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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19화 (118/250)

#119

그는 긴 잠에서 깨어난 이후 의식적으로 모르포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이연은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지형 설정 기능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삼촌이 한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그 기능을 실제로 보고, 이연은 그게 제 능력이라고 확신했다. 바보도 아니고 모를 수가 없었다.

아, 이런 곳에 쓰였구나.

당시에 든 것은 놀랄 정도의 안도감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불법적으로 갈취된 초능력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 지형 설정 기능은 사라질 것이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지형 설정 기능은 사람들의 안전과 발전에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었고, 굳이 없애고 싶지 않았다.

그럼 됐어. 그냥 이대로 묻어 버리자. 안일한 생각이 심장을 채웠다. 이제는 관련이 없어졌다는 말로 회피했다.

대체 모르포의 뭘 믿고 그간 이연이 아닌 타인의 기력을 갈취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거지?

빤히 이어져 있는 사건을 이해하려는 노력은커녕, 행간을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순진해 빠진 사고방식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이연을 놀리기라도 하듯 김 박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김 박사의 신기술에 모르포 역시 크게 흥미를 보였고, 두 사람은 끈끈한 협력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모르포가 점차 독단적으로 굴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작았다. 외부 물건을 상의 없이 연구소 안으로 들여오거나, 연구 재료를 제 맘대로 비슷한 것으로 바꾸거나 하는 등의 사소한 일들. 짜증이 나긴 했지만, 기분이 상할 뿐 별일은 아니었다.

모르포는 김 박사를 두고 간이라도 보는 것처럼 스케일을 점점 늘려 나갔다. 연구 과정을 자잘하게 변경하거나 실험 보고서 누락 같은 건 이제 너무 흔해서 따지지도 않았다. 그는 심지어 어디선가 다른 변이종까지 구해 오기도 했다. 그 변이종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채 어느 날 연구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들을 모두 그냥 두고 넘긴 것은 그가 오로지 모르포였기 때문이었다. 이름값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김 박사는 연구를 함께 하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선은 있었다.

어느 날, 김 박사는 모르포가 자신이 모르는 포탈을 연구소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름 아닌 배신한 연구원, 재경을 쫓다가!

포탈은 설치하기 위해서는 외부인, 그것도 순간 이동 능력자를 데려와야 했다. 그래서 김 박사는 비상용 포탈 하나를 설치했을 때도 신중에 신중을 기울였다. 입막음 비용 역시 어마어마하게 지출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 모르는 포탈이 떡하니 박혀 있었던 것이다.

포탈을 살 만큼 부유하면서도 꼭 그만큼 제멋대로인 사람은 연구소 내에서도 단 한 명뿐이었다.

오래도록 쌓여 온 감정에 재경을 놓친 것까지 더해, 김 박사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모르포에게 항의하자 그는 오히려 포탈이 두 개이니 이동이 편해지지 않았냐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 박사는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겠다면 당신과 일할 수 없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모르포는 이렇게 말했다.

‘뭐, 그러시든가.’

그리고는 연구소를 떠났다. 이연과 산오가 연구소에 침입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심지어 홀몸으로 가지도 않았다. 모르포는 클럽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던 보석 절반을 훔쳐 달아났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김 박사는 사람을 모아 모르포를 쫓았지만, 연구소 내 침입자가 있다는 연락에 끝까지 추적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연구소가 그렇게 조용했던 거였다. 당시에도 수색하면서 넓이에 비해 과하게 한적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런 비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누군가 그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 건방진 놈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김 박사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지만, 이연은 적당한 대답을 해 줄 여유도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모르포는 클럽 연구소에 숨겨 둔 포탈의 목적지를 이연의 동네로 설정해 두었다. 그래서 연기여우가 이연의 동네 근처 백화점에서 출몰했던 것이다. 재경이 포탈을 탔을 때 이연의 동네 공원에 쓰러져 있던 이유 역시 동일했다.

소름이 돋았다. 그때 모르포는 이미 이연의 근처까지 왔었다.

“그렇다면 김철재 씨는 이제 모르포와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군요.”

“난 그 자식 없이도 홀로 일어섰어. 이 공장이 그 증거지.”

클럽 연구소가 폭파된 이후, 김 박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허름한 여관만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공장 관계자를 만났고, 그의 기술을 본 관계자는 김 박사를 채용했다.

그러나 직장을 얻은 것과 모르포에 대한 원한은 별개였다.

“너, 어떻게 내 연구소를 알았지? 모르포가 정보를 팔았나?”

김 박사가 이연을 꼬나보았다. 따지자면 모르포가 흘린 것들로 클럽 연구소를 잡은 건 맞았지만, 중간에 희수가 껴 있는 이상 이건 우연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걸 곧이곧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뭐…….”

애매한 대답에 김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믿고 싶은 대로 단정한 남자는 감정이 북받친 듯 외쳤다.

“고작 실체화 능력 하나 가졌다고!”

이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김 박사는 등을 돌리고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뭐, 괜찮아. 이제는 나도…….”

목소리가 너무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라는 거지? 인상을 찌푸린 이연이 가까이 다가가 철창 쪽에 손을 댄 순간.

파직!

“앗…….”

철창 사이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연이 놀라 뿌리치듯 손을 뗐다. 철창을 이루는 창살 전체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게 뭐예요?”

이연의 당황을 느꼈는지 김 박사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전기가 흐르는 감옥에 가둬 놓고도 낯빛이 태연했다.

“네 협조가 필요해서 말이야.”

누가 예전 동료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게 똑같았다.

이연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에서 떨어진 감옥은 그대로 천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 전기 역시 저기에서 흘려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걸 차.”

김 박사가 철창 사이로 던진 것은 손목시계처럼 생긴 기계였다. 이연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지도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척 봐도 수상하게 생긴 물건인데 괜히 손댈 이유가 없었다.

“고민하는 건 좋은데,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드드득. 김 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묘한 소리가 들렸다. 주름이 접혀 있던 물통을 펴는 것 같기도 하고 조립식 가구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한 소리는 간격을 두고 연이어 퍼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연은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감옥의 모습이 조금 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철창이 조여들고 있었다.

한 평 정도의 공간이었던 감옥은 바닥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아주 느리지만 멈추지 않았다. 전류가 흐르는 쇠창살이 이연의 몸에 닿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전기가 오른 뒷 목이 아직도 얼얼한데, 이런 데에 공격당하면 온몸이 쑤실 게 빤했다. 이연이 그렇게 기절하면 김 박사가 억지로 팔찌를 채울 테고.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다.

그렇다면 괜히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감옥 자체를 부숴야 했다.

“협조라는 걸 하면 제가 살아 있긴 해요?”

두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천장 너머, 사슬 이음매가 있는 부분 위쪽에 하얀 모래가 모여들었다. 이연은 김 박사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졌다.

“글쎄, 네가 운이 좋다면.”

김 박사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얄미운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영에게 듣지 못했나? 난 유능한 연구원이라 평가가 괜찮은데.”

퍽이나 안심되겠다. 이연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능력을 조금 더 모았다.

그의 능력으로는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파괴할 수 없었으므로, 도구로 쓸 수 있을 만한 걸 만들어야 했다. 감옥을 천장에 매달고 있을 정도니 한계 하중이 클 테고, 무거운 것을 매달아 떨어트리는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사슬이 붙은 부분을 부숴 버리는 게 가장 빨랐다. 이건 솔직히…… 너무 티가 나겠지만, 잡혀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이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와 동시에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고 전체가 충격으로 진동했다.

“뭐, 뭐야?”

놀란 김 박사가 소리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연은 다시 능력을 썼다.

쾅! 쾅! 콰앙!

거대한 무언가가 창고를 내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충돌이 있을 때마다 사슬이 차르륵대며 흔들렸다. 이연이 위를 바라보았다. 확연히 우그러진 천장에 금이 가며 이음매가 달랑였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뭘 하는 거야!”

생각지 못한 상황에 김 박사는 겁을 먹은 듯했다. 이런 거에 금방 놀랄 거면서 왜 사람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지 모르겠다. 이연은 능력을 멈추지 않았다. 쾅! 강한 충격이 다시 한번 창고 외벽을 강타했다. 파직, 하는 소리가 나며 이음매가 떨어졌다. 내부 전선 몇 개가 끊어지다 말았지만, 이미 전류 창살은 멈춘 후였다.

“이제 시간이 많아졌네요.”

김 박사는 이연이 놀리듯 하는 말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할 만큼 당황한 듯했다.

“너, 너……. 날 속였나?”

“속이다니. 뭘 말한 적도 없는데.”

이연이 그 말과 함께 만든 것은 커다란 펜치였다. 막 멋있게 말한 참이니 좀 더 우아하게 나갈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생각나는 거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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