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18화 (117/250)

#118

제산오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놈이 왜 이연의 집에 구겨져 산단 말인가? 산오가 이연에게 눌어붙은 건 모르포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으니, 목적을 달성했다면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건 이연이 바란 상황이다. 산오는 원하던 것을 얻었고, 평화롭게 떠나가고, 이연은 다시 혼자 남는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미래였다.

그러나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막연한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니 바보 같은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있는 줄도 모르던 속마음이 주제도 모르고 머리를 쳐들었다.

산오가 저와 떨어져 행복한 삶을 사는 게 더 좋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고 싶었다. 그냥 나랑 계속 친구 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이야기 정도는 나누면서 지내자 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본인이 어이가 없어서, 이연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이야기는 무슨. 걔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어. 연구소에 갇혀서 학대받던 이야기? 염치도 없는 생각이다.

만약 그가 왜 여기 있어야 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변변찮게 변명할 말도 없었다. 당장 가볍게 대화할 구실도 못 찾아서 여기까지 온 마당이다. 계속 동거할 명분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넌 지금…….]

“나,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끊을게.”

산오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실없는 말을 할 것만 같아서, 이연은 황급히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을 쥔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허탈한 목소리는 아무도 없는 창고 안에서만 맴돌다 스러졌다.

갑자기 이정표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끈 떨어진 연처럼 가만히 창고에 있던 이연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5분은 지난 후였다.

뒤늦게 차린 정신은 뇌를 혹사해 이유를 쥐어 짜냈다. 제산오가 정보를 찾았다고 하긴 했지만, 혹시 김 박사에 대한 정보도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김 박사한테 의외의 연결고리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정말로 절박하고 구저분한 핑계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언젠가 갈 거라고는 생각했어도 지금은 너무 이른 시기였다. 갑작스러운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느닷없이 끝내 버리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냥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자고 하자.

그렇게 한 번만 보면 만족하고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을 깨우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은 이연이 창고 번호를 확인했다. 63번. 아직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김 박사를 잡는다는 목표는 동일했다.

지금쯤이면 영과 정헌, 그리고 소녀는 공장을 빠져나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카운트다운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긴가.”

71번 창고는 금방 찾았다. 여기가 넓긴 해도 영 씨가 서른 명은 있다고 했는데. 이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주위가 고요했지만 그에게는 이득이긴 했다.

김 박사가 있는 곳은 주변의 다른 창고들보다 두 배는 큰 창고였다. 위에 작은 컨테이너들까지 두어 개 쌓아 놓아 존재감이 대단했다. 누가 봐도 최종 보스가 있는 곳이네. 이연은 입구 앞에 잠깐 멈춰 마치 성같이 생긴 창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들어가기 전 안을 먼저 살피지도 않았다. 이연은 바로 창고 안으로 입장했다.

“김철재 씨. 계세요?”

딱딱한 목소리가 쇠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창고 내부는 온갖 짐을 높게 쌓아 놔서 시야가 좁은 구조였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지만, 혜강의 정보가 틀릴 리가 없었다. 이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걸으면서 하얀 공책과 펜을 만들어 쥐었다. 저벅, 저벅. 여유로운 발소리는 산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연은 일부러 본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김 박사를 찾았다. 그림이 없으면 제대로 된 공격도 못 하는 2단에게 큰 경계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김 박사는 곧 제 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배짱도 좋군.”

낯익은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주름이 조금 더 늘어 있었다. 숨죽여 지내는 동안 마음고생이라도 한 모양이지. 이연은 가장 먼저 그의 무장을 확인했다. 그럴 것 같았지만, 별다른 방비조차도 하지 않은 듯했다.

뿐만 아니라 김 박사는 혼자였다. 뭐, 여럿이었어도 상관없었지만.

“오랜만이에요.”

영은 이연을 묶어 두고 김 박사에게 보고하러 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난 이연 옆에 영이 없었던 거고.

그런데 데리러 간 영은 감감무소식이고, 한참 후 이연만 이곳에 들어왔다. 그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빤했다.

“좋은 실험체였는데 아쉬워.”

김 박사의 어조는 빈정거리는 것 같았지만, 진심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 순정이 어이가 없었다. 절로 삐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참 유감이네요.”

“괜찮아.”

영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짐작했음에도 김 박사는 놀라울 정도로 태연했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는 네가 있지 않나.”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더니 이연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날렸다. 이연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보호했으나, 곧 이 공격이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능력을 거두었다. 하얀 모래는 흙구름과 함께 흩날려 사라졌다.

이건 그냥 감옥이었다. 이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네모난 철창에 그대로 갇혔다.

“믿고 있는 게 이거였어요?”

과연, 그림 실체화 능력을 가진 무궁화 2단 초능력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심지어 김 박사는 이연의 그림 능력이 얼마나 허접한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나.

김 박사는 이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번들거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너만 있으면, 내가 모르포를 뛰어넘을 수 있어.”

연구자들에게 인기 폭발인 인생이다. 심지어 능력을 숨긴 상태에서도 이러다니, 살 같은 게 낀 거 아냐? 굿이라도 해야 하나? 이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웬 경쟁……. 연구 대회 같은 거라도 열렸어요?”

“모르포가 유명한 건 실체화 능력이 있기 때문이야.”

정확히는 그가 갈취한 기력이었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모르포는 자신이 실체화 능력을 가진 것처럼 꾸미고 다녔던 모양이다.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든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거 뽑혀 준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남아 있냐고.’

이연이 투덜댔다. 대체 뭘 얼마나 뜯어냈으면 10년 내내 이렇게 알차게 우려먹나 싶을 정도다. 솔직히 지형 설정 기능 만들면서 거의 다 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원석이 나한테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저는 그림 실체화인데요? 분류가 달라요.”

실제로는 같은 능력이긴 하지만, 김 박사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연의 그림 실체화 능력은 실체화 능력의 하위 분류에 해당하고, 등급 역시 하급에 속했다. 모르포가 가지고 있는 실체화 능력과 비교한다면 활용법에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이연의 지적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가 대꾸했다.

“그것도 훌륭한 연구 사안이지.”

딱히 아쉬워 보이지도 않았다.

“모르포와 친한 줄 알았는데요.”

이연은 방향을 바꾸었다. 김 박사는 이미 잡힌 기력 덩어리를 향해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이전에는 그랬지.”

김 박사가 클럽 연구소를 처음 세웠을 때, 모르포가 접근했다. 그는 김 박사에게 초능력자에게서 기력을 뽑아내는 기술을 알려 주었다. 이 기술이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단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김 박사는 금세 모르포를 신뢰하게 되었다.

“……모르포가 알려 준 거라고요? 그걸?”

이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기술 협력 관계라고? 하지만 클럽 연구소에는 모르포의 흔적이 없었는데. 산오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아니, 잠깐만.’

연기여우 건을 희수가 의뢰하러 왔을 때, 이상할 정도로 승낙이 빨랐던 산오의 모습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설마, 설마 그때부터 예측하고 있었나?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고?

이연은 당연히 김 박사가 모든 것을 개발한 줄 알았다. 그가 알기로, 모르포는 기력을 보석으로 정제하는 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초능력 팔찌도 김 박사가 만들어 낸 보석들을 훔쳐서…….

“그렇지. 어느 정도 기여가 있는 건 사실이야. 나머지는 내가 다 했지만.”

김 박사가 유언장이라도 읽는 것처럼 엄숙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모르포의 기술을 바탕으로 뽑아낸 기력을 보석으로 압축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해 냈다.

“그럼 당신 연구소에 있던 보석들은…….”

“그래. 절반은 모르포가 가져온 걸로 만들었지.”

이연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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