

“너 헌터 일 하는 데 문제는 없어?”

형석이 던진 정상적인 질문에 이연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림 실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능력이 그림 실체화인데?”

“저 일 진짜 잘하거든요? 완전 프로페셔널해요.”

“어, 그래…….”

형석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 인간 봐라. 이연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지자, 형석이 재빨리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튼 뭐, 팔찌와 연관 없다니 다행이야. 건강한 게 최고지.”

슬슬 가려는지 형석은 가볍게 손을 올렸다. 만나서 반가웠어, 하고 인사를 건네는 철없는 도련님에게 이연 역시 대꾸했다.

“형석 씨도 건강하려면 좀 조심히 노는 게 좋을 거예요.”

이번에 수빈이 쓰러진 건 어떻게 보면 룰렛에 당첨된 것과 비슷했다. 형석 역시 계속 아슬아슬하게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드나든다면 수빈, 혹은 그의 친구들처럼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염려에도 형석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참, 인생의 낙 찾기가 힘들어.”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건들거리며 걷는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연이 중얼거렸다.

“……나중에 안 심심하게 해 줄 테니까 술 사 달라고 하면 사 줄 거 같지?”

“집어치워.”

산오가 인상을 쓰며 몸을 돌렸다. 야, 같이 가. 이연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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