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이연은 슬쩍 숨을 죽이고 통신기 너머를 살폈다. D.S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걱정이 됐다.
딱 한 번이었다던 미래의 공방 체험이라면 이연도 언제였는지 알고 있었다. 이연이 희수를 떠밀어서 미래와 D.S를 만나게 해 주었을 때. 그때 미래는 공방에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 D.S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내밀며 미래를 내보냈다.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고 하면 첫 번째로 나올 정도로.
- 형, 렌더링 끝났어. 보내 줄게.
침묵하는 D.S 대신 마이크를 잡은 것은 혜강이었다. 나직한 말이 끝남과 동시에 푸른 렌즈에 3D 지도가 펼쳐졌다. 이연이 커다란 구역을 눈으로 훑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야?”
- 왜 그러는, 헐…….
아연한 목소리에 혜강이 의아하게 대답하다 말고 신음을 내뱉었다. 작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보내느라 지도의 내용물을 제대로 확인한 건 혜강 역시 처음이었다.
진씨 본가는 본채와 별채, 두 개의 커다란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채의 절반 정도 되는 별채만 해도 방이 일곱 개쯤 되는 대저택이었으니, 본채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대단하다는 것쯤은 지도만 봐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견 보기에는 이상하지 않았다. 방이 좀 많긴 하지만, 원래 큰 집일수록 방과 화장실이 많지 않은가. 이해가 되는 수준이었다.
지상은 말이다.
- D.S 누나. 이 집 구조 이런 거 알았어요?
혜강이 심각하게 소곤거리자 D.S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옷자락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다가 우뚝 멈추었다.
- ……저게 뭐야? 이런 게 집에 있었다고?
한때 이 집에 살았던 D.S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웬만한 가솔들에게는 공개하지도 않는 공간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가장 수상한 곳이다. 이연이 지도를 확대했다.
거대한 본채의 면적 그대로, 지하에 한 층이 더 있었다.
“아무래도…… 본채로 가는 게 좋겠지?”
지도가 렌더링되는 동안 두 사람은 별채를 거의 다 둘러봤다. 별채는 조금 클 뿐이지 그야말로 가정집이라는 느낌이 났다. 아이가 지내는 공간이었던 만큼 손님은 물론이고 사용인도 거의 드나들지 않는 것 같았다. 살금살금 걸었다고는 하나 온 별채의 방을 다 열고 다녔는데 그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던 게 그 증거였다.
산오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지도를 따라 본채로 걷기 시작했다.
집이 하도 크다 보니 별채에서 본채로 건너가는 데만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침묵 사이를 걷다 보니 커다란 건물과 이어진 정원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신발 신고 집 안을 활보했네? 미안합니다……. 이연이 머쓱하게 제 발과 지나온 바닥을 번갈아 흘끔거렸다.
“가지가지…….”
산오가 혀를 차며 고개를 까딱이자 그들이 지나오면서 만든 흙 자국이 순식간에 바닥 안으로 파고들 듯 사라졌다.
“와, 너 짱이다.”
- 의외로 산오 형 능력이 실생활에 유용하다니까.
이연과 혜강의 감탄에도 코웃음만 치고 만 산오가 정원으로 발을 내딛으려다 멈췄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이연이 의아한 얼굴로 까치발을 들어 산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려는 순간, 산오가 거칠게 이연의 팔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시야가 반 바퀴 돌았다. 눈앞에는 이제까지 걸어온 별채 복도가 보였고, 뒤통수 뒤에는 단단한 가슴이 닿았다. 커다란 손이 이연의 하관을 전부 덮고 있었다. 딱히 힘은 주지 않았지만, 이연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굳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도 충분히 가릴 만큼 두꺼운 기둥 뒤에 숨은 산오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정원과 이어져 있는 본채 마루 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이연 역시 뒤늦게 그 소리를 들었다. 사람을 보고 숨은 거구나. 깜짝이야……. 이연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산오의 손가락과 품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칠칠의 보드라운 털이 손가락에 깊숙이 감겨들었다.
- 형. 많이 놀랐어? 심박수가…….
조, 조용히 해. 이혜강. 이연이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혜강을 타박했다. 고글로 이연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오늘처럼 민망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이상하다. 혜성 씨랑 붙어 있을 땐 이렇게 긴장되지 않았는데…… 물론 이 정도로 딱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산오는 혜강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산오의 손이 이연의 뺨에서 아주 조금 떨어졌다. 입이 해방되자마자 이연이 낮게 속삭였다.
“갔어?”
약한 입김이 손바닥에 닿았으나, 그것을 느낀 것은 산오뿐이었다. 산오는 열이 오르는 것 같은 손을 완전히 내리며 말했다.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으니 따라가야 한다.”
“응?”
영문 모를 말에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일하게 이 시간에 마루에서 서성이던 사람의 얼굴을 본 산오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세은이야.”
그는 처음 봤을 때도 세미와 세은의 얼굴을 정확하게 구분해 냈다. 그러니 산오가 세미가 아니라 세은이라고 했으면 그게 맞을 것이다.
“이세은 씨가 여기에 있었다고?”
“그래.”
세은은 세미의 탈주를 도운 협력자다. 떳떳하게 집 안을 돌아다닐 만한 신분은 안 될 텐데. 본채와 별채를 잇는 마당은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마음 편히 활보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가자.”
이연이 산오에게 눈짓했다. 산오가 선선히 앞장섰다.
세은의 뒷모습은 곧 포착할 수 있었다. 낯익은 단발머리가 어두운 복도 사이에서 찰랑거리며 걸어가는 것이 보이자, 두 사람은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세은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움츠린 어깨나 연신 두리번거리는 시선 같은 것이 그녀가 굉장히 조심스럽고 겁에 질린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은 하얗게 핏기가 빠져 있었다.
“어딜 가는 거지?”
- 조금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가는 방향은 별채 쪽이긴 해.
이연의 중얼거림에 혜강이 답했다. 별채? 그러고 보니 세은을 보고 숨은 곳도 본채와 별채를 잇는 정원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건너오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택한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 별채에 있어야 했던 사람이라면 딱 한 명이다. 미래.
“잡자.”
세은이 미래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연의 말에 산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까딱였다.
- 조금 더 앞에 가면 방 있어. 가구를 보니 팬트리나 드레스룸으로 쓰는 곳 같아.
혜강이 적절한 정보를 던져 주었다. 둘은 세은에게 조금 더 접근했다. 세은은 자신에게 미행이 붙은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는지 바쁘게 움직이기만 했다. 조심성이 없다기보다는 너무 초조한 상태라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이 사라진 직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리를 좁혔다. 두어 발자국 앞에 있는 사람의 발등 위에 하얀 모래가 모였다.
“앗……!”
순식간에 만들어진 줄에 걸려 넘어지던 세은의 몸은 작은 비명과 함께 옆으로 쏠렸다. 능력을 써 그녀를 잡아당긴 산오가 이연이 연 문 안쪽으로 세은을 밀어 넣고 자기도 들어섰다. 뒤이어 들어온 이연이 문을 닫았다. 탁, 하는 소리를 끝으로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다.
- 형들……. 이런 거 많이 해 봤어? 죽이 척척 맞네.
- 너네 완전 부부 강도단 같았어.
떨떠름한 혜강과 D.S의 말대로 사전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적절한 역할 분배였다. 부부 강도단은 무슨……. 이연이 투덜거리며 엎어진 세은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고글을 잠깐 이마 위로 당긴 후 쪼그려 앉았다.
“이세은 씨. 저 누군지 기억해요?”
그녀의 입은 산오의 능력으로 막혀 있었다. 산오와 이연을 알아봤는지 한껏 커진 눈과 찌푸려진 눈썹은 막았던 입을 풀자마자 소리를 지를 기세로 가득한 것 같았다.
“해치려는 거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요. 조용히 하면 풀어 줄게요.”
이연이 쉬, 하고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자, 공포에 헐떡이던 세은의 숨이 조금 더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여전히 불안한 듯 눈을 깜빡이긴 했지만 처음에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을 확인한 산오가 제 능력을 풀었다.
“이연 오, 빠가, 여긴 어떻게…….”
세은은 경계하듯 뒤로 물러나며 산오와 이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더듬대는 말에 숨이 짙게 섞여 악센트가 엉망이었다.
“당연히 의뢰 때문이죠. 세은 씨, 별채에 가려고 했죠?”
물음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연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래한테 가려고 했어요?”
세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쩔 줄 모르며 입을 한참 뻐끔대던 그녀가 내뱉은 건 겨우 한마디였다.
“……미래를 아세요?”
“이세은 씨, 왜 그래요.”
이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제 파트너가 누구였는지 기억 안 나요?”
“……!”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세은이 흠칫 몸을 떨었다. 미래는 세은과 세미를 모른다고 했지만, 세은의 반응으로 봐서 그녀는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세미 역시 미래를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아니, 어쩌면 알고 있는 걸 넘어서……. 이연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억지로라도 정보를 뱉어 내게 해야 하나? 내키는 방법은 아니지만……. 하얀 손가락 사이로 하얀 모래가 몇 알 감겨들려는 찰나, 세은에게서 예상외의 발언이 튀어나왔다.
“저, 저를 도와, 아니, 미래를 구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