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27화 (126/250)

#127

“쓸데없는 의심 중이군.”

탄탄한 몸이 방 안에 들어섰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린 이연이 저도 모르게 환해진 낯으로 불렀다.

“제산오.”

산오는 성큼성큼 걸어와 이연의 옆에 섰다.

“시간 낭비다.”

“제산오. 아무리 너라도 이건 월권이야.”

희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증거가 발견된 이상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나와야 했다. 무궁화 5단의 단순한 부정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피해자를 데려다 놓고 추궁하는 게 네 권리인가?”

“피해자? 하지만 정이연 씨는 아무런 기록이…….”

“신분 세탁했다.”

“야!”

순식간에 남의 과거를 까발린 산오를 향해 이연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아니, 누구는 지 과거 숨겨 주려고 갖은 머리를 다 굴리고 있는데 이 자식은 대뜸…….

“신분 세탁? 이름을 바꾸셨습니까?”

“아, 뭐…….”

이연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였다. 모종의 피해자가 과거와 엮이기 싫어 이름을 바꾸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있는 일이었다. 그 덕에 희수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초능력자 등록은 정상적으로 하신 걸로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미성년자 때 일입니까?”

어떡하지. 이연은 잠깐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산오와 모르포가 특정되지 않는 선에서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면……. 그런 정수리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본 산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모르…….”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간 건 정말로 찰나의 일이었다. 손바닥에서 입술이 달싹이는 감각에 소름이 쭈뼛 돋으면서도 용케 산오의 입을 틀어막는 데에 성공한 이연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애가 연장자한테 버릇이 좀 없죠…….”

“……그거야 익숙한데요.”

눈썹을 슬쩍 치켜든 희수에게선 날카로움이 조금 가시기는 했으나, 여전히 의혹이 가득 찬 눈빛이었다.

“그보다 방금…….”

“악! 야, 뭐 하는 거야!”

이연이 펄쩍 뛰었다. 이번엔 희수의 말을 막으려고 소리친 건 아니고, 손바닥에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핥, 핥은 거야? 미친 거 아냐? 축축한 손바닥을 차마 닦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든 꼴을 바라보던 산오가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입에 대 주길래 바라는 줄 알았지.”

“그런 걸 바라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너 미쳤어?”

“어휘력이 그게 단가? 유흥은 작작 하고 국어 공부 좀 하지 그랬나.”

“아니, 이 자식이. 그렇게 안 놀러 다녔…….”

유흥에 원수졌나? 왜 저렇게 뒤끝이 길어? 이연이 씩씩거리며 대꾸하다가 멈칫했다. 어. 잠깐만.

“두 사람 다, 여기가 놀이터인 줄 아는 겁니까? 공무 집행 방해로 잡아넣어 버리기 전에 성실하게 협조를…….”

“국장님.”

한바탕 훈계하려는 희수의 말을 끊은 이연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해져 있었다. 그 기색이 퍽 심상찮았기 때문에, 희수는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가만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혹시 미래가 학교 갔다 와서 여가 시간에 뭘 하는지 아세요?”

“……갑자기 말입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황당해하는 희수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은 이연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열 개가 넘는 미래의 브이로그. 평범해 보이는 영상들 사이에서 느껴지던 기묘한 위화감.

미래의 영상들은 모두 기본적인 생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학교를 가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노출되지 않았다.

브이로그는 자신의 일상생활을 찍는 거니 평소 생활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어딜 요란하게 놀러 나가는 게 아니더라도 가벼운 산책이나, 소꿉장난이나, 평소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뭐 그런 것들.

미래는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고, 학교 역시 이른 오후에 끝난다. 자기 전까지는 엄청나게 많은 여가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실질적으로 돌봐 주는 희수는 초능력 관리청에 출근을 해야 하니 대부분 곁에 없을 테고.

이연 역시 미래와는 나중에 만나면 뭘 할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현재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물어보긴 했던 것 같다. 할머니나 이모가 잘 놀아 주는지, 장난감은 어떤 게 좋은지 따위의 일상적인 질문들. 그러나 명확하게 대답이 돌아온 적은 없었다.

미래는 철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엇을 하고 노는지, 누구와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미래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이런 식으로 화제 돌리려고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국장님, 저 지금 진지해요.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예전은 말고 최근에요.”

이연의 말에 희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야…….”

그리고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몰랐다.

“……저는, 너무 바빠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잠시간 입을 달싹인 후 나온 말이라곤 그게 다였다.

“그래도 보호자인데 아무것도 몰라요? 브이로그 찍는 거 말고, 뭘 하고 지내는지?”

“그건…….”

희수는 이전보다 조금 더 망설였지만, 결국 분명하게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 반응에서 이연은 확신했다. 미래의 생활에는 분명히 수상쩍은 여백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은데요.”

그러나 희수는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 직무에 맞는 얼굴로 돌아온 남자가 엄격하게 재촉하자, 이연이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한번 의심을 품으니 모든 것이 수상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국장님.”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직원이 희수의 귀에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희수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이제야 말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주름이 팬 미간을 꾹 누른 희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묘하게 피로해 보였고, 그제야 이연은 희수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좀 푸석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정이연 씨는 여기서 잠시만 대기하고 계십시오.”

“네?”

직원이 가져온 게 급한 용건이긴 한 모양인지 희수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무기한 잡아 둔다고? 이연이 황당한 얼굴로 되묻자, 싸늘한 경고가 날아왔다.

“만일 억지로 빠져나가면 정식 절차를 거쳐 취조할 의사가 있으니 신중히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현재 이연은 ‘정중한’ 안내를 받아 온 상태였다. 그 증거로 그는 몸수색도, 통신기기 압수도 당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특별 대우라면 특별 대우다. 정식 절차를 거친 취조라는 게 이보다 더 엄중한 방식일 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희수는 산오에게도 짐짓 사납게 을렀다.

“그리고 너도. 내 허가 없이 정이연 씨 빼내는 건 공무 집행 방해야.”

산오는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돌렸지만, 희수는 그 말로도 충분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는 곧 직원과 함께 빠르게 걸어 방을 나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덜렁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연이었다. 머쓱하게 묻자 산오는 이연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기 기력 정제한 보석을 고스란히 갖다 바친 멍청이가 어디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하지.”

“…….”

침착하자, 정이연. 제산오는 나를 도와줬다. 재수 없게 말하지만 날 도와줬다……. 이연이 속으로 중얼중얼하며 주먹을 슬슬 푸는데, 산오의 말이 연이어 날아왔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숨기는지 모르겠군.”

그 목소리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투여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기쁜 이야기도 아니잖아.”

좋은 파장이 일어날 수가 없는 사건들이다. 부정적인 여론은 불 보듯 뻔했고, 그러면 산오가 이제까지 쌓아 온 것들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이연은 그냥 최소한 산오의 오점이 되지 않기 위해 행동했을 뿐이다.

“그놈의 지형 설정 기능 때문이군.”

망설이는 기색을 알아챈 산오가 단정하듯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었기 때문에, 이연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쓰는 게 낫지…….”

“대단한 자원봉사자야.”

매몰찬 코웃음이었다. 물론 기술의 근간이 좋지 못한 건 맞고, 그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내가 괜찮다잖아. 이연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깟 기력, 좀 뺏겨도 이연은 멀쩡히 살았다. 말마따나 자원봉사 했다고 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머리통을 산오가 짜증스러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이연의 생각은 안 봐도 뻔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정이연은 이정연일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평생 이렇게 살겠다고?”

“야,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삶이거든?”

가만 보면 이 자식이 숨 쉬듯 2단 헌터의 삶을 무시한다. 이연이 삐죽하게 흘기며 타박해도 산오의 얼굴은 짜증이 걷히지 않았다.

“나랑 약속했잖아.”

“……어?”

이연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한 번에 알아듣지도 못한 주제에 심장이 둥, 하고 울렸다.

“헌터 하자고 할 땐 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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