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산오는 정연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지는 연구소의 문을 통과할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오고 나서야 거친 숨을 고르며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제 친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믿을 수가 없어서, 산오의 눈이 멍청하게 깜빡였다. 아주 느리게 상황이 파악되었다.
정연이 없었다.
어쩌면 초능력을 써서 장난을 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장난도 좋아했으니까. 필사적으로 합리화한 산오가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이정연?’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는 금세 흩어졌다. 뇌가 새하얗게 비었다. 나온 문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산오가 막 발을 뗀 순간.
콰르릉!
굉음과 함께 연구소의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정…….’
산오의 눈앞에서 커다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시야 가득 자욱하던 먼지 더미가 가라앉고 보인 광경은 처참했다.
완전히 내려앉은 하얀 콘크리트와 틈마다 메워진 조그만 파편, 삐죽삐죽 튀어나온 철골은 사람은커녕 머리통 하나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빽빽했다. 뒤이어 쿠르릉, 쿠르릉,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건물이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전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산오는 어떤 말을 중얼거렸지만, 제가 뭐라고 한 건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목구멍을 막았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예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회피하듯 비틀대며 문 쪽에서 물러난 산오가 멍한 시선으로 건물 옆을 훑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시, 다시 들어가서 구해야 했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산오는 걷고 또 걸었다. 생전 둘러보지도 못한 건물의 외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만 봤다. 그래도 한 곳은, 잘못 무너져 내려 구멍이 난 곳 하나만 있다면…….
쾅! 콰릉!
넋이 나간 산오를 깨운 것은 커다란 폭음이었다.
그건 틀림없이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는 소리였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새가 없었다. 정연이 파편 더미에 깔리기라도 했다면……. 숨을 들이켜는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부서지면서도 내부를 틀어막은 파편 더미로 달려든 산오가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여린 살갗은 금세 생채기가 나고 엉망이 되었다. 손톱과 손바닥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고통 같은 건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맨손으로는 건물 파편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산오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초능력의 쓸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산오에게 초능력이란 실험 성공의 의미, 그리하여 정연과 함께 바깥을 구경할 수 있다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초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후회했다.
제가 정연만큼의 초능력이라도, 아니, 그것보다 약한 초능력이라도 있었다면. 그래서 정연을 구하러 갈 수 있었다면.
나비였다면 좋았을 텐데.
나비였다면…….
툭, 투둑. 물방울이 피범벅이 된 손등에 떨어졌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곧 세차게 쏟아졌다. 쏴아아……. 오랜만에 맞는 비는 차갑고 따갑고 섬뜩했다. 축축해진 피부가 곤두섰다. 이때부터 산오는 물에 젖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짜증 나는 점은 물기로 미끄러워진 손이 자꾸 헛손질을 한다는 거였다. 산오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온통 젖은 시야가 흐릿했다.
파편 더미를 쉴 새 없이 더듬으며 치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흠뻑 젖은 그의 몸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그의 어깨를 당긴 남자는 뭐라고 말을 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가 멍했다.
거칠게 소리치던 남자는 곧 산오를 안아 들었다. 안 돼. 여기서 떨어지면 안 돼. 산오는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지만 힘이 다 빠진 아이의 몸으로는 제대로 된 반항이 불가능했다. 묶이듯이 마른 천으로 몸이 둘러싸였다.
‘비, 켜……!’
‘꼬마야. 안 돼. 여긴 너무 위험해. 넌 너무 많이 다쳤고!’
‘이정연을 구해야 해.’
‘이정연?’
‘친구가, 안에…….’
‘아이? 여기 아이가 하나 더 있어? 우리가 그 친구 최대한 찾아볼게. 그러니까 치료부터 받아.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겨.’
산오가 아무리 싫다고 고개를 저어도 그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반강제로 차 안에 옮겨져 어디론가 이송되었다. 그는 그 후로도 한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어나니 응급실이었다. 잔뜩 상처가 난 양팔은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깜빡 눈을 뜬 산오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꿈을 꿨다. 정연과 함께 탈출했는데, 정작 정연이 없는…… 아주아주 이상하고 짜증 나는 꿈이었다. 산오는 그게 악몽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 웃기는 이야기를 제 친구에게 해 주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네가 날 버렸어.”
“……그, 게…….”
“혼자 남겨 두고 가 버리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았나?”
병원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던 산오는 뒤늦게야 정연이 만들어 줬던 운동화 역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끗한 맨발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형편없는 현실이었다. 산오를 끌어낸 어른들도 정연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병원에서 나온 산오는 그대로 다시 거리를 떠돌았다. 연구소 안에서만 줄곧 살아온 소년은 여기가 어딘지도, 연구소가 어딘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연구소로 가고 싶어서, 가야만 해서 무작정 걸었다.
살아 있는 정연이 아니어도, 정연의 시체라도 찾아야 했다. 그 녀석은 자기가 첫 친구라고 했다. 늘 산오에게 놀자며 찾아왔다.
분명히 외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함께 있어 줘야 했다.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거나 먹으며 헤맨 어린아이의 몸은 꽤 오래 버텼으나, 결국 지쳤다. 산오는 어느 날 인적이 드문 골목 구석에서 쓰러졌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다. 모로 누운 탓에 몸이 삐뚤게 쏠렸다. 그 상태로 산오는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득 길바닥 사이에 블록이 깨져 삐죽 솟아오른 것이 보였다. 그 모양은 무너지는 건물 파편을 닮아 있었다.
산오는 아주 무심코, 그게 보기 싫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깨진 블록이 느리게 꿈틀대며 땅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초록색 빛이 휘몰아치는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방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제가 한 거였다.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처음엔 걸음마 배우듯이 서서히 체득했지만, 곧 속도가 빠르게 붙었다. 5분도 안 되어 그는 주변의 모든 땅을 고르게 만들 수 있었다.
산오는 그게 그 연구소의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변화’라는 것을 알았다.
‘하…….’
허탈한 신음이 아무도 없는 골목에 흘렀다.
곧이어 그를 덮친 것은 강렬한 증오였다.
정연처럼 온갖 걸 만들어 내는 능력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대단한 힘이었다. 무너진 잔해 더미 정도는 손쉽게 치울 수 있을 정도로. 때를 놓친 발현은 기쁨 대신 자괴를 불렀다. 왜 이제야, 어째서 지금.
“내가 내 능력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
“난 너를 구할 수도 있었어.”
능력을 각성해도 위치조차 모르는 연구소를 찾아가는 것은 어려운 여정이었다. 그러나 수십 수백 번의 허탕 끝에 산오는 기어코 위치를 찾아냈다.
그게 연구소가 폭파된 지 1년 되던 해였다.
연구소는 부지만 남기고 텅 비어 있었다.
산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구소 근방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정연의 행방을 찾았지만, 아무도 그 소년을 몰랐다. 1년쯤 더 미친 듯이 헤매고 나서야 지금의 산오로서는 정연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간신히 받아들였다.
그 후로는.
그 후로는 그냥.
“내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나?”
산오가 사납게 웃었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희미했다. 뭘 하려고만 하면 정연이 나타나 손을 뻗던 그 순간이 떠올라서 손에 힘이 빠졌다. 그냥 살았다. 죽지 못해서, 그냥.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정처 없이 걷는 게 일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걷던 산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의미 없이 올려다본 표지판에는 ‘초호시’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초호시. 들어 본 곳이다.
산오는 홀린 듯 도시로 발을 들였다.
거기서 희수를 만났다. 희수는 산오의 능력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이름이 있나? 이름이 뭐지?’
이름. 그에게는 딱 한 사람만이 불러 주던 이름이 있었다.
‘제산오.’
처음으로, 산오는 제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래서 그는 공식적으로 제산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