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희수였다. 누구보다 이 일과 가까우면서도 이 자리에 없는 사람. 과연 그가 알면서도 방치한 거였을까? 하지만 희수 역시 세미를 제 손으로 잡아넣는 데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워낙 바빠서 대화하기가 힘드니 의중을 당최 알 수가 없었다.
- 그놈이 알든 말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D.S의 대답은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단호했다. 미래 일로 마음이 상했나? 명색이 보호자를 자처해 놓고 일에나 매진하고 있으니 화가 나기도 할 터였다. 이연이 그래도요, 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얼버무리려고 하자 D.S는 코웃음을 쳤다.
- 걔가 할 수 있는 건 없거든.
그 말이 주는 느낌이 어쩐지 묘해서, 이연은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그런 모습을 보는 산오의 눈썹이 슬그머니 가팔라졌다.
“진희수에게 관심이 많군.”
“아니, 궁금하잖아. 엄청나게 나쁜 분 같지는 않았는데…….”
“진희수가 몇 살인지나 알아? 늙다리가 취향인가?”
- 걔 30대 중반밖에 안 됐어.
그보다 연상인 D.S의 항변이 메아리처럼 들려왔으나, 산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취향 하고는.”
이 자식이 가만 보니 남의 보는 눈을 아주 폄하 중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비난에 이연이 발끈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나 늙다리 취향 아니거든? 그냥 평범하거든? D.S 씨 미안해요. 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 할 말 다 해 놓고?
빈정거리는 D.S를 뒤로하고 이연과 산오는 설전을 이어 나갔다.
“뭐가 평범한데.”
“그냥 뭐, 나랑 잘 놀아 주고 다정한…….”
산오가 코웃음을 쳤다.
“그따위 두루뭉술한 이상형은 처음 들어 보는군.”
“왜, 넌 얼마나 구체적이길래 그러는데?”
매서운 이연의 질문에 대답은 곧장 나왔다.
“생각 없는 사람.”
이연이 멈칫했다.
“그게 네 이상형이라고?”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산오는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의 의문은 깊어졌다.
“……왜?”
거기에 대한 답변이 나오기도 전에, 다시 통신기 너머로 목소리가 전해졌다.
- 저기, 산오 형 이상형 별로 안 궁금하니까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돼?
- 그래. 그런 거 관심 있는 건 정이연뿐이야.
“아, 아니. 저도 관심 없거든요?”
이연이 버럭 소리쳤지만 두 사람은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어쩐지 밀리는 느낌에 이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화제를 돌렸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D.S 씨 가문에서 초능력자 우대하는 분위기 있잖아요. 그거 최희원 씨가 주도한 거예요?”
최희원은 한참 전에 은퇴했지만 아직까지도 초호시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사실은 초능력 차별주의자였다니, 세간이 뒤집힐 만한 정보였다.
- 할머니가 아셨는지 모르셨는지는 모르겠어. 워낙 바쁘셨던 분이라 내가 집에 살 때도 뵙기 어려웠거든. 어쩌다 뵈어도 인사만 하고 지나치시곤 했고.
그녀는 거의 평생을 초능력 관리청과 도시를 안정화하는 데에 바쳤고, 은퇴 이후 초호시 외곽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D.S는 최희원이 본가에 걸음을 하지 않은지 이십 년은 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 방문을 왜 하지 않으시는지는 잘 몰라.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먼 거리를 다니긴 힘드시겠지.
“최희원 씨 댁에 안 가 봤어요?”
그 물음에 D.S가 씁쓸하게 웃었다.
- 내가 간다고 별로 좋아하실 것 같지 않아서.
“D.S 씨는 최희원 씨 안 좋아해요?”
- 안 좋아할 리가 없잖아.
어린 시절, 복도에서 그녀를 잠깐 마주치기만 해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함께 밥을 먹는 날은 일기장에 빼곡히 기록해 놓을 정도로 행복한 경험이었다. 최희원을 사랑하지 않는 초호시민은 없었다. D.S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 됐죠.”
- 되긴 뭐가.
“미래 여기서 빼내면 보러 가요. 그냥 손녀가 와도 기쁠 텐데, 증손녀랑 같이 오면 하늘을 날아다니실지도 모를걸요.”
과장된 표현에 D.S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네.
“쉽게 생각해도 되는 일 한 개쯤은 있어도 되잖아요.”
- …….
이연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 ……진짜 쉽게 말한다고.
D.S는 타박이라도 주는 것처럼 투덜거렸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빙긋 웃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보고 있던 산오가 툭 내뱉었다.
“입은 살았군.”
“……넌 왜 또 시비야?”
“너야말로 실천 좀 하고 다녀.”
“뭘?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있는데?”
이연이 말하며 그간의 생활을 꼽아 보았다. 출근하고 싶을 때 출근하고, 퇴근하고 싶을 때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집도 그만하면 괜찮고……. 잘 살고 있는데 왜 저렇게 불만에 가득 찬 건지 모르겠다.
“이래서 부자들이란…….”
“뭐?”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산다는 것도 힘들구나.”
“무슨 개소리지?”
이연이 산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산오가 인상을 쓰며 몸을 털었지만 이연은 다 이해한다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마인드로 살면 발전적일 것 같긴 해.”
“죽고 싶나?”
“앞으로의 네 인생이 기대된다. 파이팅!”
“그만하라고.”
- 쟤네 혹시 만담하는 거냐?
- 맨날 저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통신기 너머로 D.S와 혜강이 작게 소곤거렸다.
“아, 맞다.”
결국 산오에게 멱살을 잡히고서야 실없는 소리를 끝낸 이연이 D.S에게 물었다.
“D.S 씨, 혹시 미래가 콜했던 시간 있잖아요. 그거 시간대가 보통 어떻게 돼요?”
- 그건 왜?
이연은 초능력 관리청에서 알아낸 미래의 생활 여백에 대해 설명했다. D.S는 심각하게 듣다가 한번 집계해 보겠다며 조용해졌다. 무려 183개의 영상을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니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그 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산오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다 왔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땅 밖으로 토해지듯이 던져졌다. 갑작스러운 압력에 휘청이는 몸을 커다란 손이 낚아챘다. 단단히 감싸 안은 팔은 이연의 움직임이 멈춘 걸 확인하고 나서야 힘을 풀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널찍한 거실이었다. 높은 천장에 박힌 서까래에 대들보가 특징적인 한옥이었다. 한옥이라고는 해도 개조를 했는지 구석구석 현대적인 인테리어 요소를 넣었으나, 그 부분들이 절묘하게 맞물려 오히려 멋스러운 개성이 되었다. 낡아빠진 고택이라던 D.S의 험담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원체 큰 집이라 그런지 거실이 일반적인 가정집보다 한참은 컸다. 마루까지 합하면 이연의 집보다 큰 것 같았다. 어둠이 내려앉아 컴컴한 시야 속에서 고글이 작동했다. 주변을 슥 둘러본 이연이 별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본가라 그런지 넓네…….”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 거긴 별채야.
“여기가 별채라고요? 별채 거실?”
더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 아니. 별채 방.
“네?”
- 왜?
이게 방이라고? ……방에 왜 거실이 있어? 이연이 문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이게 어떻게 방이지? 심지어 당황한 것은 이연뿐인 듯 나머지 사람들은 심드렁했다. 생각해 보니 죄다 부자들이었다.
- 미래 방은 복도 건너 있어.
D.S가 위치를 알려 주자 산오가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등을 맹하게 바라만 보는 파트너를 눈치채고는 다시 돌아와 질질 끌면서 데려갔다. 종잇장처럼 팔랑거리는 몸은 쉽게도 끌려갔다.
- 렌더링은 70%쯤 됐어.
D.S의 말과 함께 방문을 연 산오는 시선만 슬쩍 비껴 양옆을 살폈다. 오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복도는 텅 비었다.
“미래는 보통 몇 시에 자요?”
드디어 정신을 차린 이연이 물었다.
- 9시쯤.
“지금쯤 자고 있어야 하겠네요.”
두 사람은 조용히 걸어 미래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첫 번째로 들어갔던 방이 어마어마하게 컸던 만큼 미래의 방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똑똑, 습관적으로 노크를 한 이연이 “미래야?” 하고 살그머니 부르며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창문에 두터운 커튼까지 쳐져 더 어두운 것 같았다. 이연의 고글이 다시 열일했다. 커다란 가구들의 형체가 렌즈 안에 그려졌다. FT-7의 활약으로 조금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조심조심 걸어 침대 앞에 도달한 이연이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침대 안은 이불이 조금 뭉쳐져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있다. 따뜻한 안도가 마음속에 퍼졌다.
“미래야?”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그러나 뭉쳐진 이불을 가만가만 흔들던 손길은 곧 그 무게가 과히 가볍다는 사실을 깨닫고 뚝 멈추었다. 아니길 바랐던 불길한 느낌이 뒷머리를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