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움직일 시간이다. 이연이 정헌에게 물었다.
“정헌 씨, 휴대폰 있어요?”
혜강은 거의 즉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혜강아.”
[형? 이거 누구 폰이야?]
“나 좀 전에 납치당했어.”
[뭐?]
혜강은 당연히 기함했다. 단번에 높아지는 목소리에도 이연은 태연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서영 씨라고, 나랑 초전력 같이 했던 분 기억나? 그 사람이 납치했는데, 얘기 잘 해서 풀었어. 부지 안으로 들어왔고, 가방은 펜스 바깥에 있을 거야. 나갈 때 회수하려고. 내 휴대폰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아. 유정헌 씨도 우연히 만나서 같이 있어.”
다짜고짜 줄줄 읊는 정보는 다른 사람이라면 놀라느라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겠지만, 혜강은 몇 년이나 이연과 함께 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어쩐지 전화를 안 받더라니. 다친 덴 없어?]
“응. 목이 좀 저릿하긴 한데…… 아, 찔리라고 하는 이야기 아니에요. 나머지는 괜찮아. 뭘 알아내긴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지금 말해 주긴 그렇고, 조금 더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아.”
[알았어. 일단 휴대폰부터 찾아.]
“응.”
전화를 끊은 이연이 정헌에게 휴대폰을 다시 돌려주었다. 어느덧 바닥은 전부 녹아 원래의 색이 드러나 있었다.
“영 씨,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있는데.”
영의 시선이 가만히 닿자, 이연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혹시 김철재 씨에 대해서 알아요?”
영은 어쩐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곧 순순한 실토가 튀어나왔다.
“서로 아는 사이였군……. 사실은 널 데려오라고 한 게 그 사람이야.”
“네?”
영은 원래 이연을 멀리 떨어진 곳에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기절시킨 후 진행되었던 간단한 보고에서, 이연의 얼굴을 확인한 김 박사가 당장 그를 여기에 데려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럼 강하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도 김철재 씨인 거예요?”
“응.”
김 박사는 현재 공장의 수석 연구원으로, 그가 가장 먼저 초능력 이식을 해 준 상대가 바로 영이었다. 첫 수술자라서 그런지 김 박사는 특히 영에게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 영이 강한 능력을 가지게 된 것도 그 덕이었다. 갈 곳을 잃은 영이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했을 때 흔쾌히 채용한 것도 그였고.
“절 왜요?”
“거기까진 모르겠어.”
뭐……. 얼추 짐작은 갔다.
김 박사는 이연의 능력을 처음 봤을 때부터 모르포를 언급했다. 이연의 기력을 담은 초능력 팔찌가 세은에게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모르포가 가지고 있는 실체화 능력—정확히는 이연의 기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테고, 이연에게 수술 제안을 한 것을 보니 관련 능력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이연이 실체화 능력을 대체할 수 있다고 여겼거나, 아예 그에게 실체화 능력을 이식해 실험하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류 창고지만, 까보면 초능력 이식 실험을 하고 있는 불법 공장. 이전에 불법 연구소를 운영했던 경력이 있는 김 박사에게는 안성맞춤인 새 직장이다.
오늘 해고되겠지만.
“정보 고마워요. 그럼 전 가 볼게요. 여기 사람이 몇 명 정도 있다고요?”
“스무 명에서 서른 정도. 전투 인력은 열 명 아래. 그래도 부지 곳곳에 떨어져 있어서 한꺼번에 상대할 걱정은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은 슬며시 걱정이 되는지 덧붙였다.
“같이 가도 되는데.”
“괜찮으니까 먼저 나가요. 신고나 좀 해 주세요. 한…… 30분쯤 후에?”
이연이 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영 씨의 자유겠지만, 되도록이면 영 씨가 직접 신고를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망설임 없이 자백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얼굴은 어딘지 후련해 보였다.
“그리고 D.S 씨 공방 습격해서 보석 훔친 것도 두 분이죠?”
“그걸 어떻게…….”
“제 거래처예요. 보석은 제 거고.”
영이 수술을 통해 강한 능력을 손에 넣었다면 아귀가 들어맞았다. 무너지는 클럽 연구소에서 D.S의 인장을 발견한 김 박사가 영을 통해 공방을 뒤지라고 한 거겠지. 그러다 보석을 우연히 발견해서 회수한 거고.
“그게 네 거라고? 여기서 쓰는 것과 완전히 같았는데.”
“뭐, 어쩌다 보니 어딘가에서 좀 슬쩍했다고나 할까…….”
여기서 김 박사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늘었다. 놓친다면 D.S에게까지 피해가 다시 미칠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튼, 그분이 정말 화가 많이 나셨거든요.”
영의 낯이 조금 굳었다.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
저도 그런 짓은 처음이었다고, 변명하듯 말끝을 흐리는 영의 어깨를 이연이 토닥였다.
“됐어요. 제 책임도 좀 있어서 변상은 제가 하기로 했으니까, 나중에 사과나 하세요.”
이제 정말 해산할 시간이다. 이연이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는 세 사람이 먼저 창고를 나서는 것을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왔다. 30분의 시간제한이 생겼다.
부지 내부는 영의 말대로였다. 사람이 간간이 지나다니긴 했지만 보통 제 갈 길 가느라 바빴기 때문에 이연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공장 자체가 한적했다.
휴대폰과 김 박사를 빨리 찾으려면 갈 길이 바빴다. 이연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복잡한 계획을 세울 것도 없었다. 김 박사만 잡으면 된다.
정보를 찾아서 산오에게 가져다주면 도움이 되겠지. ……그러면 연락 정도는 먼저 해도 될 거고. 구차한 생각을 감춘 이연이 명랑한 걸음걸이로 또 다른 창고에 들어섰다. 영이 알려 준 휴대폰의 위치였다.
창고는 다행히 텅 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갖 잡동사니 더미 사이에 이연의 휴대폰이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다. 수많은 창고들 중에서도 골동을 대강 쌓아 놓는 용도인 것 같았다.
내 소중한 전자기기……. 냉큼 휴대폰을 주운 이연이 슥슥 먼지를 털고 소중하게 화면을 켜 보았다. 다행히 고장 나지는 않은 듯했다. 이연은 곧장 혜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찾았어.”
[고생했어. 김철재 씨 위치 변동 없어. 그대로 가.]
“알았어.”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CCTV도 확보했어. 다시 뜯어서 확인해 보니까 다른 영상으로 대체되고 있더라고. 지웠으니 이제 사용 가능해.]
“아, 응…….”
이연이 멈칫했다. 혜강이 감시 카메라로 상황을 보고 있게 되면 이연의 본능력을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김 박사 포획 난이도는 훨씬 높아진다.
그렇다고 CCTV를 꺼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혜강은 당연히 이유를 물을 테니까.
정헌과 영에게도 까발린 마당에 이제 와서 혜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말해 버리면 된다. 하지만, 하지만…….
이연은 망설이느라 태연하게 부탁할 타이밍을 놓쳤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말을 더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혜강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그냥 해. 카메라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어?”
[흔적 안 남게 하면 되는 거 아냐.]
마치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허를 찔린 이연이 맹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형. 나는 형의 오퍼레이터야.]
“…….”
[분석하는 게 내 일이고. 몰랐을 리가 없잖아.]
짐작만 한 정도지만, 하고 혜강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방이 없으면 능력 사용이 엄청 까다로워질 텐데, 일 다 처리하고 나가는 길에 회수하겠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수상하지.]
형은 가끔 보면 엄청 허술하다니까. 혜강은 놀리듯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조금 시무룩하게 처져 있었다.
지금 만족해? 영에게 잘난 듯 했던 말은 이연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관성은 힘을 빼면 멈출 수 있었다. 거짓말은 그만둬. 영에게 하던 말을 이연이 제게 되뇌었다. 영이 했듯이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어깨에 힘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한번 한 이연은 전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이거 끝나면, 나랑 얘기 좀 하자.”
[응?]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혜강의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연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조그마한 목소리가 간신히 전해졌다.
[응.]
혜강과 전화를 끊은 이연은 바로 창고 밖으로 나서는 대신 조금 고민했다. 무심코 내려다본 통화 기록에 산오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오전에 연락했던 부재중 기록이다. 고작 세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술렁거렸다.
간단하게 전화 한 번만 해 볼까? 별건 아니지만, 내가 정보 알아 갈 테니까 만날 준비 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김 박사를 잡는 건 확정이니까 미리 연락해도 되잖아. 이연이 합리화를 웅얼대며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아침에 전화했을 때는 휴대폰이 꺼져 있었지만, 오전에 종희가 연락을 받았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은 켜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러니까…….
“윽.”
수많은 망설임 끝에 눈을 질끈 감은 이연이 화면을 터치했다. 곧 통화연결음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뚜르르…….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소리는 절로 긴장을 유발했다. 침까지 꿀꺽 삼키며 초조하게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뭐야.]
받았다. 이연의 눈이 커졌다. 어, 어. 분명히 생각한 말이 있었는데 막상 산오와 전화가 연결되니 입 밖으로 야무지게 튀어나오지가 않았다. 이러는 새에 끊어 버리면 안 되는데. 이연이 긴장을 털어 내듯 손에 힘을 꾹 쥐었다.
“그, 너 지금 어디야?”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연 본인이 듣기에도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산오 역시 그것을 느낀 듯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아니, 앞으로 생길 수도 있는데, 그냥 알아 두라고.”
[대낮부터 술 처먹었나?]
싸늘한 목소리에 이연은 기가 죽었다. 술을 혐오하는 사람처럼 악센트가 들어가 있어서 더 그랬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모르포가.”
[모르포?]
“너 인분 필요하다고 그랬잖아.”
[아아.]
심드렁한 목소리는 느슨하게 이어졌다.
[이제 필요 없다.]
심장이 쿵, 뛰었다.
“……어? 왜?”
이연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느리게 정보가 뇌에 새겨졌다. 모르포의 정보가 필요 없다니. 멍하니 그 사실만 되뇌었다. 패닉에 빠진 상대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은 음성은 가차 없이 사실을 고했다.
[이미 얻었어.]
몇 초 후에야 말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산오가 인분을 찾았다면, 이제 더 이상의 정보가 필요 없게 된 거라면.
그렇다면 산오는 이연과 함께 있을 이유가 없다.
“그…… 그래서 나간 거야?”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연은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냉랭하던 뒷모습, 싸늘한 얼굴. 열리지 않는 현관문. 그런 것들이 도출한 결론이 점점 선명해졌다. 낙관적으로만 생각했던 상황이 서서히 끼워 맞춰졌다.
[그래.]