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사납고 얄미운 목소리는 가시로 가득했다. 심통맞은 얼굴은 이연을 구박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묘하게 투정 부리는 것 같은 말투가 귓가에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 거야…….”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되짚어보면 과거에 그런, 그런 약속을 한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지금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은 기억을 하고 있을 줄도……. 뭔지 모를 감각으로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별안간 손끝이 움찔댔다.
“왜, 그래도 지금 우리 둘 다 헌터는 맞잖아.”
달아오르려는 뒷 목을 괜히 쓸어내리며 웅얼댔지만, 산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느낀 듯했다.
산오가 과거처럼 그를 친구로 여겨 주는 것은 좋지만, 현실은 과거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제산오도 충분히 아는 사실일 텐데. 이연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 좀 다르긴 하지. 넌 영웅이니까.”
그가 보기에, 산오만큼 그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무너지지 않는 등, 남을 구하려는 의지, 압도적인 능력. 이연과는 선천적으로 다르게 태어난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산오는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금세 표정이 사나워진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타이밍 좋게 주머니 안의 휴대폰이 울렸다.
“야, 잠깐만.”
이연이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D.S였다.
“어…….”
D.S는 이연의 엔지니어였기 때문에 연락이 온다고 크게 이상할 건 없었지만, 조금 전에 미래 생각을 해서인지 묘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화면을 빤히 바라보던 이연이 막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통화가 끊겼다. 대신 메시지 알림이 빠르게 떴다.
D.S 너 일 끝나면 당장 공방으로 와
D.S 의뢰 하나만 맡기자
“……뭐지?”
이연이 의아하게 중얼거리자, 산오도 고개를 흘끗 숙여 화면을 확인했다. 저 지금 못 가요. 초관청에 잡혀 있어서…. 그런 내용의 답신을 톡톡 찍고 있을 때였다.
D.S (사진)
타자를 치다 말고 D.S가 보낸 사진을 터치해 자세히 살펴본 이연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단숨에 커진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어.”
예쁘게 꾸며진 방 안. 인형을 껴안아서 카메라를 살짝 가린 살갗. 조금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다른 것은 딱 하나.
그 너머, 조금 열린 미래의 방문 틈 사이 복도로 세미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거 진짜야? 왜…….”
이연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정확히 말하면 세미인지 세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해 보였고, 설령 세은이라고 해도 세미의 도망을 도운 이상 그녀 역시 명백한 공범이었다.
누가 됐든 저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D.S는 노이즈가 잔뜩 낀 기사용 감시 카메라 화면으로도 쌍둥이를 알아봤다. 성능 좋은 카메라에 잡힌 인영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이연이 보기에도 세미—어쩌면 세은일 수도 있겠지만—로 보였고.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은 옆에서 튀어나왔다.
“저 자매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 아니야.”
산오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오히려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연의 뇌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초능력 팔찌의 재료도, 기술도 그녀들이 온전히 개발해 낸 게 아니다. 김 박사를 다시 만난 것은 세미를 이연이 잡아넣은 후였으나, 김 박사는 그 일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범위는 그의 전 연구 동료이자, 김 박사의 보석을 훔쳐 달아난 나머지 한 사람으로 좁혀진다.
“자유를 찾자마자 뒤에 있는 사람에게 달려갔겠지.”
세은과 세미에게 보석을 줬을 만한 사람. 세미가 어설프게나마 따라 할 수 있도록 기력을 다루는 기술을 알려 줬을 사람.
모르포.
“……저 집에 모르포가 있다고?”
이연의 목소리는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멍했다. 쥐어짜 내는 것 같은 음성은 곧 꺼질 듯 헐떡였다.
산오의 말이 정말이라면 모르포와 세은, 세미가 모두 미래의 집에 함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미래의 집은 초능력 우월주의로 가득 찬 가문.
이 모든 게 우연일 리가 없었다. 막연한 단서들은 드러나지 않은 실체로도 불길함을 조성했다.
“여기서 잠깐 나가, 나가야겠어.”
이연이 더듬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그가 곧장 전화를 건 것은 혜강이었다.
[어, 형. 왜? 초관청 일은 잘 끝났어?]
“아니, 나 아직 초관청이야. 어디 취조실 같은 데에 있거든.”
[뭐?]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도와줄 수 있어?”
뜬금없는 부탁에 혜강은 놀란 눈치였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
[잠깐만 기다려.]
침묵 속에서 타자 소리만 연이어 났다. 이연은 초조하게 휴대폰을 만지작댔다. 혜강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해 주고 있는 것을 아는데도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도 이연의 인내심이 다하기 전에 혜강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초관청이 초능력자들 상대로 하는 곳이다 보니까 감시 기술이 다른 데보다 삼엄해. 잠깐 감시 카메라 화면을 가리는 정도인데, 그사이에 뭔가 할 수 있겠어?]
“잠깐? 얼마나?”
[3분 정도. 그 이상이면 눈치챌 거야.]
그 정도 여유면 차고 넘쳤다. 이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리면 말해.”
혜강은 즉시 이연의 지시를 수행했다.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카운트다운이 떨어졌다.
[3, 2, 1…. 됐어.]
혜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얀 모래가 이연의 앞에 모였다. 길쭉하게 뭉쳐진 모래는 곧 두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남자 하나와 마르고 하얀 남자.
산오와 이연이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분신을 만들어 낸 이연이 산오를 돌아보았다. 분신들은 어느새 조금 전 둘이 앉아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공방으로 가자.”
산오는 말없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곧 벽이 동그랗게 뚫리며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생겼다. 이연은 망설임 없이 산오의 옆에 바짝 붙어섰다.
곧 방 안에는 얌전한 얼굴의 분신 둘만 남아 있게 되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두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혜강이 물었다. 이연은 간단하게 D.S의 이야기를 하며 혜강에게도 공방에 와 달라고 부탁했다. 혜강은 곧 장비를 챙겨 공방으로 가겠다는 답을 했다.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이연은 곧장 D.S에게 답신을 보냈다.
지금 가요
공방까지는 금방이었다. 산오는 친절하게 공방 내부까지 직통으로 데려다주었다. 덕분에 갑자기 바닥에서 솟아난 남자 둘을 목격한 D.S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너네 뭐야? 순간이동이라도 한 거야?”
“제산오가 있잖아요.”
이연이 짧게 일축하며 D.S를 눈짓으로 재촉했다. 무슨 일인지 빨리 설명해 달라는 의사를 알아들은 D.S는 가타부타 서론 없이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사진에서 본 것과 거의 같은 앵글이었다. 화면에 아이의 가느다란 팔이 얼핏 보였다. 미래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183번째 콜을 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자기 전에 잠깐 엄마를 부른 거겠거니 싶었어.”
D.S가 영상을 빨리감기 했다. 예쁘게 꾸며진 방 안에서 인형에 대고 내일 할 일에 대해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는 미래는 조금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여기.”
한참 돌아가던 영상이 멈춘 곳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낯익은 장면이기도 했다.
D.S가 보낸 사진 그대로였다. 미래의 방 앞 복도를 지나고 있는 것은 쌍둥이 중 하나였다.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에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동안 D.S의 빠른 브리핑이 이어졌다.
“몇 번이나 반복 재생 해서 분석했어. 확실해.”
침착하던 목소리는 조금 멈칫했다가 이어졌다.
“……아마 이세미인 것 같고.”
“아니, 대체 무슨…….”
이연이 황망하게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하지? 모르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저 집안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미래를 일단 저기서 빼내야……. 지금 미래는 괜찮긴 한 건가? 국장님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아니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나직한 중얼거림이었다.
“나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