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얀 모래 역시 후다닥 도망치듯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설명해.”
대신 대답한 것은 산오였다.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얼굴에 세은은 조금 겁을 먹은 것 같았지만, 이내 우물쭈물하며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제가 별채로 가던 건 희수 오빠를 만나고 싶어서였어요.”
희수 오빠가 미래랑 함께 별채에 살거든요, 하고 세은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미래의 할머니 대신 자기가 보호자 역할을 떠맡았다고 했었지. 그래서 가주인 어머니가 기거하는 본채가 아닌 미래가 사는 별채에 같이 머무는 모양이다.
“요즘 바빠서 집에 잘 못 들어오는 건 알지만, 혹시나 싶어서…….”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던 세은은 그래도 덕분에 두 분을 만났으니 다행이긴 하네요, 하고 맥없이 웃었다.
“미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데요?”
이연의 물음에 세은은 금세 웃음기를 잃었다.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그녀는 잘못을 고백하는 죄인처럼 읊조렸다.
“세미가…… 세미가 미래를 데려갔어요.”
“이세미 씨도 이 집에 있다고요?”
D.S의 추측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이연이 확인하듯 재차 묻자 세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데려갔는데요?”
“……그건…….”
세은은 몰라서 대답을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거였다. 죄책감 어린 표정은 그녀를 연약하고 가련하게 보이게 했으나, 사정을 아는 이연으로서는 동정할 여지가 없었다.
불법 초능력 팔찌를 만들어 팔다가 어머니인 D.S에게 붙잡힌 이세미. 그녀가 미래를 데리고 가서 할 짓이라는 건 사실 뻔한 방향이다.
“기사 봤어요.”
“…….”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세미 씨를 꺼내 준 거예요?”
힐난하는 말이 세은에게 쏟아졌다.
“이럴 줄 몰랐어요? 이세미 씨가 이제부터는 착하게 살 줄 알았어요? 미래는 무슨 죄예요?”
말을 하면 할수록 분노가 거세졌다. 세은에게 퍼붓는 형태였지만, 그건 세은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이연이 이를 악물었다. 날카롭게 벼린 말은 손잡이가 없었다. 찌르려고 힘을 주면 줄수록 찌르는 사람도 상처를 입었다.
바보 같은 이세미. 순진한 이세미. 생각이 짧은 이세미.
멍청한.
“정이연.”
커다란 손이 이연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이연의 몸이 세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부드러운 힘에 밀려 반 발자국 멀어지고 나서야, 이연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서 퍼부어지는 비난을 조용히 감내하고 있는 어린 얼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요.”
짧은 숨을 삼킨 이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세은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간헐적으로 크게 들이켜는 호흡 때문에 몸이 떨렸다.
- 자. 진정하고, 지금 미래를 구하는 게 우선이잖아.
부드러운 혜강의 말이 귓가에 닿았다. 이연이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세은을 이런 식으로 다그쳐 봤자 해결되는 건 없었다. 미래를 먼저 찾아야 한다.
“미래가 어디 있는지 우리에게 안내해 줄 수 있어요?”
끓어오른 화는 심호흡을 하며 가라앉았다. 누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세은이 고개를 숙인 채로 한껏 끄덕였다.
“……조금 걸어야 해요.”
세은이 잠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하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킁,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든 눈가는 조금 빨개져 있었다.
세 사람은 빠르게 움직였다. 세은은 이따금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하기는 했지만, 집의 구조를 잘 아는지 기본적으로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요?”
세미가 단순히 놀아 주려고 미래를 데려간 건 당연히 아닐 테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도 퍼즐에 빈공간이 너무 많았다. 이연의 물음에 세은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었지만 순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가 이 집에 온 건 반년도 넘었어요.”
세은과 세미, 그리고 그녀들의 아버지는 초호시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먼 친척의 집이니 적당한 거처를 찾을 때까지 잠시 머물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는 김에 겸사겸사 이쪽 집안일도 조금 도울 거라고 했고.
아버지는 이런 분위기에 매우 익숙한 것처럼 보였고 세미는 천성이 무던하고 관심 없는 분야가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익숙해졌으나, 세은은 아니었다. 이렇게 커다랗고 으리으리한 집은 처음이라 세은은 기세에 눌려 며칠이 지나도 적응하지 못했고, 사용인들이 말만 걸어도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세은이 너무 어려워하자 진씨 집안의 가주, 진정원은 제 아들인 희수를 불러 둘을 잘 챙기라고 일렀다. TV에서 몇 번 봤던 얼굴이라 겁을 먹은 것도 잠시, 다정하게 대해 주는 희수에게 세은은 금세 경계를 풀었다. 희수는 바빴지만 오며 가며 자매가 보이면 꼭 반갑게 맞아 주었고, 그러면서 사소한 잡담을 하다 보니 서로의 간단한 신상 정도는 아는 나름대로 친근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은은 이 집안에 점차 적응을 해 나갔다. 무뚝뚝한 사용인들에게도 용기를 내서 인사를 했고, 가끔 그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집 안을 활보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아버지는 아주 능력 있는 연구자였는데, 그 때문에 가문에서도 기꺼이 불러 일을 부탁한 듯했다. 아버지에게 본채 지하에 있는 연구실을 주고 지원 역시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일매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잠깐만. 본채 지하에 있는 게 연구실이라고요?”
“네.”
그게 사실이라면 클럽 연구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이연이 저도 모르게 산오를 바라보았다. 산오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돈이 썩어 넘치는군.”
쌍둥이는 아버지의 조수 자격으로 연구실에 출입할 수 있었다. 사실 조수라고는 하지만, 아버지는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시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세은은 원체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해 연구실에 멀뚱히 앉아 아버지가 바쁘게 오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세미는 달랐다. 그녀는 연구실에 있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건드려 보기 시작하더니 이내 책상을 하나 받아서 하루 종일 몰두했다. 세은이 뭘 하냐고 물어도 다 만들면 알려 주겠다며 숨겼다. 세은이 알 수 있던 것은 책상에서 반짝이는 보석들이 굴러다닌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버지는 세미가 뭘 만들고 있는지 진작에 알아본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종종 이런저런 조언도 해 주었다. 두 사람은 곧 눈에 띄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세은은 둘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이론과 공식을 심각하게 토론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아무리 구경을 좋아해도 둘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은 가족을 줄곧 지켜만 보는 것은 묘하게 소외감이 일었고, 항상 같은 풍경이니 재미도 반감됐다. 그래서 세은은 커다란 연구실이나 산책하기로 했다.
지상의 면적만큼 넓은 지하를 통으로 쓰고 있는 연구실은 아버지와 세미가 주로 쓰는 메인 연구실 말고도 자잘한 창고나 서브 연구실이 많이 있었다. 알아주는 연구자였던 아버지도 이만한 연구실은 아주 예전에 딱 한 번 써 본 이후로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게 넓은 곳이니만큼 혼자만의 탐험을 할 장소는 많았다. 세은은 마치 정복이라도 하듯 살금살금 방을 열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하에 숨어든 어린아이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커다란 종이 박스가 쌓여 있는 뒤에 오도카니 앉아 그녀를 바라보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세은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학! 뭐야?’
그러나 여자아이는 오히려 세은을 향해 조심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쉬이. 이런 데서 떠들면 안 돼.’
‘누, 누군데 여기에 있어?’
이곳에 출입을 허락받은 것은 아버지와 세미, 세은, 그리고 가주인 진정원뿐이다. 이런 어린애가 어떻게…… 잠깐, 어린애?
‘난 강미래. 언니 이름은 뭐야?’
이 아이구나. 세은은 그제야 이 당돌한 꼬마 아이가 희수가 키운다는 그 아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은이 반사적으로 제 소개를 하기 위해 입을 벌리다 말고 멈칫했다. 아버지는 쌍둥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딱 하나, 별채에 가는 것만은 엄격히 금지했다. 별채에 사는 아이에게 이름을 알려 주었다는 사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비밀이야.’
‘이름이 비밀이야? 성은 뭔데?’
‘……이.’
‘이비밀 언니구나.’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바로잡기엔 이미 늦었다. 세은은 얼결에 이비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